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세종의 정치적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세종 18년 12월에는 한 예로 백성의 형편이 좋지 않다고 하여 환상(還上, 각 고을의 사창에서 봄에 백성에게 빌려주었던 곡식을 가을에 받아들이던 일) 징납(徵納, 고을의 원이 세금을 거두어 나라에 바치는 일) 기한을 추수기로 늦추게 한 일이 있다. 호조에 임금의 명을 전하기를, "전일에 정부의 청에 따라, 을묘년(세종 17년) 이전 각도의 환상 징납을 바치지 못한 사람은, 올해 흉년이 든 각도를 제외하고는 조금 풍년이 든 도에는, 수령관에게 수령을 단속하여 새해를 맞기 전에 다 바쳐서, 내년에 굶주림을 구휼할 비용으로 쓰게 하고, 만약 다 바치지 않으면 그 수령과 수령관을 처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근래 각도의 관리들이 바치기를 독촉할 때 지나치게 각박하게 하니, 이 탓에 가난한 이들이 논밭과 집을 다 팔아서 갚는 사람도 있고, 혹은 문을 닫고 도피하는 사람도 있으며, 그 세금을 내지 않고 도망한 사람의 그 일가붙이와 이웃 사람에게 징수하고, 또 그 논밭을 경작하는 사람을 찾아서 이를 징수하고, 만약 사가에서 부리던 종이 도망하여 숨으면 그 주인의 저장한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실록》 서술과 편찬에서 규범적 원칙으로서의 ‘직필(直筆)’ 혹은 ‘직서(直書)’가 있다. 조선 시대에는 ‘직필’에 대한 다른 두 가지 이해가 두루 쓰였다. 하나는 고대 중국에서 통용되던 의미와 같은 것으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사관의 올바른 도덕적 판단과 평가를 숨김없이 기록하는 것이 ‘직필’이라는 이해였다. 다른 하나는 주희가 주장했던 것과 비슷한 것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혹은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하는 것이 ‘직필’이라는 이해였다. 두 가지 이해는 조선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상호 경합하며 다양한 정치 행위자들의 이해에 봉사하기도 했고,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상호 결합하여 ‘직필’의 새로운 정치적 기능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박지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박사과정, 2022) 대략 역사서 기술 방법에는 직서법(Direct Narration)과 함께 많이 사용되는 방법의 하나는 비판적 서술(Critical Narration) 방법이 있다. 세종 5년에 《고려사》를 정리하는 일이 있었다. (지관사 유관ㆍ동지관사 윤회에게 《고려사(高麗史)》를 개수케 하다) 처음에 정도전 등이 전조(前朝,고려)의 역사를 편수함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이 임금이 되면서 내세운 정치의 목표는 백성이 우선이라는 ‘시인발정(施仁發政)’이나 ‘민위방본(民爲邦本)’ 등으로 잘 나타나 있다. 그와 동시에 강조한 것은 정치를 같이 논하는 신료는 물론 일반 백성과의 소통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의 전제 조건으로 볼 수 있는 자연은 먼저 가까이 있는 신료들과 대화를 나눔은 물론 토론을 꺼리지 않는 태도와 성격이었다. 그 하나의 예로 토론을 하되 일이 풀리지 않으면 종일이라도 토론을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경연관을 합하여 한 번으로 하고 강한 후에는 경연청에서 토론하게 하다) 경연에 나아가니 동지경연(同知經筵) 탁신(卓愼)이 아뢰기를, "근래에 경연관(經筵官)이 번(番)을 나누어 나아와서 강(講) 하는데, 모두 다른 사무를 맡은 관계로 많은 글의 깊은 뜻을 강론(講論)할 여가가 없어서, 나아와서 강(講)할 즈음에 상세히 다하지 못하게 되오니,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합하여 한 번(番)으로 하여, 나아와서 강한 후에는 경연청(經筵廳)에 물러가서 종일토록 토론(終日討論)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고, 또 점심밥을 주도록 명하였다.(⟪세종실록⟫즉위년12/17) 어떤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의 산업 곧 먹고 사는 길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종은 농업이 주 산업인 시대에 만약 가뭄이나 장마, 돌림병이 돌면 민생 대책을 어떻게 세웠을까? 《조선왕조실록》에 ‘민생가려’라는 항목을 통해 만약 민생이 어려워졌을 경우 세종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세종의 정치 지도력을 알아보고 있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뭄’에 대해 출현 횟수를 보면 국역에서 모두 3,463건 세종 323건, 성종 454건, 중종 474건, 숙종 224건, 영조 255건 등으로 세종 때는 많은 편에 속한다. 비숫한 ‘장마’를 찾아보면 모두 930건 가운데 세종 105건, 중종 54건, 선조⋅정조 68건, 고종 67건 등이다. ‘장마’는 세종 때 가장 많았다. 실제로 악재를 만났는지 실록의 기록이 충실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종은 자연의 혜택을 많이 누리지 못한 임금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세종 때 토지 개간이 가장 많았다는 당시 통계는 세종의 가뭄과 농업 대책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지난 연재에서 몇 회 가뭄이나 홍수, 질병 등이 찾아왔을 때 세종이 대응하는 모습을 ‘민생가려’라는 열쇠말을 통해 알아보았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시대의 나라 살림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왕권제도 시대에 세종은 재해가 일어나거나 농사가 어려워지거나 먹고 사는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인 ‘민생가려’의 경우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평시에는 논과 밭을 새로 일구고 저수지 등을 확충하여 밭에서 태종 4년(1404) 경기도를 빼고서도 25년 뒤 세종 초기 때 642,352결이 늘어나 그 증폭이 배에 이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장마나 가뭄 그리고 돌림병 등의 재해가 오면 처음으로 하는 일은 피해지역 조사에 들어갔다. 그다음 조치로는 해당지역의 ‘조세감면’이 이어졌다. 그리고 문소전(태조의 비인 신의왕후의 사당)과 그 밖의 지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때로 구국기도를 하지만 이는 민심을 달래는 행위였을 것이기도 하다. 이어 각 부처의 경비를 절감하는 실질적인 조치 말고도 이에 더해 죄수도 방면한다. 다음으로 시행되는 것은 실지적 현장 대처로 구휼(救恤, 이재민 구제)이었다. ∙ 구휼로 직접 돕다. ⋅세종 9년 7월 22일 : 외직으로 부임하는 첨절제사 정중수 등에게 백성들을 구호(民生可慮) 하는 데 힘쓰라고 당부하다. ⋅세종 3년 6월 19일 :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시대의 나라 살림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계적으로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나 축산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이후 서양은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따른 통상이 활발해지게 되었고 동양은 세계사적으로 뒤처지는 역사를 맞게 되었다. 왕권제도 시대에 세종은 재해가 일어나거나 농사가 어려워지거나 먹고 사는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인 ‘민생가려’의 경우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자. 평시에는 논과 밭을 새로 일구고 저수지 등을 확충하여 경기도를 빼고서도 태종 4년(1404)에서 25년 뒤인 세종 초기 때 642,352결이 늘어나 그 증폭이 배에 이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호수와 사람도 각기 27,607호, 319,339구가 늘어났다. 이와 같은 밭과 호수와 사람의 증가는 토지의 개간, 인구 자연증가의 영향도 있겠지만, 불과 25년 만에 거의 배에 달하는 토지의 개간과 호구에서 자연증가가 가능했다고 믿기지 않는다. 이것은 곧 나라가 직접 지배하는 토지의 증가 ‧ 호구의 증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곧 이러한 증가는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 추진되었던 집권적 통제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라의 수세지(收稅地,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시대는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계사적으로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나 축산에 의지하는 비중이 컸다. 서양은 농축업의 기본 틀인 봉건제에서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따른 통상이 활발해 진데 견줘 동양은 기술발전에 늦어 세계사적으로 뒤처지는 역사를 맞게 되었다. 중세 왕권제도 시대에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 세종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에 대한 대처를 통해 세종의 정치 지도력을 알아보자. 백성의 먹고사는 일에 대한 배려의 발로인 ‘민생가려’로 재해가 다가오면 세종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순서와 시기를 고려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평시에는 논과 밭을 새로 일구고 저수지 등을 확충한 임금이 세종이다. 한 예로 지난 호에서 보았듯 밭에서 태종 4년 경기도를 빼고서도 25년 뒤 642,352결이 늘오나 그 증폭이 배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장마나 가뭄, 질병 등의 재해가 오면 처음으로 하는 일은 피해지역 조사에 들어갔다. 그다음 조치는 해당지역의 ‘조세 감면’이었다. ⋅조세를 감면하다 (사간원에서 흉작의 정도가 심한 주군의 조세를 면제할 것 등을 상소하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여 아뢰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임금은 신하를 거느리고 백성이 잘살게 하는 정책을 펴는 사람이다. 정책의 기준을 관리들 편의에 두느냐 백성의 편에 서느냐가 관건이다. 현실적으로 백성들의 욕구는 끝이 없고 그때마다 임금은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 시작은 상대방 곧 백성의 소리를 듣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그러나 어려운 때도 있다. 지방관리가 부당하게 처결할 때는 백성은 누구에게, 어디에다 하소연을 전달할 수 있을까. 세종 13년에 이런 문제에 논의가 있었다. 임금이 찬성 허조에게 이르기를, "근간에 들으니, 경이 고을 사람들이 친히 수령을 고소하는 자는 마땅히 수리하기를 허락지 말라고 하여, 내게 상달되기를 바란다.’라고 하고, ... 태종(太宗)께서도 기꺼이 들으시어 경자년(1420)에 이미 법을 세웠는데, 경의 말이 매우 옳으나, 자기의 억울한 바에 이르러서도 가령 수령이 백성의 노비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다시 수리하지 않는 것이 가할까... 이에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하였는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받지 않으면 어찌 다스리는 체통에 해롭지 않을까." 하니, 허조가 대답하기를, "마을 사람들과 수령에 대한 관계는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식위민천’은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28건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세종 때 8건이다. 다른 임금은 성종이 5건으로 많다. 두 분 다 어질다고 존경받는 임금들이다. 세종은 1418년 8월 18일 즉위한다. 즉위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10월에 ‘먹는 것이 백성의 하늘’이라는 명제를 선언한다. 즉위식에서 선언한 ‘시인발정’(施仁發政, 백성사랑은 임금 노릇의 근본)의 구체적인 시행책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여 아뢰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온데, 이제 흉년을 만나 민생이 염려되오니, 각 군의 조세를 경창(京倉)에 전부 바치는 것을 제하고는, 곡식으로 거두어 각기 그 고을에 두었다가, 내년의 씨앗으로 예비하게 하고, 그 농사를 그르침이 더욱 심한 주ㆍ군(州郡)은 조세를 전부 면제하시기를 청하나이다. 그리고 왜적이 중국을 침범하여, 그 약탈한 재물을 가지고 우리나라 남쪽 지경에 와서 배를 대고 해변의 백성들과 교역한 지 오래 되었는 바, 지금 우리는 기근으로 재물이 없어 교역하지 못한즉, 왜적이 의식을 얻을 곳이 없게 되면 반드시 도둑질할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옵니다.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이 임금으로 정치를 잘하였다는 평가는 우선, 생각한 것을 말하기보다 남의 말을 끝까지 잘 듣는 일일 것이다. 임금은 우월적 지위에 있으므로 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또한 때로 나) 자기주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막으며 다) 의견 개진을 어렵게 하거나, 펼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세종은 간하는 것을 실행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주려 했다. 때로 독단으로 처리한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자기 신념[철학]에 따른 것이어서 전체 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실록에 나타난 예를 보자. (의산군 남휘의 간통과 폭행 등의 범행을 처벌해달라는 상소문) 우사간 이반(李蟠)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간(諫)하는 것을 실행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인군(人君)의 아름다운 덕행이라 하옵니다. 근일에 헌부에서 의산군 남휘(南暉)의 범행한 바를 두세 번 신청(申請, 일을 알려 청구함)하였사오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사오니, 전하께서 간(諫)함을 좇고 말함을 들어주시는 미덕에 어떠할까요? (⟪세종실록⟫ 6/8/4) 이 문제는 종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