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그레이브 할아버지가 바둑을 배운 뒤에 체스를 그만둔 까닭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바둑판은 가로세로 19줄이니까 모두 361개의 교차점이 만들어진다. 체스는 가로세로 8줄, 그러니까 모두 64개의 교차점이 만들어진다. 당연히 바둑이 체스보다 훨씬 변화가 많고 재미있다. 바둑 모임 회장인 브라운 씨는 논리학 교수답게 바둑과 체스를 비교하는 흥미로운 글을 시러큐스 대학 학생회에서 발행하는 일간 신문(The Daily Orange)에 기고한 적이 있다. K 교수는 그 글을 우연히 읽어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첫째, 바둑은 시간이 갈수록 판이 채워지는데 체스는 시간이 갈수록 판이 비워진다. 알다시피 체스는 상대방 말을 하나씩 잡으면 판에서 내려놓는다. 물론 바둑에서도 무리진 돌들을 포위하여 잡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시간이 갈수록 바둑판에는 돌이 많아지고 공간이 적어진다. 둘째로, 바둑에서 죽은 돌은 게임이 끝나면서 상대방 집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곧 죽은 돌 하나가 한 집과 맞먹는 역할을 한다. 체스에서 죽은 돌은 임무가 끝난다. 그러나 간혹 졸(pawn)이 상대방 진지 끝줄까지 전진하면 죽은 말 하나를 다시 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며칠 뒤 K 교수는 공과대학의 ㅍ 교수와 ㅎ 교수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미녀식당으로 갔다. 키가 훤칠하고 예쁜 종업원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자리를 잡은 뒤, 컵에 물을 따르는 종업원에게 사장님 계시느냐고 물으니 출타중이란다. “아가씨는 여기 종업원이냐?”라고 물으니 인접한 대학의 아르바이트 학생이라고 대답한다. 항공관광과 2학년 학생이라고 한다. 항공관광과란 스튜어디스를 배출하는 학과다. 스튜어디스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인기가 있는 직종이다. 요즘 새로운 추세는 전통적으로 인기가 있던 이공계열보다는 연극영화과, 신문방송과 등 연예계와 언론계에 사람이 몰린다. 탤런트나 영화배우를 모집하면 수천 명이 모여들어 경쟁률이 장난이 아니다. 과거에는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등이 인기가 있었지만 이제 세상이 변하였다. 청소년들의 우상인 연예인 되기가 판검사 되기보다 훨씬 더 어렵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미녀를 보러 왔는데 미녀가 없으니 식사하면서 하는 대화가 약간은 김빠진 맥주 같다. 대화의 주제는 남자들의 단골 메뉴인 여자 이야기가 아니고 어쩌다 보니 바둑이야기가 나왔다. ㅍ 교수가 “러시아의 체스 최강자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할머니는 젊어서 백석과 이별한 이후 해마다 백석의 생일날인 7월 1일에는 세 끼를 굶고서 백석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겼다고 한다. 그녀는 1997년에는 2억 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살던 자야오당(子夜晤堂)에는 멋진 편액 한 편이 걸려 있다. “유주학선 무주학불 有酒學仙 無酒學佛 (술이 있을 때는 신선도를 따르고, 술이 없을 때는 부처를 배운다)” 그녀가 찾아갈 부처는 백석일 지도 모른다. 그녀는 노년까지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것이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이루어진 남북 화해 이후 백석에 관해서 많은 것이 밝혀졌다. 그녀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백석은 자야와 헤어져 만주로 가서 사업을 했다. 해방이 되면서 백석은 만주에서 귀국하여 고향인 평북 정주에서 살았는데, 초기에는 문학 활동을 활발히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석은 1962년에 김일성 찬양시 '나루터'를 발표한 이후 창작활동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백석은 1996년에 죽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남북 화해가 조금 일찍 시작되었더라면 두 사람은 이산가족으로서 재회할 수도 있었으련만, 너무 늦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길상사는 요정을 운영해서 큰돈을 번 할머니(본명 김영한)가 1996년에 법정 스님에게 요정을 기부해서 개조한 절이다. 그녀는 80세 때에 7,000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이 있는 한옥 요정 대원각(부동산 시가 1천억 원 상당)을 법정 스님에게 수행 도량으로 써달라며 기증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집안이 몰락하자 생계를 위하여 부실한 신랑에게 15살에 시집을 갔다. 그런데 그만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나고 그녀는 이듬해 진향(眞香)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할머니는 조선 권번(일종의 기생조합)에서 전통적인 기생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였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때에 서울의 이름난 한량들이 만나려고 애태우던 유명한 기생이었다. 글재주가 있는 그녀는 문학잡지에 수필을 발표하여 ‘문학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녀는 문단에 등단한 뒤 일본 유학까지 가게 된다. 그런데 그의 문학 스승이었던 분이 독립운동과 연루되어 함흥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녀는 스승을 면회하러 함흥에 갔다. 그녀는 스승의 옥바라지를 위해 함흥에 주저앉고 생계를 위해 기방에 나갔다. 19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제가 연애 이야기를 했으니까, 이제는 댁에서도 연애 이야기를 해야지요. 아마도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뭐라고요? 은경 씨는 연애 경험이 없다고요? 결혼하기 전까지 연애 한 번 못 해보았다고요? 믿기지 않네요. 그걸 믿는 남자가 있을까요? 정말이라고요? 예쁜 꽃에는 벌과 나비들이 많이 모이지 않나요? 글쎄요... 왜 연애를 못 했는지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요? 뭐라고요? 요즘에 여드름이 난다고요? 그것참 이상하네요. 사춘기에도 나지 않던 여드름이 요즘 난다니 희한하네요. 사춘기가 왔으면 좋겠다고요? 은경 씨와 나는 4살 차이니까 우리는 같은 40대입니다. 우리 나이에는 사춘기라고 하지 않고 사추기(思秋期)라고 한답니다. 리조트 건물 10층에 사신다고 했죠? 거기에는 돈은 많고 힘은 없는 노인들만 왔다 갔다 하지 않나요? 그럴 거예요. 텅 빈 방이 많다고요? 분양은 실패했다는 소문이 돌던 데요. 저도 K리조트에서 자 본 적이 있어요. 매년 겨울 방학에 교수연찬회를 1박 2일로 거기서 하거든요. K리조트 10층에 살면 내려다보는 경치가 좋을 거예요. 남쪽으로 야트막한 야산과 넓은 논을 내려다보는 경치가 목가적이라고요? 그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연애 이야기란 남녀노소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의 영원한 흥미 거리이다. 미스 K는 운전하면서 중간중간에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아 그래요?”라고 추임새를 넣기도 하면서 열심히 남의 연애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K 교수는 신이 나 과장법을 써가면서 대학 1학년 때 미팅 가서 만난 첫 번째 여자에게서 바람맞은 이야기까지 했다. K 교수는 소설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별것 아닌 이야기에다가 그럴듯하게 살을 붙이고 적당한 장면에서 반전을 만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얼마쯤 가다가 미스 K는 기름을 넣기 위하여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알바 청년이 주유하는 잠깐에 미스 K는 차에서 내렸다. 미스 K는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자판기로 가더니 커피 2잔을 뽑아 왔다. K 교수는 조수석에 앉아서 미스 K의 걸음걸이며 지폐를 넣고서 커피 나오기를 기다리는 모든 과정을 영화 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해 보였다. 머리에 오른손을 올려서 앞머리를 살짝 정돈하는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패션모델이 걷듯이 가볍게 사뿐사뿐 우아하게 걷는 모습은 물가를 걷는 학을 연상시켰다. “교수님, 커피 드시지요. 교수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미스 K가 운전하는 그랜저는 최초 모델인 ‘각 그랜저’가 생산 중단되고 1992~1998년 사이에 생산된 ‘뉴 그랜저’였다. 소형차인 프라이드를 8년째 타는 K 교수가 그랜저를 타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승차감이 아주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 위를 미끄러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작은 차보다 큰 차를 선호하는가보다 이해가 되었다. 자기가 타는 프라이드는 소달구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차를 바꿀 때는 좋은 차로 바꾸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날 정도였다. 차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액세서리도 요란했고 오디오도 아주 훌륭했다. 마침 비발디의 ‘사계’ 가운데 봄이 경쾌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서 왼쪽으로 눈동자를 살짝 돌려 슬쩍슬쩍 훔쳐보는 미스 K의 옆 모습은 아름다웠다. “미인은 정면만이 아니라 옆 모습도 아름다운가 보다”라고 K 교수는 생각했다. 운전하는 미스 K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대화는 미스 K의 모교인 이화여대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미스 K가 대학원에 다니면서 미스코리아 경연대회에 출전했는데, 당시 학칙상 미인대회에는 나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대회에 나가려면 퇴학을 감수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다음 날인 수요일 점심시간에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교수들 몇이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축제 이야기가 나오고 미스 K 이야기가 나왔다. 미스 K가 미녀라서 그런지 매우 도도하다고 ㅌ 교수가 말했다. K 교수는 그녀가 그렇지 않다고, 매우 상냥하고 친절한 성격이라고 부인하였다. 그러다가 K 교수는 미스 K를 축제에 초대할 수도 있다고 얼떨결에 밀해 버렸다. ㅌ 교수는 그 말을 받아서 그건 불가능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결국은 그러면 내기를 하자는 데에까지 진전이 되었다. 미녀식당에서 가장 비싼 음식을 걸고 점심내기를 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두 교수는 증인으로 내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기를 걸고 나서 K 교수는 연구실로 돌아왔다. K 교수는 바쁜 점심시간이 지났을 때인 3시쯤에 미녀식당으로 전화했다. 마침, 미스 K가 직접 받았다. K 교수는 내일 축제에 데리러 갈 테니까 예쁜 옷 입고 식당에서 오후 3시에 기다리라고 전했다. 미스 K와 통화한 후 K 교수는 내기에 참여한 다른 세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오후 3시 30분에 K 교수의 학과 학생회에서 만든 천막주점으로 오라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통화를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그날도 K 교수는 아내와 2시간 뒤에 할인점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K 교수는 2층에 있는 책방에 들렸다. 신간코너에 가서 이책 저책 들여다보기도 하고, 여행에 관한 책과 베스트셀러 진열대를 둘러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수필 코너에 가보니 앗, 《진하게 블랙으로》라는 책이 눈에 띄지 않는가! 단 한 권 남은 책을 꺼내어 보니 출판년도가 1991년으로 찍혀져 있었다. 아마도 절판되기 전 마지막 한 권이 몇 년 동안 K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표지를 넘기다 보니 미스 K의 젊었을 때 사진이 전면에 나타났다. 눈이 아주 총명해 보이고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하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K 교수는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키고 책을 샀다. 나온 지 7년이 지난 1998년에 책의 정가는 3,800원이었다. 소설은 6개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장의 제목이 평범하지 않고 특이했다. 제1장 조금 슬프게 제2장 조금 부드럽게 제3장 조금 화려하게 제4장 더 세게 제5장 조금 가볍게 제6장 다시 처음부터 추상적인 장 제목을 읽으면서 K 교수는 불경스럽게도 선정적인 내용을 연상하였다. 집에 들어온 K 교수는 밤새워 책을 통독하였다. 쪽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여자의 말은 남자의 말과 달리 때로는 모호하다. 이성적이며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초대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인지, 거절하는 것인지 어정쩡하기만 하다. 그러나 말하는 어조와 분위기로 보아서는 받아들인다는 뜻 같기도 하고... "거절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기다리겠습니다. 축제는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금요일 쌍쌍파티로 끝납니다. 학생들이 학과별로 주점이며, 타로점, 또뽑기, 솜사탕, 물풍선 터뜨리기, 연못에서 보트 타기, 세발자전거 타기 등 여러 가지 볼거리를 만들어 놓았으니 목요일에 구경 한번 갑시다.“ “......” 미스 K는 대답하지 않고 예쁜 자태로 빙긋이 웃기만 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여자의 침묵은 긍정’이라는 속설을 믿어야 하나? 매주 일요일 K 교수는 아내와 둘째 아들을 차에 태우고 아침 일찍 강남구 일원동에 있는 대형 교회에 예배 보러 간다. 강남에서 수기리로 이사 온 뒤, 처음에는 집에서 가까운 시골교회를 다녔다. 시골교회는 교인이 한 50명 될까 말까 아주 작았다. 목사님은 마을 토박이로서 연세는 60이 넘으셨는데, 원래는 장로님이었단다. 신앙심이 좋으신 장로님은 50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