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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내 안에 개있다》, 저에게 배달되어 온 책의 제목입니다. 내 안에 개있다니?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멍멍이 개? 멍멍이 개가 있다면, 이게 무슨 뜻일까? 책장을 여니, 책을 지은 신아연 수필가는 이렇게 말하는군요.
“지금 여기, 민낯의 삶 자리만큼 소중한 것이 없지요. 지금 여기의 삶 자리는 미래라는 막연한 잣대로 재단되어 멍하게 잘려 나가서는 안 되는 오롯함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러기에 뜬금없는 ‘저것’으로 인해 손에 잡히는 ‘이것’이 희생되어서는 안 되며, 매끈하게 정제된 ‘저것’이 소박하고 질박한 ‘이것’을 밀어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박제된 ‘저것’ 대신 생동으로 빛나는 ‘이것’을 보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의 자세를 ‘내 안에 개있다’는 말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개는 절대로 주인에 대한 충절을 버리거나 딴 마음을 품는 법이 없지요. 언제나 ‘저것’이 아닌 ‘이것’을 섬깁니다. 우리도 ‘개처럼’ 나의 근원이자 나의 지성 너머에 있으면서 매일 매일의 내 삶에 개입하는 절대적 존재를 인정할 때 비로소 ‘저것’이 아닌 ‘이것’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아하! 멍멍이 개가 있다는 얘기이군요. 그런데 ‘내 안에 개있다’에 이렇게 깊은 철학적 성찰이 녹아 있다니 놀랍네요. 역시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 다르긴 다르군요. 신아연 수필가는 이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호주로 이민 가 21년을 살다 3년 전에 한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신아연 수필가의 전작(前作) 《글 쓴 여자, 밥 짓는 여자》를 보면 호주 이민생활의 삶과 애환이 잔잔한 필치로 잘 그려져 있지요.
저는 신아연 수필가를 만나면서 “왜 호주에 21년이나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궁금했었지요. 그렇지만 차마 물어보질 못했는데, 신아연씨는 자유칼럼그룹 등에 기고하는 글에서 자신의 삶의 애환을 숨김없이 밝힙니다. 이혼하고 돌아온 것이지요. 이혼한 여자가 21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일 텐데……. 그래서 신아연 씨는 글에서 자신이 조선족으로 오해받던 이야기도 합니다. 신아연 씨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항상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습니다.
그래도 21년을 살았으면 이미 호주가 고향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런 삶의 터전을 박차고 여자 혼자 이제는 낯선 곳이 된 고국으로 돌아와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신아연 씨가 고국에 돌아와 제일 보고픈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역시 자식들이겠지요? 그래서 신아연 씨는 책의 첫 시작에 사랑하는 두 아들 진원과 규원을 생각하며 이 책을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책을 여는 말 마지막도 다음과 같이 매듭을 짓습니다. “가슴 한편에는 멀리 호주에 있는 사랑하는 두 아들 진원이와 규원이를 아프게 담고 있습니다. 부모가 둥지를 헐어 버림으로써 비록 성인이라 해도 돌아갈 보금자리를 잃은 두 아이들을 위로하며 이 책을 전합니다.” 이제 보니 블로그도 ‘blog.naver.com/jinwonkyuwon’이라고 하여, 두 아들의 이름으로 블로그 이름을 쓰고 있네요. 신아연 씨가 가끔은 두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지을 때도 있으리라 생각하니, 저도 마음이 애틋해지네요.
책은 공감, 배려, 동행, 상생의 4 부분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개의 수필만 언급해볼까요? ‘나의 모교 방문 낙망기’에서는 거의 30년 만에 모교인 이화여대를 방문하고 후배들에게 실망하고 낙망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한 세대 가까운 차이가 나는 자식 같은 후배들 틈에 섞여 들어선 교정, 그 형언할 수 없는 낯섦과 이질감이라니……., 한 발 한 발 떼 놓을 때마다 서걱대며 불편하던 마음이 당혹감으로 변하고 속에서 어기대던 어색함은 이내 황망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변해도 너무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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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에 개있다》 지은이 신아연 씨 |
신아연 씨는 대학 곳곳이 장사치들의 난장이 된 현실에 서글퍼하고, 폐쇄된 광장 자리에 새로 올린 건물에서는 성경에 묘사된 ‘회 칠한 무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이대학보>에서 대학생의 절반은 1년 내내 도서관에서 단 한 권의 책도 대출하지 않는다는 글을 보고 변해버린 후배들에게 실망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느끼는 혼란의 정체를 ‘대학 문화의 총체적 상실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지옥을 언제까지’라는 글에서는 자신의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을 다시 읽어보다가, 아래와 같은 문장에 가슴이 ‘쿵’ 내려앉고 팔에 ‘오소소’ 잔소름이 돋았다고 합니다. “사고와 비리가 끊이지 않는 불안한 한국을 떠나고자 이민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최근 많아졌다고 한다.
이민이 능사는 아니지만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 내 나라를 등질 결심을 한다니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신아연 씨는 이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1년 단위로 변하는 한국이 하필이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한 것이 하필 ‘사고와 비리’냐며 개탄하면서 다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찬란하고 황홀한 물질 세례와 사치와 현란과 은성한 불빛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지는 조국에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삶’은 왜 정착되지 않는지, 아니 오히려 더 후퇴하고 있는 현실에서 도대체 누구를 붙잡고 따져 물어야 할지 참으로 갑갑하고 답답합니다.”
그러네요. 저도 이 수필을 읽으면서 세월호를 떠올리며 이런 점이 변하지 않는 한국의 모습이라니 갑갑하고 답답한 심정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수필집의 제목이 된 ‘내 안에 개있다’라는 글을 볼까요? 이 글에서 신아연 씨는 주인이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는 동안 마트 입구 기둥에 매어놓은 개들을 관찰하고는 개들을 네 가지 부류로 분류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주인이 자리를 뜨기 무섭게 낑낑 신음을 하고 온몸을 발발 떨어대며 불안과 초조로 일관하는 개, 두 번째는 주인이 등을 돌리자마자 주인이 오거나 말거나 지나는 사람들에게 아양을 떨며 발랑 누워 좋아 죽겠다는 녀석, 세 번째는 숫제 바닥에 드러누워 태평스레 잠을 자는 놈들, 마지막 네 번째는 일편단심ㆍ초지일관 자세 한 번 흩뜨리지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 돌아올 주인을 준비된 믿음으로 기다리는 흔치 않는 부류.
신아연 씨는 이렇게 개들을 관찰하고는 ‘개 주인’을 ‘하느님’으로 설정하고, 자신을 ‘개’로 쳤을 때 자신이 어느 부류, 어느 위치에 있는지 반성을 해봅니다.
“‘두 번째 부류의 개’처럼 현실에 취해 이 세상이 전부이고 물질에 이끌려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적은 없었지만, ‘첫 번째 개’처럼 삶의 실존적 불안감을 다양한 철학과 신념, 인본주의적 가치관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다 뿌리 없는 나무처럼 쇠락하며 절망에 빠진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 존재의 근원이자 내 지성 너머에 존재하면서 매일매일의 내 삶에 인격적으로 개입하는 절대자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불신앙자는 아니지만 ‘세 번째 개’와 같이 게으르고 나태해서 바싹 깨어 있지 못하는 상태를 지나고 있는 중으로, 바라옵기는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인의 사랑에 송두리째 이끌리는 ‘네 번째 개’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예! 신아연 씨가 그녀의 말대로 ‘네 번째 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신아연 씨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 가운데 하나는 신아연 씨가 참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솔직함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신아연 씨는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악의적으로 욕설을 해대는 사람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포털 변소, 싸지른 댓글’에서는 그런 경우를 당하고 난 후 쓴 글입니다.
“‘변소’가 뭐냐. 똥을 한곳에 모아두는 곳이잖아. 변소가 없다면 똥을 아무 데나 쌀 거 아냐. 감정도 마찬가진 거야. 좌절과 욕구불만을 세상과 타인을 향해 쏟아 부을 데가 있어야 하는 거지. 이유모를 미움과 원망과 울분과 분노와 불만과 시기와 질투 등등 부정적 감정과 화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데 그걸 어디다 배설해얄 거 아니냐고. 똥오줌을 참으면 병이 되듯이. 그러니 ‘감정 변소’가 필요한 거야. 애꿎게도 내 글은 ‘밑씻개’인 거고. 난 그래서 ‘포털 변소’라고 부르는 거야.”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런 악성 누리꾼들 때문에 여리고 고운 심성을 가진 신아연 씨가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그런 악성 네티즌으로 입은 상처를 이렇게 의미 있는 글로서 승화시키는 모습이 아름답네요. 신아연 수필가는 자기 안에 ‘개’있다고 하였는데, 내 안에는 뭐가 있을까? 나 또한 뜬금없는 ‘저것’으로 인해 손에 잡히는 ‘이것’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아연 씨가 던지는 화두를 깊이 곰씹어보며 ‘내안에 개있다’ 책을 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