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태조는 고려를 건국하고, 고려의 황궁인 송도 수창궁에서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 말하자면 송도 곧 개성은 조선왕조의 첫 번째 서울인 것이지요. 그러다 태조 2년인 1393년 3월 15일 마침내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이듬해인 1394년인 태조 3년에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천도했습니다. 그 뒤 정종이 임금에 오르자 형제 사이 골육상쟁에 회의를 느껴 1399년 개성으로 서울을 옮깁니다. 그런데 조선의 세 번째 임금 태종이 등극하면서 조선은 다시금 서울을 한양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서울이 되려면 첫째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편리한 곳, 둘째 강과 해상을 통하여 물자를 수송하기가 편리한 곳, 그리고 셋째는 사방으로 거리가 균등하여 교통이 편리한 곳인데 한양은 이 세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요. 하지만 서울을 옮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서울이 되려면 지리적 여건도 중요하지만 명분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양으로 옮겼다가 다시 송도로 옮긴 지 얼마 안 되는데 다시 한양으로 옮기려면 중요한 명분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예배(禮拜)한 뒤에, 조상의 혼백을 모신 묘당(廟堂)에 들어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로 장희빈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그 김만중은 또 다른 고대소설 《구운몽(九雲夢)》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한글본과 한문본이 모두 전하는 《구운몽》은 효성이 지극했던 김만중이 모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하지요. 《구운몽》은 《옥루몽》, 《옥련몽》 등 후대 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구운몽》은 이전에 있었던 다른 소설에 견주어 새로운 형식의 작품으로서 한국 고대소설문학사에 있어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힙니다. 김만중은 아버지 김익겸이 병자호란 때 순국하자 어머니 해평 윤씨가 형 김만기와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와 길렀습니다. 어머니 윤씨의 할아버지 윤신지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인 정혜옹주의 남편이었는데 윤신지는 손녀딸과 이야기를 하면 가슴속이 활짝 열린다면서, 그녀가 사내라면 대제학이 되었을 것이라고 칭찬했다고 하지요. 김만중은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률(唐律)》을 모두 윤씨에게 배웠습니다. 윤씨는 자식들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의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가난하여 책을 사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곡식을 주고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스무째로 첫눈이 내린다고 하는 “소설(小雪)”입니다. 소설 무렵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치므로 “소춘(小春)”이라고도 부르지만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많이 추워집니다. 한편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또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믿습니다. 대개 소설 무렵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이날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며, 뱃사람들은 소설 무렵에는 배를 잘 띄우지 않습니다. 이는 고려시대에 '손돌'이라는 사공이 배를 몰던 중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흔들리자, 사공이 고의로 배를 흔든 것이라 하여 배에 타고 있던 임금이 사공의 목을 베었다는 강화(江華) 지역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소설은 겨울이 시작되는 때로 서둘러 문에 문풍지도 바르고, 외양간에 거적 치고, 땔나무도 해놓습니다. 또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기도 하며 목화를 따서 이불을 손보기도 하지요. 또 겨우내 소먹이로 쓸 볏짚도 모아두면서 미처 해놓지 못한 겨울준비를 마저 합니다. 이때 감이 많이 나는 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96년 11월부터 1997년 4월까지 SBS 드라마 <임꺽정>이 44부작으로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임꺽정>은 난세를 살다 간 의리의 도적이자 풍운아인 임꺽정의 한 많은 생애를 그린 벽초 홍명희(洪命憙)의 소설 《임꺽정》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였습니다. 당시 많은 시청자들은 임꺽정에 자신을 이입시켜 큰 감동을 받았지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에 우리는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드라마의 바탕이 되었던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 91년 전인 1928년 오늘(11월 21일)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소설들은 대부분 역사의 주체를 민중이 아닌 위대한 개인으로 보는 영웅사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와 달리 《임꺽정》은 주인공은 물론 다양한 신분의 백성들을 등장시켜, 당시의 민중들의 삶을 폭넓게 묘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임꺽정만을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고, 청석골 여러 두령들도 임꺽정 못지않게 큰 비중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나갑니다. 아울러 임꺽정은 휘하의 두령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능력도 있지만 인간적인 약점을 함께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어 남다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는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사적 제32호 <독립문(獨立門)>이 있습니다. 1896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습니다. 바로 122년 전 오늘이지요. 45×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높이 14.28m, 넓이 11.48m로 프랑스 개선문을 모방하여 만든 건축물입니다.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습니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지요. 모양만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지 쌓는 방법은 우리나라 전통기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무지개문 좌우의 받침기둥, 모서리의 귓돌, 꼭대기의 난간만이 서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하지요. 1979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7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보물 제636호 “도기서수형명기(陶器瑞獸形明器)”가 있습니다. 여기서 서수형 명기란 서수(瑞獸) 곧 기린 따위의 상서로운 짐승 모양을 한 그릇으로 장사 지낼 때 죽은 사람과 함께 껴묻거리(부장품)로 묻었습니다. 이 “도기서수형명기(陶器瑞獸形明器)”는 경주 미추왕릉 앞에 있는 무덤들 가운데 C지구 제3호 무덤에서 출토된, 거북 모양의 몸을 하고 있는 높이 15.1㎝, 길이 17.5㎝, 밑지름 5.5㎝의 토기지요. 머리와 꼬리는 용 모양이고, 토기의 받침대 부분은 나팔형인데, 네모꼴로 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등뼈에는 2개의 뾰족한 뿔이 달려 있고, 몸체 부분에는 앞뒤에 하나씩, 좌우에 2개씩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지요. 머리는 S자형으로 높이 들고 있고 목덜미에는 등에서와 같은 뿔이 5개나 붙어 있습니다. 눈은 크게 뜨고 아래ㆍ위 입술이 밖으로 말려 있고, 혀를 길게 내밀고 있으며, 꼬리는 물결모양으로 꾸불꾸불하지만 끝을 향해 거의 수평으로 뻗었는데, 여기에도 뿔이 붙어 있지요. 가슴에는 물을 따르는 주둥이가 길게 붙어 있고, 엉덩이에는 밥그릇 모양의 사발이 붙어 있습니다. 그릇 겉은 진한 흑회색을 띠었고, 받침ㆍ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는 제80돌 ‘순국선열의날’이었습니다. ‘순국선열의날’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위대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찬탈당한 날인 11월 17일을 기억하기 위해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날을 기념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모두 국가지정 독립운동가임은 같습니다. 그러나 국권침탈 앞뒤로부터 1945년 8월 14일 곧 광복절 전까지 일제에 항거하다가 목숨을 바친 분을 선국선열이라고 하는 반면 항일투쟁을 했지만 살아서 광복을 맞이한 분은 애국지사라고 합니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는 순국선열이지만 김구 선생은 애국지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흔히 순국열사를 생각할 때 3.1만세운동 이후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항일투쟁을 3.1만세운동 이후만 한 것은 아닙니다. 더 멀리 1895년 명성황후참살사건(을미사변)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아니 그 한 해 전인 1984년 동학혁명이 먼저 일본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지요. 따라서 동학혁명 이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895년(고종 32) 오늘(11월 15일) 김홍집내각은 성년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단발령(斷髮令)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시해되어 반일의식이 한층 높아진 상태에서의 단발령은 백성 사이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습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라”라는 말은 공자(孔子)가 제자인 증자(曾子)에게 해 준 말로 “너의 몸과 터럭(털), 그리고 살갗은 모두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시키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니라.”라는 윤리의식이 뿌리 깊었던 유생들에게는 목숨을 내놓으라 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지요. 고종과 태자가 압력에 못 이겨 상투를 자른 뒤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는 대신직을 사임하였고, 정계에서 은퇴한 원로 특진관 김병시(金炳始)도 단발령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하였습니다. 한편, 유길준이 당대 유림의 으뜸 인물 최익현 선생을 잡아와 상투를 자르려 하자,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단발을 단호히 거부하였지요. 또 미처 피하지 못해 강제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조상들은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나무와 바위 그리고 미물(微物, 벌레 따위의 하찮은 동물)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눈길과 손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식구들이 살아가는 공간인 집도 예외는 아니지요. 집의 중추인 상량에 성주신(城主神), 안방에 아이를 점지하여 주는 삼신, 부엌에는 조왕신(竈王神), 마당에는 터주신, 뒷간에는 측신(廁神), 뒤꼍 장독대에는 천룡신(天龍神), 문간에는 문간신, 우물에는 용왕신, 광에는 업신 등 집의 곳곳에 신이 있어서 가족의 안녕을 지켜주고 복을 내려준다고 믿었습니다. 집지킴이 신들 가운데 단연 으뜸은 바로 성주신입니다. 성조(成造) 곧 마룻대에 산다고 해서 상량(上樑)이라고도 하는데, 가신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신이지요. 성주신은 집안의 모든 운수를 관장하며, 그 집안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 곧 대주(大主)를 상징하고 그 수명과 운수까지를 맡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을 지을 때도 기둥 위에 보를 얹고 지붕틀을 꾸민 다음 마룻대(상량)를 놓을 때는 상량고사를 성대하게 올려야만 합니다. 이때 제물로는 흔히 돼지머리와 쌀 한 바가지쯤 떠놓으며, 무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무로 된 가구를 오랫동안 쓸 수 있도록 고정시켜주고, 문판을 몸체에 잇대어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하려면 각 모서리와 여닫이문 손잡이에 쇠붙이로 덧대야 했습니다. 그래서 경첩, 들쇠(서랍이나 문짝에 다는 반달 모양의 손잡이), 고리, 귀장식(가구의 모서리에 대는 쇠붙이 장식), 자물쇠 같은 것들을 만들어 붙였지요. 이런 것들을 통틀어 장식(裝飾)이라고 부르는데 보기 흉한 못자국을 가려주고 옷장의 품위를 지켜주지요. 이 가운데 경첩은 여닫이문을 달 때 한쪽은 문틀에, 다른 한쪽은 문짝에 고정하여 문짝이나 창문을 다는 데 쓰는 철물을 이릅니다. 잘 깨지지 않도록 대개 구리에 주석과 아연을 섞어 만들었는데 쓰임새와 가구 종류에 따라 모양이 매우 다채롭습니다. 좌우대칭의 금속판이 전면에 드러나며 장식성을 더한 것을 ‘노출경첩’이라 하고, 금속판을 안쪽에 붙여서 전면에서는 一자형의 단순한 기둥만 보이도록 하여 실용성을 살린 것은 ‘숨은경첩’이라고 합니다. 경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드러날 때는 섬세한 무늬가 바라다보기만 해도 신기하고 아름답습니다. 경첩 이름은 모양새에 따라 동그레경첩, 이중병풍경첩, 제비추리경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