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상대를 믿는다는 한마디가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세종 14년(1432)에 황희가 나이가 많아 사직을 요청했을 때 세종이 하신 말씀이다.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영의정 황희가 사직(辭職)하여 말하기를, "엎드려 생각하건대, 잘못 태종께서 선택하여 후히 대우해 주신 은혜를 입어 여러 어진 이들과 섞이어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수년 동안 죄를 마음으로 달게 받으면서 궁촌(窮村)에서 몸을 보전하고 있었더니, 하루아침에 착한 임금의 세상에 다시 거두어 쓰실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대로 우물쭈물하며 지금에 이르도록 애써서 관직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귀는 멀고 눈도 또한 어두워서 듣고 살피는 일이 어려우며,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부자유하여 걸음을 걸으면 곧 쓰러집니다. 더군다나 신은 올해의 생일로 이미 만 70살이 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나이가 노쇠에 이른 것을 가엾게 여기시며, 신의 정성이 깊은 충정에서 나온 것을 살피시고,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직위에서 물러나게 허락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비답(批答)하기를, "어려운 것을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이 정치를 하며 신하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 하고 일을 처리함에 신중히 하려는 노력은 여러 곳에서 보아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의론 끝에 결론에 이루지 못하는 경우다. 이때 몇 가지 대안이 나올 것이다. 다시 생각하여 훗날 재론하든가 아니면 그 안건을 일정기간 연기하든가 아니면 파기하든가 일 것이다. 먼저 ‘여경상량’을 실록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많은 횟수는 아니나 세종 때 8번 나와 빈도수로는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가장 많다. <세종실록>에 보이는 내용의 개요를 보자. 1. 세종 7년 5월 14일: “장리 최맹온의 부정을 징계하자는 집의 김타 등의 상소문이다.” 2. 세종 7년 6월 2일: “좌의정 이원 등과 관리의 승급·수령 파면의 일을 의논하다.” 3. 세종 10년 5월 26일: “김효정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 상소를 올리다.” 4. 세종 11년1월 4일: “중국 황제가 구하는 석등잔의 헌납 방법과 학문진흥책을 의논하다.” 5. 세종 12년 8월 13일: “현재 강경법의 《육전》에 기재를 허락지 않는다.” 6. 세종 14년 3월 15일: “상장소 제조 맹사성ㆍ권진ㆍ허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이 회의에서 토론을 강조한 《조선왕조실록》 속의 기사로는 무엇이 있는가? 지난 호에 이어 기사 몇 개를 보자. 지난 호에서는 세종 즉위에 대해 명에 알리는 일(⟪세종실록⟫즉위년/8/13), 도당시험을 제술로 할 것인가 강경으로 할 것인가에서 제술 우위로 정한 일(⟪세종실록⟫1/2/23), 소금 공납을 줄이는 일(⟪세종실록⟫1/10/24)이었다. 이어서 이번에도 ‘당갱의지’의 몇 기사를 보자. 먼저는 가)격고(擊鼓, 임금의 거둥 때, 원통한 일을 상소하기 위해 북을 쳐서 하문을 기다리던 일)하는 사람에 대한 제한과 나)짚을 거두는 폐해에 대하여서다. 인권 신장을 위해 설치한 격고하는 사람에 대한 규제 문제다. (허조가 참람하게 격고하는 무리를 징계하여 소송을 덜게 할 것을 아뢰다) 허조가 아뢰기를, "참람하게 격고(擊鼓)한 자를 성상께옵서 특히 백성을 사랑하시는 인덕(仁德)으로 죄책을 더하지 아니하옵시기 때문에, 북을 쳐서 호소하는 자가 매우 많사옵니다. 사헌부(司憲府)와 형관(刑官, 법률ㆍ소송ㆍ재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 안건 문서가 구름같이 쌓여서 두루 살필 수 없사오니, 마땅히 참람하게 격고하는 무리를 징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회의에서 대화를 나눌 때 ‘이위하여’(以爲何如)를 자주 말씀하신 바를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다. 관리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해 신하들의 의견을 자주 물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의의 순서는 옛말을 통해 살펴보면 처음이 토론(討論)이다. 들이대고(토, 討) 다투듯 논쟁을 이어간다. 다음 단계는 논의(論議)다. 논쟁하듯 곧 다투듯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의(議)는 문의, 논의, 평의(評議)다. 다음 단계는 의결(議決)이다. 의논한 뒤에는 결정하는 것이다. 토(討)론 - 론의(義) - 의결(決)의 순서로 진행된다. ‘당갱의지’는 이러한 과정에서 ’이위하여‘에 대한 답변의 성격이 있다. 실록에 나타난 몇 ‘당갱의지’의 기사를 보자. (중국에 전위한 일을 아뢸 사은 주문사를 구성하다) 임금이 상왕전에 나아가 영의정 한상경(韓尙敬)과 우의정 이원을 불러 명나라에 전위(傳位)한 일을 아뢸 것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세자(世子)의 책봉을 청하였을 때 인준을 받지 못하였는데 또 갑자기 전위하였으니, 중국 조정에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하니, 이때 박은은 병으로 집에 있었으므로 하연(河演)을 보내어 이에 대하여 물었으나, 박은
[우리문화신문=김현명 칼럼니스트] 2022년 3월 10일,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하루였다. 반대로, 2025년 6월 4일은 가장 기쁜 날로 기억될 것이다. 지난 3년 3개월 동안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견디기 힘들었을 때를 지나왔을 것이다. 그 고통의 시간은, 나에게 있어선 정말로 "역사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2022년 대선을 지켜보며 나는 확신했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는 망할 것이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면 이 나라는 살아날 것이라고. 그래서 윤석열의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후 현실은 내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날마다 확인시켜 주었다. 더욱 괴로웠던 건, 나라가 무너져 가는 상황 속에서도 많은 언론과 기득권, 그리고 배운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오히려 옹호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질수록 내 고통은 더 깊어졌다. 그렇게 새해를 맞이한 2024년 1월 1일. 지인 몇 명과 남산에 올라 해돋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올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떤 사자성어가 좋을까?” 해돋이를 본 뒤, 우리는 옥수역 1번 출구 근처의 미타사를 찾았다. 이 절은 신라 진성여왕 2년(888년)에 창건되었고, 고려 예종 1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회의에서 대화를 나눌 때 ‘이위하여’(以爲何如)를 자주 말씀하였다. 신하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물었던 것이다. 첫 ‘이위하여’는 세종 즉위년 8월 13일 전위한 일을 명에 아뢸 사은 주문사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새 임금으로 출발하는 것이어서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에 전위한 일을 아뢸 사은 주문사를 구성하다) “임금이 상왕전에 나아가 영의정 한상경(韓尙敬)과 우의정 이원을 불러 명나라에 전위(傳位)한 일을 아뢸 것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세자(世子)의 책봉을 청하였을 때 인준을 받지 못하였는데 또 갑자기 전위하였으니, 중국 조정에서 어떻게 생각할까요."하니, 이때 박은은 병으로 집에 있었으므로 하연(河演)을 보내어 이에 대하여 물었으나, 박은도 역시 확정한 의견을 내지 못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의논토록 하라." 하고, 중국에 가서 전권으로 대답할 만한 사람을 가리어 사은 주문사(謝恩奏聞使)를 삼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판한성 김여지(金汝知)로 사은사를 삼고, 공조 참판 이적(李迹)을 부사로 삼고, 형조 판서 조말생을 주문사로 삼았다.(세종실록 즉위년/8/13) 이때는 상왕인 태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단군배향’이나 ‘남향봉사’는 ‘사자성어’라기보다 ‘사자용어’일 수 있으나 세종의 정치에서 ‘자주’ 정신을 살피는 뜻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세종은 나라를 운영하며 조선의 특이한 점을 찾고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그 가운데는 가) 집현전 설치와 학문 진흥 조선 고유의 학문과 문화, 과학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을 찾고 연구하기 위해 집현전을 확충해 나갔다. 그 대표적인 연구물은 《훈민정음》의 창제(세종 25년, 1443년; 반포 1446년)다. 비록 세종대왕이 창제하였다고 공식적으로 실록에 되어 있지만 그 전후의 언어체계 연구에서는 많은 사람의 도움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나) 공법제정 조선 고유의 공법(貢法) 제정이 있다. 조세 제도를 백성의 토지 생산력에 맞춰 합리적으로 조선 고유의 제도로 개편했다. 다) 조선 고유의 음악정리와 정간보(井間譜) 창안과 측우기 등 그 밖에도 측우기, 고유의 활자 그리고 자주성을 내세운 국방 외교정책으로서 외세(여진ㆍ명)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4군 6진을 개척’했다. 특히 이때 외교에서 사대와 교린의 균형을 취해 명나라에는 예를 갖추되(형식적 존중), 일본·여진 등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정치 소통(커뮤니케이션)의 가장 큰 관심은 동양 정치사상의 기본인 민본(民本)에 중점을 둔 것은 사실이나 그다음으로 강조한 것은 실용(實用)이라고 할 신제(新制,製)와 창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이 정치를 통해 실용과 신제를 강조한 기사들을 중심으로 세종의 실질적인 정치의 모습을 보자. 세종이 이루고자 하였으나 아직 그 시기는 시대정신과 환경이 조성되지 않아 이루지 못한 일도 있다. 시장경제의 기초인 화폐 유통과 기타 인권강화라 할 노비제도의 완화 같은 것들이다. 여기 실질적인 토지개량과 말의 관리에 대해서도 실용(實用)임을 강조했다. ⋅ 실용(實用) (나주 교수관 진준이 제주의 토지개량과 말의 관리에 대해 올린 글) 말[馬]은 군국(軍國)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산림에 놓아 제 천성대로 자라서 사람에게 길들여 익히지 않았다가, 일조에 갑자기 붙들어 매어 후풍(候風, 배가 떠날 때 순풍을 기다리는 일) 하는 곳에 모아, 여러 날 주리고 목마르게 하다가, 배에 실려서 바다를 건너게 하면, 풍토와 물이 각각 다른지라, 목말라 물을 마시다가 병이 나면, 못 쓰는 말이 되어, 나라에 무익한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세종의 정치적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세종 18년 12월에는 한 예로 백성의 형편이 좋지 않다고 하여 환상(還上, 각 고을의 사창에서 봄에 백성에게 빌려주었던 곡식을 가을에 받아들이던 일) 징납(徵納, 고을의 원이 세금을 거두어 나라에 바치는 일) 기한을 추수기로 늦추게 한 일이 있다. 호조에 임금의 명을 전하기를, "전일에 정부의 청에 따라, 을묘년(세종 17년) 이전 각도의 환상 징납을 바치지 못한 사람은, 올해 흉년이 든 각도를 제외하고는 조금 풍년이 든 도에는, 수령관에게 수령을 단속하여 새해를 맞기 전에 다 바쳐서, 내년에 굶주림을 구휼할 비용으로 쓰게 하고, 만약 다 바치지 않으면 그 수령과 수령관을 처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근래 각도의 관리들이 바치기를 독촉할 때 지나치게 각박하게 하니, 이 탓에 가난한 이들이 논밭과 집을 다 팔아서 갚는 사람도 있고, 혹은 문을 닫고 도피하는 사람도 있으며, 그 세금을 내지 않고 도망한 사람의 그 일가붙이와 이웃 사람에게 징수하고, 또 그 논밭을 경작하는 사람을 찾아서 이를 징수하고, 만약 사가에서 부리던 종이 도망하여 숨으면 그 주인의 저장한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실록》 서술과 편찬에서 규범적 원칙으로서의 ‘직필(直筆)’ 혹은 ‘직서(直書)’가 있다. 조선 시대에는 ‘직필’에 대한 다른 두 가지 이해가 두루 쓰였다. 하나는 고대 중국에서 통용되던 의미와 같은 것으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사관의 올바른 도덕적 판단과 평가를 숨김없이 기록하는 것이 ‘직필’이라는 이해였다. 다른 하나는 주희가 주장했던 것과 비슷한 것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혹은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하는 것이 ‘직필’이라는 이해였다. 두 가지 이해는 조선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상호 경합하며 다양한 정치 행위자들의 이해에 봉사하기도 했고,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상호 결합하여 ‘직필’의 새로운 정치적 기능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박지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박사과정, 2022) 대략 역사서 기술 방법에는 직서법(Direct Narration)과 함께 많이 사용되는 방법의 하나는 비판적 서술(Critical Narration) 방법이 있다. 세종 5년에 《고려사》를 정리하는 일이 있었다. (지관사 유관ㆍ동지관사 윤회에게 《고려사(高麗史)》를 개수케 하다) 처음에 정도전 등이 전조(前朝,고려)의 역사를 편수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