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광화문에 가면 전에 지난 2016년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 바둑대국을 했던 포시즌호텔이 있습니다. 그 호텔 앞을 지나가다 보면 길을 바라보고 지도 하나가 있습니다. 이 지도는 수선전도라는 것인데 지금 전해지는 수선전도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제296호 <수선전도(首善全圖)>도 있습니다. 목판 인쇄본으로 크기는 세로 25.4㎝, 가로 22.2㎝이며, 부분 채색한 한 장의 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조선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1825년 무렵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지도입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수선(首善)’일까요? 수선(首善)은 임금이 사는 서울을 가리키는 일반 이름씨(명사) 가운데 하나여서,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수선전도(首善全圖)’, 또는 ‘수선총도(首善總圖)’는 서울의 지도라는 뜻이 됩니다. 이 지도는 남쪽으로는 한강, 북쪽으로는 도봉산, 서쪽으로는 마포ㆍ성산동, 동쪽으로는 안암동ㆍ답십리동까지 그려져 있습니다. 실제 측량으로 만들어서 선이 곱고 산세가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으며, 다른 지도들보다 필법이 매우 섬세한 것이 특징이라는 평가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2년 12월 5일,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등재 발표 직후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인 이춘희 명창이 맑고 기품 있는 소리로 <본조 아리랑>을 부르던 광경은 지금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에 선합니다. 그저 민요로만 알고 있던 아리랑이 얼마나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문화적 자긍심과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위 내용은 지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이 열렸는데 그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의 윤영달 조직위원장이 한 말입니다. 이 잔치는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오른 것을 기려 2013년부터 서울특별시와 (사)서울아리랑페스티벌조직위원회 공동주최로 해마다 10월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여는 도심 속 복합문화예술잔치입니다. 해마다 음악ㆍ무용ㆍ시각예술 등으로 아리랑의 예술적 영역을 확장하며 시대정신에 맞는 문화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서울의 대표 잔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특히 올해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은 조선시대 궁중문화와 서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면 넓은 공간 복도 끝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이 우리의 눈을 완전히 사로잡습니다. 이 ‘개성 경천사터십층석탑’은 높이 13.5m로 고려말에 쌓은 석탑인데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탑은 전체적으로 독특한 형태에 균형과 안정미를 갖추었고, 세부 조각들도 매우 섬세하여 나무랄 데 없는 명작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는 사람들은 이 탑앞에서 기념사진을 꼭 찍고 옵니다. 그런데 이 탑에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한제국 때인 1907년 3월 당시 일본 궁내대신인 다나카 마스아키가 결사적으로 막는 조선 백성과 군수를 고종황제가 허락했다는 거짓말과 총칼로 제압하고 이 10층석탑을 강탈해간 것입니다. 다나카는 이 석탑을 해체하여 포장하고 10여 대의 달구지에 싣고 개성역에서 기차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기어코 도쿄 자신의 집 정원으로 옮겨 차마 포장도 풀지 않는 채 놔두었습니다. 이에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어네스트 베셀이 자신의 신문에 연일 이를 꾸짖는 기사를 냈으며, 미국 선교사 호머 헐머트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제언론에 이를 고발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이는 대만을 방문한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며 육군대장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王)를 처단한 조명하 의사가 순국 직전인 1928년 오늘(10월 10일) 남긴 말입니다. 조명하 의사는 일하던 오사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가던 중 대만을 거쳐 가게 됩니다. 이때 조 의사는 대만 주둔 일본군을 특별검열하기 위해 검열사 구니노미야 구니히코가 온다는 정보를 듣습니다. 1927년 5월 14일 마침내 구니노미야를 처단하기 위해 단도에 극약을 바른 다음 구니노미야를 태운 지붕 없는 차가 지나가자 의사는 단도를 빼내 들고 날쌔게 자동차 뒤쪽에 뛰어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단도를 구니노미야 목에 힘껏 던집니다. 구니노미야는 이때 단도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단도에 발라진 독이 온몸에 퍼져 1929년 1월 27일 죽었습니다. 구니노미야 처단은 중국 침략을 앞두고 있던 일본에 대한 단호한 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계 언어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글을 으뜸글자라고 말합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미국의 언어학자 제임스 매콜리 교수는 한글날만 되면 언어학자로서 최고의 글자를 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친구 친지, 제자들을 불러 잔치를 하곤 했다지요. 그러면 왜 한글이 이렇게 으뜸글자로 대접받는 것일까요? 먼저 한글의 특징 가운데 중요한 것은 과학적이며 철학이 담긴 글자라는 것입니다. 한글 닿소리(자음)는 소리를 낼 때 발음기관의 생긴 모양을 본떴기 때문에 과학적이라 하는 것이며, 홀소리(모음)는 하늘(ㆍ)과 땅(ㅡ)과 사람(ㅣ)이 담겨 있기에 철학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한글은 배우기 쉬운 글자입니다. 한글은 가장 발달한 낱소리(음소) 글자면서 음절글자의 특징도 아울러 가지고 있지요. 한글은 글자 하나하나가 낱소리(하나의 소리)를 표기하는데, 홀소리와 닿소리 음을 합치면 글자가 되고, 여기에 받침을 더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글자가 질서정연하고 체계적인 파생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게다가 한글은 필기체, 인쇄체의 구분이 없고, 대ㆍ소문자의 나눔이 없어서 아주 배우기가 쉽지요. 훈민정음 해례본에 있는 정인지의 꼬리글에는 "슬기로운 사람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장례식장에 가보면 분향실 입구에 많은 조화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조화의 리본에는 거의가 “삼가 故人의 冥福을 빕니다.”라는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더러는 “謹弔”라고 쓴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자로 써야 품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아직도 상가집 조화 리본은 ‘한글’이 아닌 어려운 한자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삼가 슬픔을 함께 합니다”라든지 “극락왕생하옵소서” 같은 한글 리본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특히 “슬픔을 함께 합니다” 같은 글귀는 한글날을 코앞에 두어서 인지 신선하기 조차합니다. 내일이면 제573돌 한글날이지요. 절대 군주였던 세종은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자신이야 한문에 능통했기에 새로운 글자를 만들 필요가 없던 분이었지요. 하지만 백성이 글자를 몰라 삶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보고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새로운 글자를 만들기로 다짐합니다. 심각한 안질에 걸려 고생하고 온몸이 종합병동일 만큼 일생을 병고 속에 살면서도 오로지 훈민정음 만드는 일에 매달린 끝에 현대 언어학자들이 세상 으뜸 글자로 인정하는 훈민정음을 만들고 만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7월에 개봉된 영화 “나랏말싸미”는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아닌 중 신미(信眉)가 창제했다고 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미가 아니라 세종 때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난계(蘭溪) 박연(朴堧)이 창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들의 말이 얼마나 믿을만한 얘기일까요? 신미대사 창제설을 보면 1443년보다 8년 앞선 1435년 한글과 한자로 된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를 신미대사가 펴냈다는 것을 근거로 주장합니다. 그러나 학자들에 따르면 이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가짜 책임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현대에 만든 위작이라는 것이지요. 또 박연의 책 《난계유고(蘭溪遺稿)》에 나오는 몇 가지 말을 들어 박연 창제설을 주장하는데 이 말들은 어문용어가 아니라 음악용어임을 모르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정인지 서문에는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처음으로 만드셨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 기록에는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아침 출강 가는 길에 본 엄청 큰 #해우소 !! / 그런데 자세히 보니 / 그 해憂소 아니고 / 이 해雨소~~ ㅋ / 공릉빗물펌프장 !! / 관공서 이름에도 위트가 묻어나는 나라 / 우리는 칸국의 대표 大칸民國 입니다.” 한 카카오스토리에 올라온 글입니다. 서울시 노원구가 지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공릉동빗물펌프장”에 붙인 “解雨所”란 글씨를 보고 올린 내용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올린 저 글에 아연실색 했습니다. 절간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 하는데 이를 빗대서 빗물을 해결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인가 봅니다. 그냥 “공릉동빗물펌프장”이라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이상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한자를 좋아하는 공무원들이 있나 봅니다. 우리나라 법 가운데는 <국어기본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법 제14조 제1호에 보면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공문서뿐만이 아니라 공공기관이 쓰는 모든 말에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공공기관인 노원구청은 이 법에 따라 쓸데없이 한자로 말을 만들고 한자를 쓰면 안 되는 것이지요. 제573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얼마 전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재미나다기 보다 좀 딱한 선간판(입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갓길에서 공사 중인지 곳곳에 세워둔 선간판에는 "길어깨 없음", “노견 없음”이라고 적혀있었지요. 길을 사람처럼 생각하여 ‘길’에 ‘어깨’를 붙이고, 길 로(路)에 어깨 견(肩)을 붙여놓았나 봅니다. 그런데 좀 더 가다보니 이번에 “갓길 없음”이라고 써놓았습니다. 도대체 같은 도로공사가 붙인 이름이 이렇게 다른 것은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런 두 가지 말 가운데 어떤 것이 맞는 말일까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갓길’을 찾아보면 “고속도로나 자동차 전용 도로 따위에서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폭 밖의 가장자리 길. 위급한 차량이 지나가거나 고장 난 차량을 임시로 세워 놓기 위한 길이다.”라고 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노견(路肩)”을 찾아보니 “갓길의 비표준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길어깨’는 올림말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길에도 사람처럼 어깨가 있나요? 도대체 이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 말은 원래 영어 “road shoulder”를 가져다가 일본 사람들이 ‘길어깨’를 뜻하는 ‘路肩(노견, ろかた)’으로 바꿔 쓴 것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앞 줄임) 광복 두 시간 전 총독부 학무국 / 동인이 찾아간 사무실 안 침묵이 흐른다 / 아 아베 씨 좀 보소 / 그걸 만듭시다 / 시국에 공헌할 작가단을 꾸리자구요 / 아베, 머리 절레절레 흔든 뜻은 / 이런 쓰레기 같은 조선놈 /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아부하기에 바쁜 조선놈 / 어서 꺼졌으면 싶었겠지 / 그리고 두 시간 뒤 조선은 빛을 찾았다.” (뒤 줄임) 이 글은 소설가 김동인이 광복 두 시간 전 조선통독부에 찾아가서 한 행동을 표현한 것으로 이윤옥 시인이 쓴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김동인은 이광수류의 계몽적 교훈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을 받는 소설가로 대표작 <광염 소나타>, <감자>, <배따라기>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는 히로히토 일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의 항복을 방송했습니다. 온 나라는 광복의 감격에 소리쳐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이 기쁜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일제의 영향으로 많은 조선 사람들이 입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