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불볕더위 속에 기다린 가을바람이 살랑 불고 매미가 떠난 푸른 숲에서 귀뚜라미 세레나데 울리면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옵니다. 지붕에 뜬 하얀 달덩이 대청마루에 늘린 빨간 고추 알밤송이 툭툭 떨어진 숲속에 다람쥐가 쪼르르 나무를 타면 가을만찬이 분주합니다. ... 박소정, <가을은 당신의 선물입니다> 가운데서 "가을이구나. 드디어 아들 며느리도 손주들과 함께 모이는구나. 그동안 부쩍 큰 손주들, 이미 가슴을 넘긴 키를 몸으로 대어보고 칭찬을 해주자. 애들도 입맛이 살아나 잘들 먹겠구나. 그 애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더라?" 지난달 한가위를 앞두고 우리 부부는 고민을 한참을 했다. 애들이 와서 하루건 이틀이건 자고 갈 것인데, 한가위 날 아침을 잘 먹고 나서 애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그네들이 못 보는 것은, 집 주위 산책길에 있는 밤나무에서 알밤을 주워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미 알밤이 거의 다 떨어지고 땅에 떨어진 밤송이들도 짙은 갈색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애들에게 알밤이 들어있는 밤송이를 보여주고 그것을 발라보는 체험을 하게 해주면 좋을 텐데...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서울 은평구 진관동, 내가 사는 동네다. 요즘은 도로이름을 주소로 쓰지만 행정구역 이름으로 진관동이 엄연히 살아있다. 진관동이란 이름은 북한산 자락에 있는 진관사라는 오래된 절 이름에서 비롯됐다. 진관사는 원래 이름이 없는 작은 암자였으나 고려 왕조 초기 천추태후에 의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현종이 이 절에 숨어들어 진관스님의 보호로 목숨을 건진 뒤에 임금이 되고 나서 진관스님을 위해 절을 키우고 절 이름도 스님의 법호를 그대로 쓰도록 해 큰 절이 되었다. 진관사는 수륙재를 올리는 절이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개국한 뒤에 그 과정에서 숨진 많은 영혼을 천도해 주려고 집권 4년째인 1395년 수륙재(水陸齋)를 처음 지내고는 이곳에 수륙사(水陸社)라는 사당을 개설해 왕실 주관으로 수륙재를 봉행하도록 해 그것이 성종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고는 잊히다가 1970년대에 진관이란 동명의 스님에 의해 수륙재만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돼 2013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해마다 가을에 진관사에서는 수륙재가 거행된다. 이 의식을 올리는 목적은 죽은 뒤에 윤회의 업보를 받아 물과 땅에 떠돌아다니는 영혼들을 불보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올 한가위야말로 우리들이 몇 년 동안 기다리던 명절 아니었던가? 지난 6월부터 코로나에 대한 위기경보가 하향 조정되어 이 명절에는 코로나19 같은 호흡기 질환 걱정 없이 고향을 오가고 부모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되었기에 말이다. 3년 만에 제대로 한가위를 맞이하는 것이다. 더구나 일요일에서 개천절로 이어지는 10월 2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됨으로써 올해 한가위는 내려갈 때는 바쁘고 막히겠지만 고향에서 돌아올 때는 여유를 가질 수 있으니, 다행이다. 다만 연휴가 이어지면서 고향 대신에 나라 밖으로 여행을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아쉬움이지만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 많은 것을 보면 좋게 생각해 줄 여지가 없지는 않겠다.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은 달빛을 보는 순간 고단한 인생, 고향을 떠나 살 수밖에 없는 우리 나그네의 심사를 압축해서 쓸어 담았다. 床前明月光 침상 앞 달빛 어찌 그리 밝은지 疑是地上霜 서리가 내린 줄 알았잖아 擧頭望明月 고개 들어 밝은 달 보다 보니 低頭思故鄕 고향 생각에 고개 절로 내려가네. 우리가 보름달이 좋은 것은 그 속에 고향이 있기 때문이리라. 고향은 곧 부모님이고 부모님은 곧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내가 사는 동네는 아파트 단지로서 도로명 주소로는 연서로 44길에 얼마... 이렇게 되어 있는데 속칭은 폭포동이고, 이 근처에 오면 안내판에도 폭포동이라고 써 있다. 그것은 단지 동쪽에 있는 북한산의 산 중턱에 바위틈으로 파인 물길을 따라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려 아파트 단지 안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폭포가 흐르는 골짜기, 곧 폭포동이 되는 것이다. 이곳은 북한산 북서쪽의 등산로나 산책로, 둘레길 등이 단지를 둘러싸고 있고, 여기에 세워진 아파트 건물도 동간 거리를 충분히 두고 있어 주거환경으로서는 쾌적하다. 필자도 3년 반 전 이곳에 이사와 이런 환경에 만족하며 은퇴 후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주 이곳 주민들이 구청 앞에 몰려가서 시위를 했다. 주민 250여 명이 참여해 은평구청 입구에서 시위했는데 시위의 구호는 불광중~폭포동 사이에 도로개설 계획을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이 도로가 도로개설에 따른 실이익은 없이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 환경을 크게 해친다는 이유에서다. 구청은 우리 단지에서부터 뒷길로 불광중학교로 이어지도록 폭 12미터, 길이 400미터의 도로를 새로 개설해 이 일대의 교통 흐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 ‘별 헤는 밤’, 윤동주 시인 윤동주가 밤하늘의 별을 세던 때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인 1941년 11월 5일이었다. 이때는 날이 제법 차가워졌기에 시인은 밤하늘 별을 다 세지 못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것인데 그보다 3년 전인 1938년 9월 초, 아직 여름 기운이 남아있어서인지 윤동주는 잔디밭 위에서 작은 생물과 대화를 한다; 귀뚜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귀뚜라미와 나와 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귀뚜라미와 나와’. 윤동주 시인 윤동주가 듣고 이야기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바로 얼마 전 여름의 전령사라는 매미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어느새 가을의 전령사인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구나. 계절이 가을로 줄달음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어느 시인은 귀뚜라미가 사람 냄새를 그리워하여 저리도 간절하게 운다고 하는데, 귀뚜라미만 그럴 것인가? 우리도 가을이 되면 사람이 그리운 것은 매한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옛날 중국의 전국시대에 사광(師曠)이란 금(琴, 현악기의 하나)의 명인이 있었다. 그가 임금의 명을 받아 금을 타기 시작하니 검은 학(鶴)들이 궁문의 기둥에 모이기 시작하더니 8쌍을 이뤘다. 다시 연주하니 학들이 좌우로 8마리씩 늘어섰다. 3번째 연주하니 학들이 울어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기(禮記)》 〈악기(樂記)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음악의 힘이 학(鶴)을 불러 모으고 춤을 추게 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일화로 자주 인용되거니와 이런 이야기는 먼 옛날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지난주 서울의 어느 가정집 방안, 거기에 첼로를 안은 여성 주자가 연주를 시작하자 곧 어디선가 백조가 날아들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 음악을 듣는다. 사실 이때 연주가는 프랑스의 작곡가 생상스(1835~1921)의 '백조(白鳥)'를 연주한 것이지만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실제로 백조가 눈앞에서 유영하는 듯한 착각에 잠시 빠져 있었다. 중국에서 금을 연주했다면 이날 연주한 첼로도 중국에서는 대제금(大提琴)이라고 하니 금이라 할 수 있고, 그러니 그야말로 '금주학래(琴奏鶴來)', 곧 금을 연주하자 학이 날아왔다는 옛 고사성어 그대로다 그동안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 5백만 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작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속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북쪽으로 부리를 벼리러 스비스조드로 날아갈 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여자가 잠든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 .... 이순원, 《은비령》 1996년 발표되어 절찬을 받은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은 맨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2천 5백만 년 뒤에 다시 돌아온다는 혜성에 실어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우주라는 영원의 시간에 봉인해놓았다. 18년 전 소설의 무대가 된 은비령을 처음 밟고서 그 느낌을 압축한 글을 쓰면서 나는 그들의 별 대신에 내 마음의 별을 밤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시리우스란 별의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올여름에 어디 휴가 안 가세요?」 「아, 은비령으로 갑니다」 「네? 은비령요?」 친구는 그런 지명이 어디 있느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 듣는데요, 은비령이란 곳은?」 「아, 그러실 것입니다. 한계령에서 가리산으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묻는다. 「지도를 찾아봐도 안 나오는데요?」 「아, 물론 안 나옵니다. 같은 이름의 카페가 혹시 검색될지도요」 이렇게 말하고는 나는 친구가 운전하는 자동차 편으로 서울을 벗어나 동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가는 곳은 강원도 인제 하추리에 있는 한 펜션. 서울서 양양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태백산맥 바로 밑 인제 요금소까지 온 뒤 거기서 일반국도로 내린천을 따라 북쪽으로 달리면 펜션이 나온다. 서예를 하시는 송은 심우식 선생이 우리를 맞는다. 그분이 우리에게 와서 하루 이 펜션에 자고 가라고 권하셔서 문득 지난 추억이 생각나 얼른 달려오는 길이었다. 그 펜션은 은비령에 대한 소중한 인연과 추억을 맺은 곳이다. 18년 전이면 내 나이 50대 초반, 당시 회사 일로 바쁘다가 당시에도 이 폔션에 초대받아 급하게 휴가를 내고 가족과 함께 내려왔다. 우리는 하루를 묵고 그 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오늘날 해외여행이라고 하면 집집마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때지만 80년대 초반만 해도 좀처럼 가기 어려운 특별한 일이었다. 방송국 기자생활을 하고 두 번의 해외 특파원으로 나라 밖를 많이 다닌 필자만 해도 첫 나라 밖 방문은 입사 후 6년이 지난 1983년이었다. 당시 유네스코 한국본부가 우리의 대학생 청년들이 나라 밖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일본역사문화탐방단을 만들었는데, 필자는 이 탐방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1983년 8월 17일에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배를 타고 들어가 첫날을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라는 도시에서 하루를 묵었었다. 그런데 지난 초여름 부산의 친구들이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무선 동호인 연례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하기시에서 하룻밤을 묵고 간다고 해서 필자도 동행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가 해외탐방 첫날을 보낸 곳인데 이번에 꼭 40년 만에 다시 가게 되는 것이다. 하기라는 곳은 일본이 우리 동남해안과 얼굴을 맞대고 있어서 임진왜란 때 일본이 울산과 부산지역에서 차출한 우리의 도자기 장인들을 배로 싣고 곧바로 도착한 곳이고, 이때 끌려간 분들이 가마를 연 것이 유명한 하기요(萩窯)이다. 또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고 아침에도 20도를 넘는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더니 드디어는 숲의 나뭇등걸과 가지에 자리 잡은 너희들의 울음소리가 스테레오 합창처럼 들려온다. 몇 년 새 나무들이 커져서 거기에 있는 너희들이 모습이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지만, 소리는 엄청나게 크고 잘 울린다. "맴-맴-맴-맴-매애앰-"을 반복하며 울다가 마지막에 음이 높아지며 ''매애↗애애애...''를 길게 내는 것을 보니 너희들은 참매미일 것이구나. 마지막에 뒷다리를 들어 올리고 소리 내는 것도 그렇고. 그 옆에는 "르르르르르르르르르- 츠- 와아치- 르르르르스피이 - 피르빌빌빌빌빌 피오 스-피오츠츠츠스스…." 이런 소리를 내는 것이 필시 애매미일 것이다. "쓰-름 쓰-름" 쓰름매미 소리도 들린다. 참매미 소리가 가장 대표적이긴 하지만, 너희들이 내는 소리는 일일이 옮겨적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숲의 앞과 뒤에서 한꺼번에 울어대니 이것이야말로 매미 교향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우리 인간들이 너희를 반긴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너희들이 땅속에서 애벌레 상태로 5년 전후의 긴 시간을 보내다가 한여름 기온이 올라가면 허물을 벗고 매미가 되어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