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겨울 속에서 봄을 보려면 신도 경건하게 무릎 꿇어야 하리라 내 사는 은현리서 제일 먼저 피는 꽃 대한과 입춘 사이 봄까치꽃 피어 가난한 시인은 무릎 꿇고 꽃을 영접한다 오늘은 24절기가 시작되고 봄을 맞이하는 입춘(立春)입니다. 입춘 무렵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으로는 봄이 온 것을 기리어 축원하는 입춘축(立春祝)을 집 대문이나 대들보ㆍ천장 따위에 붙이는 것입니다. 입춘축을 다른 말로는 춘축(春祝), 입춘첩(立春帖), 입춘방(立春榜), 춘련(春聯), 문대(門對), 춘첩자(春帖子), 춘방(春榜), 대련(對聯), 춘첩(春帖)이라고도 하지요. 입춘축 가운데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으로 “입춘이 되니 크게 길 할 것이요, 만 가지 일들이 형통하라.”라는 뜻이 담겨 있지요. 그밖에 쓰는 말로는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로 ”산처럼 오래 살고 바다처럼 부자가 되어라.“,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곧 “마당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온다.”라는 것도 있는데 온갖 좋은 말은 다 가져다 붙여놓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 천문ㆍ지리ㆍ날씨를 맡아 보던 관청인 관상감(觀象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24절기를 시작하는 입춘(立春)으로 동양철학인 명리학으로는 새해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동지가 되면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에 홍매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9송이씩 9줄 모두 81송이를 다 그리고 나면 입춘이 오고 봄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아홉 번째 아홉 날이 지나면 농사짓는 소가 밭을 갈기 시작한다네.”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세상이 꽁꽁 얼었어도 홍매화를 그리며, 희망을 품고 살다 보면 드디어 훈훈한 봄바람이 세상을 감싸는 봄이 오는 것이지요. “입춘날 절기 좋은 철에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공덕(救難功德) 하였는가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活人功德) 하였는가” 상여 나갈 때 상여머리에서 부르던 상엿소리입니다. 우리 겨레는 봄이 시작되는 입춘날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을 했는지에 대해 죽은 뒤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꼭 해야 한 해 동안 액(厄)을 면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밤중에 몰래 냇물에 징검다리를 놓거나, 거친 길을 곱게 다듬거나, 다리 밑 거지 움막 앞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85년 전 오늘(1월 3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 선생이 심한 독감으로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선생은 젊었을 때 아버지의 주선으로 함남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통인(通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통인 시절 군수가 자신의 생일에 어린 기생에게 온갖 추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동헌으로 뛰어들어 화로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었지요. 사건 직후 선생은 서울로 도피하여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육군참위에 임관되었는데, 선생의 청렴강직과 충성심을 높이 산 광무황제에 의해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임명된 뒤 지방진위대의 부패장교와 지방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후 선생은 지도자로서 여러 구국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구속되거나 유배되기도 했는데 유배에서 해제된 직후 북간도로 탈출합니다. 이후 북간도에서 치열한 독립운동을 하던 선생은 1919년 11월 3일 개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에서 모으던 애국금 등 미주지역의 모든 독립운동자금을 독점하였는데 그 때문에 미주동포로부터 자금이 끊어지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고인께서는 고지도 원본 위의 한자를 일필(一筆)로 똑같이 써 내려가기 위해 글씨 연습에 날마다 아침 2시간씩 3년을 투자하셨습니다. 고인께서 영인본으로 접한 고지도의 양은 1,000점을 넘었지만, 지병이 악화되어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생을 마감한 2007년 7월 31일까지 필사한 고지도는 100점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생의 마지막까지 고지도 필사를 하던 최현길(1952~2007) 선생의 배우자인 전소연 여사의 말입니다. 전소연 여사는 2018년 4월 남편인 고 최현길 선생이 필사한 고지도 35종 65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맡긴 바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전도인 『동여도』는 그 길이가 남북 7m에 이르는 초대형 (23첩) 작품입니다. 최현길 선생은 40대 중반까지 광고계에 몸을 담고 있다가 지병으로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2000년대 초 규장각에서 영인해서 펴낸 고지도의 아름다움에 큰 감명을 받고 본격적인 필사에 전념했습니다. 특히, 선생은 ‘전라도흥양현발포진지도’와 같이 국토를 아름답게 그려낸 회화의 관점에서 고지도를 골라 필사 작업에 매달렸지요. 최현길 선생이 기증한 고지도 필사본은 ‘아름다운 필사, 최현길 고지도 기탁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복궁 중건 비용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갔을까? 원납전! 원해서 내는 돈인가, 원망하며 내는 돈인가? 궁궐을 세우기 위해서 철거를 한다고? 영건의 아이러니! 과연 서민들이 자식처럼 달려와 궁궐을 지었을까? 경복궁 중건 현장은 좋은 일자리였을까? 국가의 막중한 공사를 방해한 부정행위들 등 모두 15개의 주제로 이뤄진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이 서울역사편찬원에서 나왔습니다. 이 책은 고종대 경복궁 중건의 역사상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엮은 책으로 일본 와세다대학에 소장된 《경복궁영건일기》를 통해 새로 발견된 내용과 흥미로운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서울역사편찬원은 《경복궁영건일기》와 관련해 국내에서 축적된 성과를 어떻게 하면 시민들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이강근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를 비롯한 국내의 건축, 역사, 미술사, 국문학 전문가 등 다양한 집필진들이 15개의 주제로 고종대 경복궁 중건의 역사상을 안내하는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을 펴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경복궁 중건 공사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행위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기조차 합니다. <국가의 막중한 공사를 방해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옷감, 종이, 머리털 따위를 자를 때 쓰는 가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역사가 깊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아트로포스(Atropos)가 가위를 들고 정해진 실을 자르는 이야기가 나오며, 중국의 경우에는 후한(後漢)에서 송대(宋代)에 이르는 시기의 무덤 부장품에서 가위가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장차(長沙) 계화원(桂花園)의 여성 무덤에서 출토된 가위에는 ‘동진(東晉) 승평(升平) 5년(361)’이라는 기록과 함께 바늘과 가위 등 바느질 도구가 나오기도 했지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가위는 신라시대 643년 (선덕여왕 3년) 창건된 분황사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에서 나온 협가위입니다. 모양은 ∝형으로 손잡이는 없고 날을 엇갈리게 하려고 밑부분을 가늘게 둥글린 것이 특징입니다. 고려시대로 가면 철제와 동제(銅製)로 만든 가위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신라의 것과 같은 ∝형과 오늘날의 X형 모습 등 다양한 가위가 나타납니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것과 비슷한 X형 모양으로 재료는 무쇠가 대부분이고 철과 백동(白銅)을 쓴 것도 있습니다. 전북 진안에는 한국 가위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진안가위박물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즘 뉴스를 보면 “구정 앞두고 사랑 나눔 봉사활동 실시”, “구정 연휴 아시아 여행자의 선택은?”, “태국 두번째 ‘우한 폐렴’ 환자, 구정 앞 확산 우려”처럼 ‘설날’이 아닌 ‘구정’이란 말을 쓰는 여전히 쓰고 있습니다. 이 ‘구정’이란 말은 양력 신정에 대해 음력으로 쇠는 ‘설날’을 말하는 것이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향토오락》이란 책을 펴낸 이후 우리말ㆍ우리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창씨개명으로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았으며, 풍물굿 등 민속놀이도 맘대로 즐기지 못하게 함으로써 겨레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양력설 곧 ‘신정’을 설날로 쇠는 일제는 우리 겨레가 오래전부터 쇠던 설을 ‘구정(舊正)’이란 말을 써서 지내지 못하게 하였지요. 그런데, 광복 뒤에도 정부가 양력을 기준력으로 삼으면서 양력설은 제도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1989년까지만 해도 양력 1월 1일부터 3일 동안을 공휴일로 했기에 성탄절과 함께 연말연시를 잔치처럼 지내는 게 굳어질 정도였지요. 그리고 우리 고유의 음력설은 ‘민속의 날’이라 하여 ‘이중과세’라는 허울 좋은 말로 하루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경자년(庚子年) 새해를 맞는 설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저기서 슬기전화(스마트폰) 연하장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연하장의 대부분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행복한 한 해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소망하는 일들이 모두 이뤄지기를 비손합니다.’ 등 거의 특성이 없는 엇비슷한 문구들뿐입니다. 그럼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새해 인사를 나눴을까요? “고모님께서 새해는 숙병(宿病)이 다 쾌차(快差)하셨다 하니 기뻐하옵나이다.” 이 글은 숙종임금이 고모인 숙희공주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숙종은 고모의 오랜 병이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숙병이 쾌차했다 하니 기쁩니다.”라며 아직 병중이건만 이미 병이 다 나은 것처럼 표현했지요. 그런가 하면 정조 때 사람 한경(漢經)은 하진백(河鎭伯) 집안사람들에게 문안 편지를 보냈는데 하진백이 과거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을에 있을 과거에서 급제했다며 미리 축하의 덕담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밖에 명성왕후(明聖王后, 현종 비)가 셋째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보낸 편지, 인선왕후(어머니)가 숙휘공주(딸)에게 보낸 편지, 순원왕후(재종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설날 아침이면 일찍이 남녀노소가 설빔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지낸 뒤에 할아버지ㆍ할머니, 아버지ㆍ어머니 등 집안 어른에게 세배한 다음 일가친척과 이웃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렸습니다. 요즘엔 직장인들이 회사 윗사람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조선시대엔 새해 초 대문 안에 세함(歲銜)을 두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각사의 서리배와 각영의 장교와 군졸들은 종이에 이름을 적어 높은 관원과 선생의 집에 들인다. 문 안에는 옻칠한 소반을 놓고 이를 받아두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하며, 지방의 아문에서도 이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김매순(金邁淳)이 한양(漢陽)의 세시풍속에 대해 쓴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따르면, 설날부터 정월 초사흗날까지는 승정원과 모든 관청이 쉬며, 시전(市廛) 곧 시장도 문을 닫고 감옥도 비웠다고 합니다. 이때는 서울 도성 안의 모든 남녀들이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했다고 하며, 이 사흘 동안은 정승, 판서와 같은 높은 관원들 집에서는 세함만 받아들이되 이를 문 안으로 들이지 않고 사흘 동안 그대로 모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