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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아는 만큼 보인다, 수원 화성을 걸으며

꽃피는 봄이 오면 다시 찾기를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53]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2000년 7월 전근 발령을 받고 수원지방법원으로 왔다. 그때까지 나에게 ‘수원’이라고 하면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 딸기 먹으러 왔던 곳이고, 1982년 수원지방검찰청에서 4달 동안 검사 시보를 하던 곳으로 기억되던 곳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나에게 수원이란 단지 그 정도의 피상적인 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2000. 7. 정말 오래간만에 수원으로 다시 오니, 수원은 예전에 내가 기억하던 그런 도시가 아니었다. 우선 법원ㆍ검찰은 화성 성곽을 빠져 나와 원천동으로 옮겨와 있었다. 예전에 내가 검사 시보를 할 때, 이곳은 그냥 한가로운 농촌의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화성 성곽은 대부분 복원되어 있었고, 그것도 단순히 복원만 된 것이 아니라,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까지 되어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니?” 그 전까지 내 고정관념으로는 문화유산이란 오래된 유산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딸기 먹으러 올 때만 하더라도 수원 화성은 여기 저기 성곽이 허물어 있었지 않은가? 내 기억에는 허물어져 있던 구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18세기 말에 축조한 성곽이, 그것도 현대에 와서 복원한 성곽이 어찌 세계문화유산까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잠시 그런 물음만 떠올렸을 뿐, 그런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수원지방법원 판사들이 단체로 수원 화성 성곽을 따라 걷는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김동건 법원장님이 먼저 화성 성곽을 돌고난 후, 이런 세계적인 문화유산은 판사들도 알아야 한다며 단체로 수원 화성 성곽 돌기를 제안하신 것이다. 그러자 수원시에서도 일부러 문화유산 해설사를, 그것도 판사들 인원수를 감안하여 적절한 수의 해설사들을 보내주었다. ​

 

​조별로 성곽을 따라 도는데, 해설사가 한 곳이라도 놓칠세라 열정적으로 해설을 한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 때 나는 비로소 수원 화성이 왜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화성의 진면목을 조금씩 깨치게 되었다. 화성은 현대에 많은 구간을 새로 복원한 것이지만 정조가 처음 축조하였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화성성역의궤라는 설계도이다. 설계도가 완벽하게 남아 있으니, 설계도만 따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설계도를 따라 원형 그대로 복원할 수 있는 성곽은 세계에서도 흔치 않다고 하였다. ​

 

​그것뿐인가?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축조 기간 동안 동원된 인부, 자재 등 세세한 공사일보가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화성 축조에 관한 각종 공문서 등 화성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러니 이를 바탕으로 복원된 수원화성은 우리 몸이 끊임없이 새로운 세포로 갈아치워도 여전히 우리 몸이듯이, 수원화성도 여전히 정조 시대의 그 수원화성인 것이다. 그러니 수원 화성이 그때까지 동양 성곽의 특징과 기능이 집약된 축성술의 결정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점도 중시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설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듣는 수원화성의 이야기는 놀라움과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치성(雉城)’이란 성벽 용어가 꿩(雉)이 제딴에는 숨는다며 머리를 구멍에 틀어박고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고 지은 것이라는 사실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치성을 성곽 여러 군데에 배치할 때에도 경계를 설 때나 적의 공격을 방어할 때에 사각(死角)이 없도록 과학적으로 배치한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몰랐던 것을 알게 된 기쁨과 감탄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

 

​해설사는 창룡문에 와서는 성벽에 새겨진 글자를 가리키며 공사 실명제를 얘기한다. 자기가 건축을 맡은 부분은 떳떳이 자기 이름을 밝힘으로써 자기 책임감도 나타내는 선인들의 자세! 우린 그 후 이런 공사 실명제의 정신을 잃어버려 삼풍백화점이 힘없이 주저앉고 성수대교가 맥없이 한강으로 무너져 내린 것은 아닌가? 방화수류정에 올랐을 때 해설사는 방화수류정 벽의 십자가 모양 벽돌을 가리키면서, 서학을 통해 천주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정약용이 화성 설계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넣었을지도 모른다는 재미있는 야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정조 대왕이 훌륭한 임금이라는 것은 그 전에도 알았지만, 해설사의 입을 통해 정조 대왕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 정조는 하루 빨리 화성을 짓고 싶었지만,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더 앞서 있어 혹서기와 혹한기에는 공사를 쉬게 하였단다. 뿐만 아니라 더위에 지친 인부들에겐 척서단(滌署丹)을 먹이게 하였고, 왕조국가라고 무조건 백성들의 노동력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한 만큼 보상을 주는 성과급을 지급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백성들을 몰아치지 않고도 애초 10년으로 예상하였던 공기를 34개월로 대폭 단축시킬 정도였고...

 

수원 화성에 이러한 이야기가 숨어 있었단 말인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 날 이후 수원 화성은 나에게 전혀 새로운 존재로 다가왔다. 그 후 나는 새로 알게 된 수원 화성을 좀 더 알아보고자 나 혼자 다시 돌아보았다. 또한 그 다음번에는 수원 화성에 대해 쓴 책자를 읽어보고, 아예 그 책자를 들고 또 돌아보았다. 그런가 하면 달밤에 화양루(서남각루)에서 바라보는 달빛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보름달이 떴을 때 화양루에서 어슬렁거려 보기도 하였다. ​

 

​그리고 이런 수원 화성을 축조한 정조 대왕과 정조의 효성으로 인하여 수원을 ‘효원의 도시’로 일컫게 한 사도세자의 능을 보고 싶어서 융릉과 건릉도 돌아보았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원찰로 중건한 용주사도 들러보았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융건릉을 돌아보고나서는 차를 지지대 고개로 돌렸다. 그리고 지지대 고개 위에서 이제 이 고개를 넘으면 사도세자의 능을 볼 수 없어 발걸음이 느려졌다는 정조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하였다. ​

 

​한 번 돌면 전에 몰랐던 것이 보이게 되고, 다시 한 번 도니 또다시 숨겨져 있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아는 만큼 보이고, 또 보이게 되면 사랑도 하게 된다고 하던가? 나는 지인들을 만나면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수원 화성에 대해 얘기해주곤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수원 화성이 어떻게 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는지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내가 설명을 해주니 그때서야 그러냐며 놀라워하면서 한 번 보러 가야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 화성을 주위 지인들에게 직접 눈으로 보여주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지인들을 수원 화성으로 불렀다. 그리고 내 자신이 짝퉁 해설사가 되어 수원 화성을 돌면서 아는 만큼 설명을 해주었다.

 

수원화성은 어디서든지 성벽으로 올라가 한 바퀴 돌 수 있겠지만, 나는 지인들을 초청할 때는 주로 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올라 장안문 쪽으로 돌았다. 성벽을 따라 돌면서 나는 지인들에게 설명을 한다. 팔달산 서장대에서는 “수원 화성이 버들잎처럼 생겨 유엽성(柳葉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화성을 축조할 때에 이미 먼저 터 잡고 살고 있던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정조의 배려가 수원 화성을 버들잎 모양으로 변형되게 만든 것이다.”라는 얘기도 한다. ​

 

​수원 화성의 대표미인 방화수류정에 올라서는 “화홍문(북수문)의 일곱 홍예로 물이 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가리키며, 비가 많이 왔을 때 광교산에서 힘차게 내려온 물이 저 홍예를 빠져나오면서 공중으로 물보라를 퍼뜨리는데, 이를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8경의 하나로 친다.” 또한 성벽 바깥의 못을 내려다보면서는 “저 용지(龍池)에서 달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용지대월(龍池待月)이라 하여 이 또한 수원8경의 하나로 친다”라고 얘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성벽을 따라 돌다보면 동남각루에서 내려와 수원천을 건너면서 성벽 일주를 마치게 된다. 수원천을 건너면 지동시장이다. 지동시장에 오면 나는 지인들을 데리고 시장 내의 순대타운으로 안내하였다. 순대집은 지인들의 입맛을 만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내 주머니 사정도 배려해주기 때문이다. 사실 나를 순대집으로 인도한 것은 김동건 원장님이다. 원장님은 먼저 수원화성을 돌 때, 이곳 지동시장의 순대집을 찾았다. 그 후 이를 알게 된 기자가 신문에 기사를 실으면서 기사 제목을 ‘원장님이 지동시장을 찾은 까닭은?’이라고 달았다. 후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패러디 한 것이리라. 그 뒤 그 순대집은 이 기사를 스크랩해서 식당 벽에 걸어놓았는데, 지금도 그게 그대로 걸려있는지 모르겠다.

 

순대를 먹으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짝퉁 해설사의 소임을 한다. “여러분도 수원천을 건너면서 의아해 하셨겠지만, 이곳 남수문은 아직 복원이 안 되었다. 그리고 남수문에서 팔달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이 이곳 지동시장을 지나는데, 보시다시피 이 또한 복원이 안 되었다. 성벽을 복원하려면 이곳 지동시장 문을 닫아야 할 텐데, 많은 시장 상인의 생계가 달린 문제라 쉽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지동시장과 팔달문을 연계해 한 가지 설명을 더 해준다. “『지동(池洞)시장』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지반이 무른 곳이다. 그래서 팔달문도 다른 문보다 더 깊이 기초를 넣어야 했다.” ​

 

​그 후 내가 수원을 떠난 이후에는 그 전처럼 수원 화성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수원을 떠난 이후에도 지금 내가 근무하는 법무법인 로고스의 우리 팀원들을 데리고 수원 화성을 돌았고, 내가 관여하고 있는 이비엠 포럼 회원들을 데리고 또 한 번 돌아보았다. 다시 돌아보니 그사이 내가 수원에 근무할 때는 복원 공사 중이던 화성 행궁도 완공되었고, 그 후 남수문도 복원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수원 화성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져 최근에는 수원 화성이 관광특구로도 지정이 되었다고 한다. 수원 화성을 사랑하는 이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일이다.

 

나에게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됨을 가르쳐 준 수원 화성! 꽃 피는 봄이 오면 다시금 수원 화성을 찾아봐야겠다. 이번에는 누구와 동행하여 수원 화성의 아름다움을 들려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