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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정신여고에서 "독립정신" 의 강한 에너지를 받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정신여고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 교장 선생님을 찾아뵙겠다는 편지를 보낸 것은 지난 11월 중순이었다. 편지를 보내자마자 언제라도 좋다는 연락이 와서 기자가 이희천 교장 선생님을 찾아간 날은 1130일 월요일 오전 10시였다.

교정에는 늦 단풍나무 한그루가 붉은 옷을 입은 채 서 있었고 바로 옆에는 정신백년(貞信百年, 1887-1987)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돌비석이 있어 정신여고가 오랜 전통을 지닌 학교임을 묵묵히 말해주고 있었다.

정신여자고등학교(교장 이희천)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로는 김마리아 선생을 비롯한 김순애,김영순, 신의경, 백신영, 유인경, 이정숙, 장선희 애국지사 등으로 이들은 한국여성독립운동사의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여성독립운동가의 산실답게 교장실에는 학사모를 쓴 김마리아 선생의 액자가 걸려있었는데 액자 밑에는 순국열사 김마리아(1892-1944), 정신여학교 4회 졸업. 모교의 교사로 재직. 2.8독립선언의 주동인물로 활약.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3.1 운동 당시 옥고를 치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추서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 정동여학당(정신여고 전신) 학생들과 2대 교장 헤이든 왼쪽 끝과 옆에 3대 교장 도티 <사진 정신여고 제공>

 
따끈한 유자차가 한잔 나오기가 무섭게 이희천 교장 선생님은 김마리아 선생 이야기부터 꺼내 놓는다. 김마리아 선생은 1962년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단 두명의 여성 가운데 한 분으로  다른 한 분은 유관순 열사이다. 그 만큼 이 두 분의 독립운동은 한국여성독립운동사에 뚜렷한 획을 그었지만 정작 김마리아 선생은 유관순 열사만큼은 알려져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여성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쓰는 작업을 하고 있는 기자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김마리아 선생을 유관순 열사처럼 독립운동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열에 한두 명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러한 사정이다 보니 교장 선생님은 이 학교 출신인 김마리아 선생을 기자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 그만큼 김마리아 선생의 업적은 크고 위대하다.
 
   
▲ 일본유학시절 기모노를 입은 여학생 가운데 당당하게 한복을 입은 김마리아(둘째줄 오른쪽 끝) <사진 정신여고 제공>
 
이희천 교장 선생님은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책장에서 두툼한 책 두 권을 기자 앞에 꺼내 놓았다. 신문으로 보는 김마리아사진으로 보는 정절과 신앙의 정신 120년사가 그것이다. 특히 557쪽에 달하는 신문으로 보는 김마리아책은 김마리아 선생이 1910년부터 1944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국내외에서 독립 운동한 기사와 옥고를 치룬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한 권의 책이야말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그대로 말해주는 듯해 잠시 가슴이 뭉클했다.
 
기사 가운데 1920529일치 동아일보에 대구 옥중 김마리아 위태라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대한애국부인단 수령 김마리아는 작년 9월에 체포된 후로 여러 달 동안 옥중에서 신음한 결과 영양이 불량하여 병이 나서 그동안 미음과 우유로만 겨우 목숨을 이어가더니 근래에는 병세가 더욱 심해져서 미음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벌써 이틀 동안이나 절식을 하였다는데 생명이 위태하다고 한다.”라는 기사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일제 강점기에 옥중 구속되었다가 고문으로 숨져간 여성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를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유관순은 물론이고 화대장터에서 만세운동에 앞장선 동풍신, 수원의 잔다르크 이선경, 달구벌 만세운동을 이끈 임봉선 등도 모두 가혹한 고문으로 꽃다운 나이에 숨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 정신여학교를 세운 초대 교장 엘러스 흉상이 정신여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31, 왼손에 태극기 오른손에 독립선언서로 시위 행렬의 앞에 서서 돌진하던 한 처녀는 적의 칼에 두 손이 끊기었다. 이것이 독립운동의 첫 피다. 대한독립을 위한 첫 피는 대한여자에게서 흘렀다. 대한의 여자는 비밀문서 인쇄, 등사, 배포와 통신의 대부분을 여자의 손으로 완성했다. 작년 2월 동경과 상해로부터 홀연히 고국에 돌아온 몇 명의 여자 애국자는 부산에서 의주까지, 목포에서 함흥까지 날아다니며 4천 년 간 침묵하였던 대한의 천만 여성에게 조국을 위하여 일어 날 때가 당도하였음을 고하였고 일단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일어나자 그네는 분연히 깊은 규방의 문을 차고 태극기를 두르고 나섰다.” 이것은 신문으로 보는 김마리아67쪽기록으로 1920217<독립신문>부인과 독립운동에 나오는 글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독립운동의 첫 피를 흘린 것도 여자요, 독립운동의 불씨를 당긴 3.1만세 운동에 앞장섰던 것도 여자요.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2.8 독립선언서의 주동자도 여자였다. 김마리아 선생을 비롯한 대한여성의 독립운동 역사는 항일독립역사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 학교 출신으로 나라로부터 훈장을 받은 이는 건국훈장 독립장의 김마리아 (1892-1944), 역시 독립장의 김순애(1889-1976) 선생이고,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분으로는 김영순 (1892-1986), 장선희 (1894-1970), 신의경 (1898-1997), 이정숙 (1898-1950), 유인경 (1896-1944), 백신영(태어난 해와 죽은 해를 모름) 등이다.
 
   
▲ 마르타윌슨여자신학원 재직시절(1932-1941), 앞줄 왼쪽 첫째가 김마리아 선생 <사진 정신여고 제공>
 
여성독립운동의 산실인 정신여자고등학교는 지금으로부터 128년 전인 18876월 여의사이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엘러스(A. J. Ellers)가 여성계몽을 목적으로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제중원 사택에 세운 정동여학당(貞洞女學堂)으로 시작하였다.
 
소녀들을 돌보고 가르쳤던 초기에는 불안정 했다. 어떤 날은 네 명의 소녀들이 있었지만 다음 날은 한명도 없는 날도 있었다. 우리가 의료용 칼로 그들의 눈과 심장을 도려낸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때는 찌푸린 얼굴과 어두운 안색이 우리를 맞이했지만 날이 지나고 소녀들에게 어떤 해악도 미치지 않게 되자 즐거운 얼굴과 미소가 우리를 맞이했다."
 
이는 초창기 정동여학당 (1887-1895) 시절 초대 설립자 엘러스의 글 “Personal Recollection of Early Days" 가운데 일부이다. 정동여학당은 8년 뒤 1895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으로 교사를 이전하면서 사립 연동여학교(蓮洞女學校)로 학교이름을 바꾸었다. 이때 총 학생 수는 10명이었고 1907년에 가서야 제1회 졸업생으로 11명을 배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을 강제병합한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1911년 제 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정식학교를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정하고 교과목은 물론 교직원,교과서,수업료 등에 관한 총독부 규정을 적용하도록  강요했다. 특히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아니면 상급학교 자격을 주지 않았지만 정신여학교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총독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기 위해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각종 학교로 남기로 했던 것이었다. 이후 정신여학교는 1935년 5월 9일 지정교로 승격되기 까지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지하조직을 통해 3·1운동을 전개하였던 애국부인회 회장에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인 김마리아가 뽑히고 그 본부가 정신여학교에 설치되자 일제의 탄압은 극에 달하게 된다. 이후 1939년 국어말살정책과 신사참배에 대한 거부로 교장이 해직되고 재단법인이 해체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학교는 친일파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그리고는 19453월 풍문학원(豊文學園)에 합병되면서 오랜 역사와 전통에 빛나던 정신여학교는 학교터와 교사, 200여 명의 학생과 15명의 교직원을 모두 잃고 폐교되고 말았다.
   
우리 학교에는 안타깝게도 폐교의 곡절을 겪는 통에 김마리아 선생은 물론이고 광복 이전의 학생들 학적부 관련 자료나 기타 학교 관련 자료가 하나도 없습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입니다.” 이희천 교장 선생님은 일제강점의 쓰라린 역사를 정신여학교가 고스란히 안고 있다고 말했다.
 
정신여학교는 광복 뒤 19475월 동문 김필례를 교장으로 추대하여 복교하였고, 교육법개정에 따라 19516월 정신여자고등학교와 정신여자중학교로 개편되었다. 그 뒤 197812월 서울시 송파구 잠실동 현재의 자리에 교사를 새로 지어 이전하였고 2015년 현재 128년째를 맞아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정신이 살아 있는 명실상부한 명문 학교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희천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정신여학교가 걸어 온 발자취를 들으면서 기자는 다른 학교에서 느끼지 못한 그 어떤 강한 독립정신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학교장이 그렇게 자신이 몸 담고 있는 학교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소상한 내용을 알고 있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독립운동가의 삶을 형식적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 온몸으로 느낀 뒤에 그것을 교육 현장에 쏟고 있었다.
 
   
▲ 1920년 6월 2일 동아일보에 연재된 '병상에 누운 김마리아' 연재 기사를 읽고 10여년 전 이희천 교장 선생님은 김마리아 선생 발자취를 찾아 대구 동산 일대를 찾아 갔다. 사진은 블레어 선교사 집 앞에서
 
동아일보 192062일치 기사에는 수소문하여 알아본 결과 김마리아는 대구에 서양인이 많이 사는 동산(東山) 어느 서양인 집에 있다하는 말을 듣고 동산으로 찾아 간 것은 그날 오전 10시 였다. 대구 시가의 서편으로 조그마한 언덕에 녹음이 우거지고 꾀꼬리 노래하는 사이로 우뚝우뚝 선 빨간 벽돌집이 은은히 보이는 곳이었다.”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희천 교장 선생님은 10여 년 전 이 기사를 들고 무작정 대구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 빨간 벽돌집을 찾아 떠난 것이다. 김마리아 선생이 일제의 고문으로 죽음 직전에 내몰렸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기자도 현장 위주의 글을 쓰고 있지만 이희천 교장 선생님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확인하고자 현장을 찾아다닌다는 말에 내심 놀랐다. 사실 기자는 여성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학교를 찾아가보았지만 이러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여성독립운동가를 공부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자 애쓰는 교장 선생님은 처음 만나보았기 때문이다.
 
이희천 교장 선생님과의 대담을 마치고 김마리아를 비롯한 김순애, 김영순, 장선희, 백신영, 이정숙, 신의경, 유인경 등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인 정신여고 교정을 걸어 나오다가 마침 수업을 마친 학생들과 마주쳤다.
 
   
▲ 이희천 교장 선생님과 함께 정신여고 역사 기록관 앞에선 기자

가볍게 목례로 방문자를 반기는 학생들의 예의바른 모습에서 100여 년 전 정동여학당 시절 한국 전통의 생활관습과 예절을 존중하여 하루 10여 차례 공손히 꿇어앉아 평절로 인사하는 것을 규범으로 삼았다는 창립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교정은 당시 그 모습이 아니지만 정신만은 선배들의 올곧은 정신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아 흐뭇했다.
기자는  취재를 마치고 나오면서 여성독립운동의 산실 정신여고에서 '독립정신'의 강한 에너지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