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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신민회,한인사회당,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이동휘 선생'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동휘 선생[1873~1935] 은 아전 이승교의 아들로 1891년경 18세 때 군수의 시중을 드는 통인(通人)으로 있다가 상경하여 1895년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에 입학·수학한 뒤 육군 참령(參領)까지 진급하였으며, 1902년부터는 강화도(江華島) 진위대장(鎭衛隊長)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 계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군직(軍職)을 사임한 뒤, 강화도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결성에도 관여하는 등 민족주의 교육과 구국계몽운동에 적극 노력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의 해산으로 대한제국이 준식민지화하자, 군동지였던 연기우(延基羽)·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투쟁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광무황제의 해아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에 관련된 혐의로 일경에 피체·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주선으로 그 해 10월 석방되었다.

   
 

석방 후 1908년 1월경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창립하는데 참여하는 한편,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갑(李甲)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함경도에서 또 다시 피체되어 황해도 무의도에 3년간 유배되었다.

1912년 가을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하여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한 그는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서 김립(金立)·계봉우(桂奉瑀) 등과 더불어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설립하여 지속적으로 민족주의 교육활동을 전개하면서, 구례선(具禮先) 목사의 도움으로 북간도 전역에 기독교 선교사업을 진흥시키기도 하였다.

1913년 러시아 연해주(沿海州)로 거점을 옮긴 후,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에 가담하여 이상설(李相卨)·이갑(李甲)·신채호(申采浩)·정재관(鄭在寬) 등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투쟁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제(日帝)와 연대한 러시아가 재로한인(在露韓人)의 민족운동을 탄압하자, 이종호(李鍾浩) 등과 더불어 중국 왕청현(汪淸縣) 라자우거의 한인촌으로 거점을 옮겨 대전무관학교(大甸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듬해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무관학교는 해체되고, 그 또한 일제 관헌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왕청현 하마탕의 한인촌에 숨어 요양하였다. 1917년 봄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간 그는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7월 초 독일(獨逸) 밀정으로 오인되어 러시아 임시정부 헌병대에 피체되어 수감되었다.

그러나 1918년 초 이 지역을 장악한 볼셰비키 가운데 한국인 출신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하바로프스크시 책임비서, 원동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외교부장이었던 여성혁명가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의 도움으로 풀려나 하바로프스크로 방송(放送)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한국민족운동에 사회주의를 접목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4월 28일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고 연해주(沿海州)에서 한인적위군(韓人赤衛軍)을 편성하는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블라디보스톡에서 문창범(文昌範)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대한임시정부(大韓臨時政府) 군무총장(軍務總長)으로 취임하여 동녕현(東寧縣)에 독립군을 지휘할 임시군집부(臨時軍執部)를 설치하고, 일본과 독립전쟁을 전개할 독립군 양성에 강한 추진력을 보였다.

또한 8월 말경에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한 뒤 임시정부 내외의 동조세력을 규합, 사회주의운동 확산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과 노선은 레닌의 원조자금의 유용시비와 맞물려 임정 내의 다수 민족주의 세력 및 반대론자들과 대립하게 됨에 따라 그는 사임하였다.

1921년 3월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뒤 5월에는 국민대표회 기성회에 참가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1월에는 박진순(朴鎭淳)·이극로(李克魯)를 대동하고 모스크바로 가 레닌을 만나 200만 루불의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약속받아냈다. 또한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상해와 연해주를 주무대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집행위원과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적기단(赤旗團)과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를 조직하였고, 꼬르뷰르(高麗局)의 책임자로도 활동하였다.

1926년 3월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등의 조직을 주도하면서 무장투쟁노선과 사회주의 혁명노선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블라디보스톡에서 혁명운동자 및 그 가족의 구원을 사명으로 하는 국제혁명운동희생자구원회(mopr) 시간부 조직지도원, 1930~1935년까지 변강국제혁명자후원회 간부로 활약하면서 원동 변강의 한인 거주지역에 국제혁명자후원회 세포를 조직하는 등 열성적인 활동으로 1932년 10월 12일 원동 변강 모플로부터 명의적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서거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