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소주를 마신다 / 슬픔을 타서 소주를 마신다 / 사랑을 되새기며 소주를 마신다 / 배신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신다 / 인생을 풀어 놓고 / 고통을 참아가며 / 저주와 능멸을 버리기 위하여 /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신다 / 가슴을 열고 환희와 행복을 / 찾기 위하여 소주를 마신다.” <소주 / 성기조> 우리가 흔히 소주(燒酒)라고 하는 것은 노주(露酒)ㆍ화주(火酒)ㆍ한주(汗酒)ㆍ백주(白酒)ㆍ기주(氣酒)라고도 하는데 증류주와 희석주로 크게 나눕니다. 이 가운데 증류주는 소줏고리라는 증류기로 증류한 술이며, 특이한 향을 강하게 풍기는데 조금씩 빚는 술로 예로부터 널리 마셔왔습니다. 일반 양조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서 오래 두면 대개 식초가 되거나 부패하게 되는데, 이러한 결점을 없애려고 만든 것이 증류식 소주입니다. 현재 전통주의 맥을 이어오는 안동소주ㆍ개성소주ㆍ진도홍주ㆍ제주민속주 등이 그것이지요. 페르시아에서 발달한 증류법이 원(元) 나라와 만주를 거쳐 고려로 들어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서 발전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희석식은 고구마나 타피오카 등의 원료를 발효시켜 정제한 주정(에틸알코올)에 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궁중에서 왕자가 태어나면 ‘권초의 예(捲草之禮)’라는 것이 있다. 곧 태어난 날 다북쑥으로 꼰 새끼를 문짝 위에 걸고, 자식이 많고 재화가 없는 대신에게 명하여 3일 동안 소격전(昭格殿, 조선시대에 도교 의식을 위하여 설치한 관서)에서 재를 올리고 초제(醮祭, 별에 지내는 제사)를 베풀게 하는데, 상의원(尙衣院)에서는 5색 채단을 각각 한 필씩 바쳤고, 남자면 복건(頭)ㆍ도포ㆍ홀(笏)ㆍ오화(烏靴)ㆍ금대(金帶)요, 여자면 비녀ㆍ배자(背子 ; 덧옷)ㆍ혜구(신의 하나) 등의 물건을 노군(老君, 물러난 임금) 앞에 진열하여 장래의 복을 빌었다.” 위 글은 조선 전기 학자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 나오는 것으로 여기에 보면 왕자가 태어났을 때 바치는 예물로 덧옷의 하나인 ‘배자’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배자’는 이미 조선 전기부터 입었던 옷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견주어 ‘마고자’는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들여 온 만주족 옷인 “마괘”를 변형한 것이고 ‘조끼’는 양복이 들어올 때 함께 들어온 것으로 서양 조끼를 변형하여 입은 것입니다. ‘배자’와 ‘마고자’ 그리고 ‘조끼’는 모두 한복 저고리 위에 입는 덧옷이지만 다른 점은 마고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신해일에 관청에서나 여염집에서 소나무 차양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매년 더운 여름에 궁궐도감이 왕의 침전에 소나무로 차양을 만들면 그들에게 은병(銀甁, 화폐) 두 개를 내려주는 전례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 왕이 ‘관청과 여염집의 소나무 차양을 금지하는데 나만 해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띠를 엮어서 차양을 만들도록 바꾸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도감 관리들이 은병 두 개를 잃었구나.’라고 했다. 이는 《고려사》5 충렬왕 3년(1277) 기록에 나오는 얘기로 고려시대 이미 처마 끝에 소나무로 가림막을 하는 소나무 볕가리개(차양, 遮陽) 풍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생솔가지를 꺾어 엮어서 매달아 더위를 막는 것이지요. 조선 중기의 유생 오희문(吳希文)이 쓴 《쇄미록(瑣尾錄)》에도 “소나무 차양을 만들려 해도 긴 나무기 없어서, 소즐이 종과 말 세 필을 끌고 유선각의 호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어왔다.”라는 구절이 있어 조선시대에도 그 풍습이 계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옥의 처마는 비를 가리는 데에 썼을 뿐 아니라 실내조명을 조절하는 역할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처마를 길게 하면 빛이 적게 들어왔고 짧게 하면 비를 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 바라보이는 산 모습이 점점 파리해 보이고, 구름 끝에는 기러기가 놀라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하지만 근심이 되는 것은 늙은 농부가 가을이 다 가면, 때로 서풍을 맞으며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 위는 조선 중기 문신 권문해(權文海)의 《초간선생문집(草澗先生文集)》에 나오는 상강 기록으로 오늘은 24절기의 열여덟째 “상강”입니다. “상강(霜降)”은 말 그대로 물기가 땅 위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첫 얼음이 얼기도 하지요. 벌써 하루해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으며, 하룻밤 새 들판 풍경은 완연히 다른데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누렇고 빨갛게 바뀝니다. 옛 사람들의 말에 “한로불산냉(寒露不算冷),상강변료천(霜降變了天)”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한로 때엔 차가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상강 때엔 날씨가 급변한다.”는 뜻이지요.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진 날 한 스님이 운문(雲門, 864~949) 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 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는 고려 때 놓은 것으로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농다리”가 있습니다. 농다리는 대그릇 농(籠) 자를 써서 큰물을 담을 수 있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위에서 보면 커다란 지네 같다고 하여 지네다리, 장마 땐 물이 다리 위를 넘어간다 하여 수월교(水越橋)라고도 합니다. 이 다리와 관련된 전설로는 고려 고종 때 임행(林行) 장군이 눈보라가 치는 겨울 아침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때마침 젊은 부인이 친정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에 차가운 물을 건너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 효심에 감탄, 용마를 타고 하루아침에 이 다리를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다리는 보랏빛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만들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리도록 쌓았으며 돌 사이를 석회로 채우지 않았지만 즈믄 해(천년) 동안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요. 요즘 같은 신건축공법이 아닌 기술임에도 천 년의 세월을 꿋꿋이 견딘 농다리는 건축학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라고 합니다. 이 다리는 28칸의 교각을 물고기 비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백자에서 병(甁)은 기본적으로 술병입니다. 그 술병 가운데 제사를 지내려는 제주병(祭酒甁)은 아무 무늬도 없는 순백자로 빚었지만 잔치용 술병에는 갖가지 무늬를 그려 넣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술맛이 났던 모양입니다. 술병에 그리는 그림으로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과 십장생, 매화와 난초가 많지요. 그림 대신 목숨 ‘수(壽)’, 복 ‘복(福)’, 술 ‘주(酒)’ 자처럼 글자 한 자만 쓴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기발하게도 병목에 질끈 동여맨 끈을 무늬로 그려 넣은 보물 제1060호 “백자철화끈무늬병”이 있지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 병은 높이 31.4㎝, 입지름 7㎝, 밑지름 10.6㎝의 크기인데 옛날 술병을 사용할 때 병목에 끈을 동여매 걸어놓곤 했던 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병을 빚은 도공은 술을 마시다 남으면 술병을 허리춤에 차고 가라는 뜻으로 그림을 그려넣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도공의 기막힌 재치와 해학 그리고 익살과 여유가 살아있는 명작입니다. 또 특이한 것은 굽 안 바닥에 적갈색이나 흑갈색을 띄는 철화 물감으로 ‘니ᄂᆞ히’라고 쓴 한글이 있습니다. 그 뜻은 명확치 않으나 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충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 바침)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으뜸 충신이라 할 것이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허위 선생에 대해 평한 말입니다. 111년 전(1908년) 오늘은 허위 선생이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한 날이지요. 선생은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 하여 한국침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려고 하자 언 나라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했습니다. 선생은 배일통문에서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구리를 부셔 칼을 만들고(…)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에 쫓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라고 절규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포천 등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 수차례 일본군을 격파하였지요. 그리고 원수부 13도의병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의병 2,0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와 일본군과 대치,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선조 25년(1592년) 10월 왜군 2만이 침략해 오자 진주 목사 김시민이 3,8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백성과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입니다. 하지만 이듬해 6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을 해왔고 이때 민ㆍ관ㆍ군이 왜군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진주성 싸움에서는 “날틀”이 활약했었다고 합니다. 날틀은 한자말로 ‘비거(飛車)’라고 하여 하늘을 나는 차입니다. 일본 쪽 역사서인 《왜사기》에 전라도 김제의 정평구라는 사람이 비거를 발명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썼는데 왜군들이 큰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날틀은 포위된 진주성과 외부와의 연락을 담당하였는데 마치 해일처럼 밀려오는 10만의 왜적 앞에서 진주성 사람들에게 이 ‘날틀’은 희망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장편역사소설 《진주성전쟁기》를 쓴 박상하 작가는 말합니다. 18세기 후반에 쓴 신경준의 문집 《여암전서(旅菴全書)》와 19세기 중반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이 ‘비거’ 곧 날틀이 등장하지만 정확한 모양이나 어떤 쓰임새였는지는 확실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의 고흐로 불리는 최북은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아 호를 ‘호생관(毫生館)’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최북은 자신의 이름자 북(北)을 둘로 나누어 스스로 칠칠(七七)이라고 했는데 ‘칠칠치 못한 놈’이라고 자기를 비하한 셈입니다. 그러나 양반들은 붓으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풍류를 즐겼지만, 직업적인 화가였던 그는 그림을 그려서 먹고 살아야 했는데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자신의 눈을 찌르며까지 거부했고, 도화서 화원에 얽매이기도 거부하는 자존심의 예술가였습니다. 여기 선문대박물관이 소장한 최북의 ‘게’ 그림 ‘지두해도(指頭蟹圖)’가 있습니다. 일찍이 게를 그리는 것은 과거시험에 갑(甲)으로 통과하라는 뜻이 있어서 수묵화의 좋은 소재였으며 그래서 단원 김홍도의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 같은 그림도 있지요. 그런데 최북 그림의 게는 통통하고 살이 찐 김홍도의 게와는 달리 남성적이고, 칼칼한 느낌이 드러나 보입니다. 그것은 붓으로 그린 김홍도의 그림에 견주어 최북의 그림은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두화는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손톱, 손바닥, 손등 등을 써서 그리는 것이기에 부드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兒旣生矣當洗(아기생의당세) 아이 태어나면 마땅히 씻어야 할 터 盆中貯來淸水(분중저래청수) 동이에 맑은 물 담아 오거라 水雖冷兮兒莫啼(수수랭혜아막제) 물이 비록 차더라도 아이야 울지 말라 百病消除堅骨理(백병소제견골리) 온갖 병 없애고 뼈와 피부를 튼튼히 하려는 것이란다 北方苦寒又多風(북방고한우다풍) 북쪽 지방 너무 춥고 또 바람이 많아 耐寒耐風從今試(내한내풍종금시) 추위 바람 참는 것 나서부터 경험하게 하네 이는 조선 후기 문신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한시 ‘아기생(兒旣生)’으로 한시집 《북새잡요(北塞雜徭)》 62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는 북관(北關, 함경도 지방 가운데 마천령 이북 지역) 사람들의 독특한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홍양호는 그의 책 《북새기략(北塞記略)》에서, “아이가 배에서 나오자 곧바로 동이물에 넣어서 피를 씻어내는데, 이것을 ‘태열(어린애가 태 안에서 받은 열이 태어나서도 있는 병증)을 없애준다.”’고 기록했는데, 따뜻한 물이 아닌 차가운 물로 아이를 씻어내는 이 방식은 북관 사람들의 고유한 생활방식라고 합니다. 홍양호는 사헌부대사헌ㆍ평안도관찰사ㆍ이조판서를 지냈으며, 홍문관ㆍ예문관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