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황하(黃河) 상류의 하진(河津)을 일명 용문이라 하는데, 흐름이 매우 빠른 폭포가 있어 고기들이 오를 수가 없다. 강과 바다의 큰 고기들이 용문 아래로 수없이 모여드나 오르지 못한다. 만일 오르면 용이 된다.(一名龍門, 水險不通, 魚鼈之屬莫能上. 江海大魚, 薄集龍門下數千, 不得上. 上則爲龍.)” 이는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膺傳)〉》에 나오는 ‘용문(龍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말에서 유래하여 ‘용문’은 과거에 급제함을 가리키게 되었고, 현대에도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출세의 문턱을 오르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 화원들은 ‘용문’과 관련하여 잉어가 뛰어오르는 그림 곧 ‘약리도(躍鯉圖)’와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그림 곧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를 그렸고, 그런 그림이 인기를 누렸습니다. 날개 없는 물고기가 그저 무작정 폭포 위로 뛰어오릅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도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약리도> 한 점이 있지요. 물론 잉어가 뛰어오르는 것을 ’회귀본능‘이라고 해버리면 단순한 과학상식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용문(登龍門)‘ 같은 의미를 붙여주고 이야기를 엮으면 예술이 됩니다. 다만 요즘 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속을 썩히는 / 저 향긋한 향 / 어머니, 아버지 가슴 속에 든 곰팡내 나는 / 퍼런 멍처럼 네모난 / 메주 한 / 덩이” 정순철 시인의 시 <메주>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은 24절기 가운데 ‘대설(大雪)’로 이즈음 우리 겨레는 메주 쓰기가 한창입니다. ‘콩으로 메주를 쒀도 곧이듣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은 아무리 당연한 사실을 말해도 믿을 수 없지요. 이 속담이 전해지던 우리 겨레에게 ‘콩으로 메주 쑤는 일’은 우리 삶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 어느 집이건 논두렁에 심어두었던 콩을 갈무리하여 음력 10월부터 11월 무렵 메주를 쑵니다. ‘메주’라는 말을 문헌에서 찾아보면 12세기에 펴낸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장왈밀저(醬曰蜜沮)’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메주입니다. 또 조선 후기의 실학자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발해(渤海)의 명산물로서 책성(柵城)의 시(豉)를 들고 있는데 ‘시’는 한자 자전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배염유숙(配鹽幽菽)’, 곧 콩을 소금과 함께 어두운 곳에서 발효시킨 ‘메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메주 쑬 때 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9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심영신(沈永信, 1882~1975) 지사는 이른바 ‘하와이 사진신부’의 한 사람으로 건너간 분이다.” 이 내용은 이윤옥 시인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 제7권에 나오는 심영신 여성독립운동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심영신 지사는 이렇게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건너가 혼인을 하고 사탕수수밭에서 혹독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재정부족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도왔습니다. 그러한 내용은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그 고마움을 분명히 기록해두어 알 수 있지요. 여기서 말하는 ‘사진신부(寫眞新婦, picture bride)’란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이 사진만 보고 혼인한 조선여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진신부에 대한 설에 따르면 조선 평안도 의주의 백예수라는 사람이 중매해서 사라 최라는 신부를 신랑 이내수에게 보냈는데 사라 최는 109년 전인 1910년 11월 28일 도착하여 4일 뒤 혼인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 하와이로 간 사진신부들은 대략 600명에서 1,000명에 달한다고 하지요. 웨인 패터슨이 쓴 《하와이 한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판소리’는 소리꾼이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엮어 나가는 사설)로 엮어 발림(소리의 극적인 전개를 돕기 위하여 몸짓으로 하는 동작)을 곁들이며 구연하는 고유의 민속악입니다. ‘판소리’는 1964년 12월 24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판소리에는 소리꾼 한 사람이 한바탕 전체를 소리하는 ‘완창판소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래 판소리는 매우 긴 줄거리와 독특한 기교 때문에 짧은 기간에 익힐 수가 없는 고도의 예술장르입니다. 그래서 한 마당을 완창하려면 길게는 여덟 시간이 걸리기에 쉽게 도전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완창판소리’는 판소리 한바탕 모두를 감상하며 그 값어치를 오롯이 느낄 수 있기에 소리꾼으로서는 평생에 꼭 해봐야 하는 무대이며, 판소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청중이라면 꼭 들어봐야 할 공연입니다. 이 완창판소리는 고 박동진 명창이 1968년 9월 30일 서울 남산에 있는 국립국악고등학교 강당에서 다섯 시간 반에 걸쳐 ‘흥보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른 것이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위는 김수영 시인이 죽은 뒤 1돌 되는 날 세워진 시비에 새긴 그의 대표시 <풀>입니다. ‘풀’과 ‘바람’이라는 이름씨(명사)와 ‘눕다’, ‘일어나다’, ‘울다’, ‘웃다’라는 움직씨(동사) 두 쌍만을 써서 이를 교묘하게 반복함으로써 뛰어난 음악성을 얻고 있습니다. ‘풀’은 바람에 눕고 또 우는 나약한 존재지만 바람보다도 먼저 웃고 먼저 일어납니다. 이처럼 풀은 나약하지만, 시련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의 모습은 풀뿌리 민중과 그대로 닮았다고 노래합니다. 평론가 장석주는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3》 책에서 “김수영은 외부의 부조리한 압력인 바람을 견뎌내는 들풀의 약한 듯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단순한 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태조는 고려를 건국하고, 고려의 황궁인 송도 수창궁에서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 말하자면 송도 곧 개성은 조선왕조의 첫 번째 서울인 것이지요. 그러다 태조 2년인 1393년 3월 15일 마침내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이듬해인 1394년인 태조 3년에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천도했습니다. 그 뒤 정종이 임금에 오르자 형제 사이 골육상쟁에 회의를 느껴 1399년 개성으로 서울을 옮깁니다. 그런데 조선의 세 번째 임금 태종이 등극하면서 조선은 다시금 서울을 한양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서울이 되려면 첫째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편리한 곳, 둘째 강과 해상을 통하여 물자를 수송하기가 편리한 곳, 그리고 셋째는 사방으로 거리가 균등하여 교통이 편리한 곳인데 한양은 이 세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요. 하지만 서울을 옮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서울이 되려면 지리적 여건도 중요하지만 명분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양으로 옮겼다가 다시 송도로 옮긴 지 얼마 안 되는데 다시 한양으로 옮기려면 중요한 명분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예배(禮拜)한 뒤에, 조상의 혼백을 모신 묘당(廟堂)에 들어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로 장희빈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그 김만중은 또 다른 고대소설 《구운몽(九雲夢)》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한글본과 한문본이 모두 전하는 《구운몽》은 효성이 지극했던 김만중이 모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하지요. 《구운몽》은 《옥루몽》, 《옥련몽》 등 후대 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구운몽》은 이전에 있었던 다른 소설에 견주어 새로운 형식의 작품으로서 한국 고대소설문학사에 있어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힙니다. 김만중은 아버지 김익겸이 병자호란 때 순국하자 어머니 해평 윤씨가 형 김만기와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와 길렀습니다. 어머니 윤씨의 할아버지 윤신지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인 정혜옹주의 남편이었는데 윤신지는 손녀딸과 이야기를 하면 가슴속이 활짝 열린다면서, 그녀가 사내라면 대제학이 되었을 것이라고 칭찬했다고 하지요. 김만중은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률(唐律)》을 모두 윤씨에게 배웠습니다. 윤씨는 자식들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의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가난하여 책을 사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곡식을 주고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스무째로 첫눈이 내린다고 하는 “소설(小雪)”입니다. 소설 무렵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치므로 “소춘(小春)”이라고도 부르지만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많이 추워집니다. 한편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또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믿습니다. 대개 소설 무렵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이날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며, 뱃사람들은 소설 무렵에는 배를 잘 띄우지 않습니다. 이는 고려시대에 '손돌'이라는 사공이 배를 몰던 중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흔들리자, 사공이 고의로 배를 흔든 것이라 하여 배에 타고 있던 임금이 사공의 목을 베었다는 강화(江華) 지역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소설은 겨울이 시작되는 때로 서둘러 문에 문풍지도 바르고, 외양간에 거적 치고, 땔나무도 해놓습니다. 또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기도 하며 목화를 따서 이불을 손보기도 하지요. 또 겨우내 소먹이로 쓸 볏짚도 모아두면서 미처 해놓지 못한 겨울준비를 마저 합니다. 이때 감이 많이 나는 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96년 11월부터 1997년 4월까지 SBS 드라마 <임꺽정>이 44부작으로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임꺽정>은 난세를 살다 간 의리의 도적이자 풍운아인 임꺽정의 한 많은 생애를 그린 벽초 홍명희(洪命憙)의 소설 《임꺽정》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였습니다. 당시 많은 시청자들은 임꺽정에 자신을 이입시켜 큰 감동을 받았지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에 우리는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드라마의 바탕이 되었던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 91년 전인 1928년 오늘(11월 21일)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소설들은 대부분 역사의 주체를 민중이 아닌 위대한 개인으로 보는 영웅사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와 달리 《임꺽정》은 주인공은 물론 다양한 신분의 백성들을 등장시켜, 당시의 민중들의 삶을 폭넓게 묘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임꺽정만을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고, 청석골 여러 두령들도 임꺽정 못지않게 큰 비중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나갑니다. 아울러 임꺽정은 휘하의 두령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능력도 있지만 인간적인 약점을 함께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어 남다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는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사적 제32호 <독립문(獨立門)>이 있습니다. 1896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습니다. 바로 122년 전 오늘이지요. 45×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높이 14.28m, 넓이 11.48m로 프랑스 개선문을 모방하여 만든 건축물입니다.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습니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지요. 모양만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지 쌓는 방법은 우리나라 전통기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무지개문 좌우의 받침기둥, 모서리의 귓돌, 꼭대기의 난간만이 서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하지요. 1979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7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