찬란한 금빛으로 눈부신 황홀한 교토 금각사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교토를 찾는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높은 절이다. 결코 싸지 않은 400엔의 입장료를 물고 들어가서 보는 것은 작고 아담한 연못 건너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금각사 하나뿐이다. 잔잔한 연못 건너편 금각사를 배경으로 방문객들은 저마다 가지고 온 카메라에 사진 몇 장을 찍고 발길을 돌린다. 금각사 뒤편으로 아담하게 꾸민 정원은 둘러보면 그런대로 운치가 있지만 대부분 이곳은 성큼성큼 걸어 돌아 나오기 일쑤다. 금각사를 다른 이름으로는 녹원사(鹿苑寺)라 부르는데 이 일대에는 과거에 서원사라는 절이 있었고 주변에는 요즘으로 치면 지체 높은 공무원(公卿)의 별장이 자리했던 곳이다. 경치가 썩 좋았던 듯 이 자리는 다시 무로마치시대 장수인 아시카가(足利義滿,1358-1408)의 화려한 정원을 갖춘 별장으로 활용되다가 명치 이후에는 금각사로 개조 되어 마침내 1994년에는 천년고도 교토의 문화재로 세계유산에 등록을 마쳤고 지금은 손꼽히는 교토의 볼만한 유적지로 자리 잡았다. 보기에 화려한 금박은 강렬한 자외선 햇살 탓에 1
일본도 체험박물관이 늘고 있다. 기존의 박물관이 건물 하나 지어놓고 그 안에 기념물이나 사진 등을 전시하는 공간이라면 체험박물관은 다양한 모형을 갖춰놓거나 시설물을 복원하여 방문자가 좀 더 체험으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서 생동감이 있고 활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기존의 박물관이 흑백사진이라면 체험 박물관은 컬러풀한 동영상 속에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적합한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체험박물관의 하나가 기후현 후와군 (岐阜縣 不破郡 關ケ原町 關ケ原1701-6)에 있는 ‘세키가하라 워 랜드’이다. 우리에게는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로 잘 알려진 ‘세키가하라’는 기후현의 한 마을이름으로 고대부터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은 나고야를 중심으로 한 주쿄권(中京圈)과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권(關西圈)의 접점 지역으로 일본의 동서를 잇는 JR 도카이도 신칸선(新幹線)과 JR 도카이도 혼센(本線)이 마을을 지나고 있어 어디서나 접근이 쉽다. 이곳에서 벌어진 400여 년 전의 대규모 내전이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은 (1536-1598) 죽기 전에 후계자인 아들 히데요리를 부하들에게 부탁하며
호쿠사이란 풍속화가가 있다. 평생 3만 점의 그림을 그린 화가로 72살에 후지산 36경(富嶽三十六景)을 그려 독보적인 화풍의 화가로 자리 잡은 호쿠사이(葛飾 北齋,1760-1849)는 풍속화의 일종인 우키요에(浮世繪) 화가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 멀리 눈 덮인 후지산이 보이고 바로 앞에는 일렁이는 파도가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듯한 호쿠사이 작품 ‘바다(海)’는 프랑스 작곡가 드비쉬(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가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이 그림을 만난 뒤 영감을 얻어 ‘바다’라는 곡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을 만큼 호쿠사이는 서양 예술가들에게도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우키요에(浮世繪)는 에도시대에 성립한 그림으로 연극, 고전문학, 와카(和歌, 일본 전통 시),풍속, 전설, 기담, 초상, 정물, 풍경, 문명개화, 황실, 종교 따위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우키요(浮世)란 말은 ‘현대’라는 뜻인데 이때의 현대란 주로 에도시대(1603-1868)를 말한다. 우키요에를 판화그림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원래는 손수 그린 그림(肉筆)과 목판화를 모두 일컫는다. 육필화에는 병풍화, 두루마리그림, 족자, 화첩, 부채그림을 모두 포
1972년 12월에 일본에서 나온 역사독본에는 ‘일본 영웅 100명’이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 후쿠자와 유키치(복택유길) 등이 나란히 등장한다. 정말 이들은 영웅이 될 수 있을까? 답은 'NO'다. 지면상 오늘은 일본이 ‘근대화의 아버지’라 추앙하고 있는 후쿠자와의 더러운 아시아 침략 근성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8월 29일은 101년 전 일본 제국주의에게 조선이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날로 오늘 우리가 이날을 기억하는 한 ‘후쿠자와 유키치’란 인물도 결코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될 인물이다. 그가 아시아에서 왜 원흉으로 꼽히는지 3가지만 들겠다. 첫째. 후쿠자와 유키치는 (福澤諭吉, 1835~1901) 아시아를 능멸하고 침략을 선동했다. "조선 침략의 목적은 일본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며 남을 위한 게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다." "조선국은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없는 병자와 같다." "대만인은 오합지졸 좀 도둑떼" "청국병사는 돼지꼬랑지 새끼" "조선과 중국 이 두 나라는 진보의 길을 모르고 구습에 연연하며 도덕마저 땅에 떨어진데다가 잔혹, 몰염치는 극에 달하고 거
지난주에 이어 일본이야기는 100회 특집으로 51회부터 99회까지 중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한다. <51회> 때는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20분. 강제징용에서 풀려나 부산항으로 가는 4,730톤급 해군특무함대 ‘우키시마호 (浮島丸)’를 타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을 밟기 직전 일본의 잔악한 귀국선 폭파로 수많은 조선인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마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승선자 7,000여 명 중 4,000여 명이 교토 마이즈루항 앞바다에 수장 된 지 올해로 65년(2010년)을 맞이한다.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우키시마호의 도리우미 함장은 사건전모를 발표하고 조선인 3,735명 중 524명과 일본인 25명을 합해 총 54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였으나 승선장부가 없는 상황에서 일본측의 이런 숫자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애초에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고 진로변경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①음료수를 실으려고 ②패전 후 해군의 사기저하로 부산항까지의 운항 거부 등을 들고 있으며, 폭발 원인은 미군의 기뢰를 건드렸기 때문 등으로 발표하였으나 선박 인양이 되고 난 후부터 의도적으로 폭발시켰다는 의혹설이 제기된 가운데 1
100. 일본 이야기 100회를 맞이하면서(1) -다이아몬드 한 상자보다 소중한 것- 이번 주로 일본이야기가 100회째를 맞이합니다. 그간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백일잔치니까 수수팥떡과 흰설기를 쪄서 돌려야겠지만 일본이야기니 만치 일본의 풍습을 따라야겠지요? 일본은 백일잔치가 없습니다. 그 대신 오미야마이리(お宮參り)라고 해서 태어난 지 30일 되는 아기를 강보에 싸서 신사참배를 합니다. 백일잔치는 아무래도 집안잔치라고 볼 수 있고 신사참배는 신과의 연결고리이니까 왁자지껄하고 사람 냄새나는 잔치 느낌은 한국의 백일잔치에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김영조 소장님의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는 오늘로 2,143회를 맞이하므로 일본이야기와는 속된말로 게임이 안 되지만 돌이켜보니 1주일에 글 한 편 쓰기도 어지간히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느낌입니다. 이른바 원고 청탁의 경우에는 며칠까지 무슨 내용으로 써달라는 주문에 따라 쓰면 되는 것이지만 혼자 글감을 고르고 원고를 완성해야 하는 일은 망망대해를 건너는 심정입니다. 때로는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지만 반면 늘 무엇을 쓸까 궁리해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9. 백제 성왕이 최초로 불상을 보낸 절 향원사 가만히 서 있어도 숨이 턱턱 차오르는 아스카의 더위는 말 그대로 찜통 속이다. 한국과 달리 바람 한 점 없이 푹푹 쪄대는 아스카의 한 낮은 수은주가 39도를 오르내렸다. 나라현 타카이치군 아스카촌 (奈良県 高市郡 明日香村)에 있는 향원사는 ‘일본 최초의 절’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절로 일본의 사서(史書)에 일찌감치 그 이름이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552년에 백제 성명왕이 금동 석가불을 보내왔는데 향원(向原)에 있는 개인 집을 깨끗이 치운 뒤 절로 사용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가정집을 고쳐서 임시로 절로 사용한 것일 뿐 제대로 된 절은 이후 50여 년이나 지나야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야마토(645년에 일본이라는 국호 생김)조정에서는 불교 공인 후 불상을 안치할 절을 지을 기술자도 없고 승려도 없으며 경전도 아직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 꾸준히 한반도로부터 경전을 지닌 고승(高僧)들이 건너가고 대규모의 목수들이 파견되어 불사(佛事)를 한 결과 비조사(飛鳥寺,아스카데라), 사천왕사(四天王寺,시텐노지), 법륭사(法隆寺,호류지)들이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향원사가 자
바야흐로 일본은 불꽃놀이 계절이다. 무더운 여름 밤 크고 작은 강가에서 쏘아 올리는 형형색색의 불꽃은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즐겁게 해준다. 십여 년 전 요코하마의 밤하늘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도쿄의 찜통더위에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을 때 요코하마에 살고 있는 친구 우키코가 나에게 보여 줄 게 있다며 불꽃놀이에 초대했다. 항구도시 요코하마는 도쿄에서 전철로 1시간이면 닿는 곳으로 도쿄보다 집값이 싸고 주거환경이 좋아 도쿄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너무 늦지 않게 오라’는 우키코의 성화에 불꽃놀이 세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벌써 불꽃놀이 장소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불꽃놀이에도 명당자리가 있어서 유로석을 뺀 곳으로 불꽃을 쏘아 올렸을 때 가장 잘 보이는 곳은 아침부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고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이나 커피숍 역시 좋은 자리를 맡으려는 사람들로 자리 쟁탈전이 보통이 아니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서너 시간씩 불꽃을 쏘아대니 좋은 자리 쟁탈전이 날만도 하다. 한국에서는 한여름의 고정행사인 일본의 불꽃놀이를 하지 않기에 나는
날은 더워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가운데 오카데라(岡寺, 나라현 타카이치시 아스카무라 오카 806)를 찾아가는 길은 고역이었다. 천여 년 전 백제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라면 도중에 목적지를 바꾸고 싶을 만큼 칠월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가시와라진구마에역에서 1시간에 한 대씩 다니는 600엔짜리 1일자유권 버스를 타고 오카데라마에(岡寺前)에서 내려 한 십여 분 거리지만 경사진 언덕 위의 절까지 가기에는 숨이 차오른다. 절로 가는 길은 작은 승용차 하나 다니기도 버거울 만큼 좁았고 양쪽으로는 주택들이 들어 서 있었다. 한국에 그 흔한 마을버스는 아예 길이 좁아 엄두도 못 낼 곳에 오카데라는 자리하고 있었다. 절 입구에서 300엔의 입장료를 내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무척 반긴다. 보아하니 저 밑의 아스카데라(飛鳥寺) 까지는 한국인들이 찾아 와도 이만치 떨어진 언덕에 자리한 오카데라(岡寺)를 찾는 한국인은 드물었을 듯싶다. 이곳은 사전에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면 발길을 옮길 수 없는 절이다. 서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서국 33 (西三十三箇所) 관음도량 성지 중 7번째 절이라고는 하나 우리 일행이 절을 찾았을 때는 사람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오카데라는 동
아스카의 넓디넓은 땅 스이코 여왕의 도요우라궁 예전엔 소가 씨의 개인 절터 자리였었지 지금은 향원사 주지 마나님 벗들이 차 마시는 곳 가까이에 있는 아스카절 종소리 사라진지 오래 금당 부처님만 고구려 혜자스님 후손 보고 살며시 미소 짓는다. '백제 없이는 아스카는 없다’고 할 정도로 일본 남부지방인 아스카-나라-오사카 지역은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연일 39도의 폭염으로 일본 열도에서 열사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하던 7월 초순 다시 찾은 나라 아스카 지역도 수은주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아스카는 한자로 ‘飛鳥’, ‘明日香’, ‘安宿’ 등으로 표기하는데 모두 일본말 소리는 아스카(asuka、あすか)로 난다. 비조(飛鳥)라는 한자를 새겨 어떤 이들은 새들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특별히 새와 관계있는 곳은 아니다. ‘明日香’이라고 쓰는 경우는 당시 수도가 아스카에 있었으므로 밝은 내일을 기약하는 고장이란 뜻 새김이 있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安宿’이라고 쓰는 경우도 싸움이 없이 평온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부여해도 무방할 것이다. 원래 아스카는 지금의 나라현(奈良 高市郡 明日香村)과 오사카(大阪府 羽曳野)에 있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