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는 가끔 궁궐이나 절과 같은 전통건축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올라있는 상징물을 봅니다. 이를 마루 끝을 장식하는 기와라는 뜻으로 망새라고 부르며, 망와ㆍ바래기와ㆍ치미(鴟尾)ㆍ취두(鷲頭)라고도 합니다. “치미”라는 말은 용을 잡아 먹고산다는 전설의 새 꼬리 모습이라고도 하며, 올빼미 꼬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지요. 또 치미는 물에서 사는 어룡(魚龍)으로 지붕에 올려놓으면 불을 예방한다고도 하고, 용의 9마리 자식 가운데 멀리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둘째 아들 이문(螭吻)으로 이를 지붕에 얹어 놓으면 불을 막는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밖에 이 망새는 건물의 권위를 나타내기도 하며, 상서로움을 나타내거나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도 하지요. 이렇게 그 유래가 다양한 망새는 청동ㆍ기와ㆍ돌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는데,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것은 높이 182㎝, 너비가 105㎝인 동양 최대의 대형 치미로 알려졌습니다. 불을 막으려 했다는 이 망새는 경복궁 근정전에 올려진 잡상, 경복궁 앞의 해태, 창덕궁 인정전 앞의 드므와 그 만든 목적이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불타서 복원하고 있는 숭례문 편액이나 문 앞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산 남쪽 기슭에는 높은 축대가 있어, 시간을 맡은 인형 하나가 붉은 비단옷 차림으로 산을 등지고 섰으며, 인형 무사 셋은 모두 갑옷 차림인데 하나는 종과 방망이를 잡고서 서쪽을 향해서 동쪽에 섰고, 하나는 북과 부채를 잡고 동쪽을 향해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가까운 곳에 섰고, 하나는 징과 채쭉을 잡고 동쪽을 향해서 서쪽에서 약간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서 있어서, 매양 시간이 되면 시간을 맡은 인형이 종 치는 인형을 돌아보고, 종 치는 인형도 인형을 돌아보면서 종을 치게 되며, 매경(每更)마다 북과 부채를 잡은 인형이 북을 치고, 매점마다 징과 채를 잡은 인형은 징을 치는데, 서로 돌아보는 것은 종 치는 인형과 같으며, 경ㆍ점마다 북 치고 징 치는 수효는 모두 보통 시행하는 법과 같다.” 이는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 1월 7일 치 기록으로 이날 완성한 흠경각(欽敬閣) 옥루(玉漏)에 대한 설명입니다. 흠경각은 조선시대에 자동 물시계를 설치해서 운영한 경복궁 내부의 전각인데 《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흠경각은 장영실(蔣英實)이 세운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라도 되어 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셋째 소한(小寒)입니다. 소한 무렵은 정초한파(正初寒波)라 불리는 강추위가 몰려오는 때지요. 이름으로만 봐서는 작은 추위라는 뜻이지만 실제 보름 뒤에 오는 대한보다 더 추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도 한다.”,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 같은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농가에서는 소한부터 날이 풀리는 입춘 전까지 약 한 달 동안 혹한(酷寒)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둡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방에서는 문밖 나들이가 어려우므로 땔감과 먹을거리를 집안에 충분히 비치해 두어야 했지요. 이때는 음의 기운이 왕성한 계절로 여름철 뜨거운 땡볕에 양기로 영근 쌀을 먹어, 모자란 양기를 보충합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 겨레는 쌀을 단단하게 굳혀 가래떡으로 만들고 이 가래떡으로 떡국을 해 먹습니다. 바로 양기를 더욱 응축시켜 먹는 슬기로움이지요. 또 겨울철은 단백질을 섭취하기 어려운 계절입니다. 따라서 이때는 콩을 이용해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는데 콩이 땀을 내주는 성질이 있어 찬 바람을 쐬고 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 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촉도(蜀道, 중국 사천성 촉 지방으로 통하는 험난한 길)보다 험하고 태나라보다 더욱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이는 독립운동가 김지섭 의사가 쓴 시입니다. 96년 전인 1924년 1월 5일은 김지섭 의사(1884.7.21. ~ 1928.2.20.)가 일본 도쿄 한복판 일왕이 사는 황거 앞 이중교(二重橋-니쥬바시, 일명 안경다리)에서 황거를 향해 수류탄 3개를 던진 날이지요. 당시 수류탄의 불발로 거사는 실패했지만 황거를 폭파하려는 조선 청년의 의거에 일제는 깜짝 놀랐고 바로 코앞의 경시청 경찰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김 의사는 현장에서 붙잡혀 재판을 받았는데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요. 그러나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할 것이다. 사형이 아니면 나를 무죄로 석방하라.”라며 변호사의 상고를 말릴 정도로 당당했습니다. 그 뒤 복역 중 김지섭 의사는 1928년 2월 20일 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488년 정월 대보름에 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소리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무사에게 뒤쫓게 하였다. 무사가 까마귀를 쫓아 남쪽 피촌(避村)에 이르자 까마귀는 사라지고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와 봉투를 올렸다. 그 겉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요, 한 사람은 임금을 뜻한다고 하며 임금에게 봉투를 열어볼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거문고갑[琴匣]을 쏘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왕이 활로 거문고갑을 쏘니 그 안에서 궁주(宮主)와 승려가 정을 통하다 나왔다.” 이는 《삼국유사》의 ‘사금갑(射琴匣)’ 설화로 이처럼 옛사람들은 쥐가 예지력을 가진 동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2020년 올해는 경자년(庚子年), 쥐의 해입니다. 쥐는 십이지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동물로 방위의 신이자 시간의 신이지요. 쥐는 예로부터 풍요ㆍ다산ㆍ근면ㆍ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래서 쥐띠해에 태어난 사람은 재물복과 영특함, 부지런함을 타고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의인화해 관직을 붙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이 바로 섣달 그믐날 저녁이니, 자연히 감개가 무량합니다. 저는 바야흐로 추위를 참느라 신음을 토하면서 혼자 앉아 매우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는데, 홀연히 인편을 통해 형이 보낸 편지를 받게 되니, 두 눈이 갑자기 확 뜨이면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가운데 줄임) 보내 주신 시고(詩稿)를 읽으면서 품평을 하려면 인편이 돌아가는 것이 다소 지체될 듯하기에, 우선 이를 보류해 두었습니다. 저의 기량을 다하여 악필(惡筆)로 끼적거린 뒤에, 송구영신하는 정초(正初)가 되었을 때, 신년에 만나 악수하는 기쁨과 맞먹는 즐거움을 드리고자 하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매천집(梅泉集)》 에 나오는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의 글입니다. 매천이 말한 섣달그믐은 음력이었을 테지만 양력 섣달그믐날인 오늘에도 매천의 이 글이 더욱 뜻깊게 생각됩니다. 《매천집》은 《매천야록(梅泉野錄)》과 함께 황현이 남긴 글로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라면 《매천집》은 시문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천의 그 유명한 절명시(絶命詩) 4수도 여기에 실려있지요.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유배형(流配刑)의 하나로 보통 왕족이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에게만 적용하였다. 집 둘레에 가시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것인데, 죄가 무거운 자에게 적용하였다. 탱자나무는 전라도에 많으므로 위리안치를 선고받은 사람은 주로 전라도 연해의 섬으로 보냈다.” 이는 《중종실록》 중종 10년(1515) 6월 1일치에 나오는 탱자나무 관련 기사입니다. 탱자나무는 5월에 하얀 꽃이 피고, 9~10월에 노랗게 열매가 열리는데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예부터 성벽주위나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었던 나무입니다. 탱자나무 울타리 안팎으로는 쥐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할 정도로 가시가 날카로워 도둑 또한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던 나무지요. 탱자나무는 울타리뿐 아니라 껍질과 열매를 약재로 쓰는 등 예부터 우리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무입니다. 탱자나무 가운데 오래된 나무가 있는데 바로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가 그 나무입니다. 문화재청에서는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는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경상북도기념물 제135호)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58호로 승격했습니다.(2019.12.2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본인 교사가 조선사를 가르치던 중에 단군은 자기네 대화족(大和族)의 시조로 추앙되는 스사노 오노미코토(素盞鳴尊, 소잔명존)의 아우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두 인물의 생존연대만 보더라도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니 최수봉이 학기말의 구두시험 때 ‘소잔명존이는 우리 단군의 중현손(重玄孫, 9대손에 해당)이오.”라고 서슴없이 답했고, 그로 인해 퇴학당했다.” 이는 최수봉 지사와 함께 밀양공보를 같이 다녔던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 선생이 뒷날 《약산(若山)과 의열단(義烈團)》 책에서 증언한 말입니다. 지사는 99년 전인 1920년 오늘(12월 27일) 아침 경남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날은 월요일이어서 경찰서장 와다나베가 훈시하고 있었는데 두 번의 투탄에도 폭탄의 불발과 폭발의 위력이 약하여 타박상을 입은 순사부장 외에는 다치거나 죽은 자도 없었습니다. 이후 지사는 실패한 것을 알고 식도로 자기 목을 찔러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죽지 못한 채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해인 1921년 7월 8일 사형당해 순국했습니다. 하지만 최수봉 지사의 의거는 박재혁 의거가 세상을 놀라게 한 지 석 달 만에 식민통치의 맨 앞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표준국어대사전》은 ‘겨레’를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민족”이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국어사전이 ‘겨레’를 한자말 ‘민족’으로 바꾸어놓으니까 사람들이 우리말 ‘겨레’는 버리고 남의 말 ‘민족’만 쓰면서, 남녘 한국에서는 ‘한민족’이라 하고 북녘 조선에서는 ‘조선민족’이라 합니다. 같은 겨레이면서 저마다 다른 반쪽을 도려내 버리고 남은 반쪽인 저만을 끌어안는 이름을 만들어 부르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남이나 북이나 틈만 있으면 “통일, 통일” 하는 소리를 반세기 넘도록 줄기차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배달겨레’라는 말이 요즘은 거의 꼬리를 감춘 듯하지만, 일제 침략 시절까지만 해도 자주 쓰던 낱말이다. 그러나 광복 뒤로 남북이 갈라진 다음, 친일 세력이 남쪽 한국을 다스리면서 제 나라만 챙기고[국수주의] 제 겨레만 내세우는 [민족주의] 낱말이라고 몰아붙여서 너도나도 쓰기를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온 세상 모든 사람과 더불어 어우러져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 왔으니 이런 낱말 곧 ‘겨레’도 새삼 쓸모가 생겨난 듯하다. 온 세상 사람들과 손잡고 더불어 살아가자면 먼저 갈라진 제 겨레부터 하나로 싸안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