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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한국의 미, 달빛에 취하고 여백에 취하고

《맛 멋 흥 한국에 취하다》, 정목일, 청조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한국문화의 아름다움, 그것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써진다. 저자는 이런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그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안목을 지녔다. 또,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움을 더없이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필력도 갖췄다. 글쓴이 정목일은 이처럼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과 그것을 표현하는 필력을 두루 갖춘 서정수필의 대가다.

 

그는 197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한국의 아름다움을 곡진히 풀어내는 서정수필을 써왔다. 그래서 펴낸 책도 여럿이다. 《한국의 아름다움 77가지》, 《나의 한국미 산책》에 이어 이번 책 《맛 멋 흥 한국에 취하다》까지, 일상에서 만나는 한국문화의 아름다움을 특유의 섬세한 안목으로 꾸준히 포착해왔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한 송이, 도자기 한 점, 병풍 한 폭에 담긴 지극한 아름다움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1장 ‘한국 문화재의 미’, 2장 ‘한국의 생활미학’, 3장 ‘한국의 춤’, 4장 ‘한국의 꽃’, 5장 ‘한국 계절의 미학’, 6장 ‘달빛 서정’의 여섯 가지 주제로 한국미의 다양한 면모를 두루 보여준다.

 

 

1장 ‘한국 문화재의 미’에서는 달항아리, 백자와 홍매, 고려청자 접시, 나전칠기, 한옥 지붕, 밀양박물관 효도 병풍 등 한국미를 대표할 만한 기물에 대한 저자의 감상을 담았다. 특히 달항아리의 미학을 꽉 찬 보름달의 완벽함이 아닌, 어딘가 약간 비어 있는 듯한 미완의 여운으로 짚어낸 점이 인상적이다.

 

달항아리는 온전한 원형이 아니다. 한쪽으로 약간 비뚤어진 곡선이 흘러들어 더 운치 있고 여유 있다. 좌우대칭의 완전한 곡선이 아니라, 흐름이 굽어져서 흐른 모습에서 더 다감하고 구수한 느낌이 든다. 달항아리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에서 장인의 손길과 마음이 느껴진다. 보름달보다 열나흘 날 달처럼 어딘가 약간 비어 있는듯한 모습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만월(滿月)의 완벽이 아닌 미완(未完)이 주는 여운이다. 앞뒤좌우 빈틈없는 원형이 아니어서 더 정겹고 마음이 간다. 어느 한쪽이 비스듬히 구부러진 데서 진솔한 멋과 소탈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빈틈과 여백이 있기에 보는 이 스스로 마음으로 채워가는 맛을 알게 해준다. (p.17)

 

저자는 한국문화를 햇빛문화보다 달빛문화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햇빛에 쨍하게 드러나는 당당함의 미학보다는 달빛 속에서 은근하고 정갈하게 드러나는 미학, 곧 ‘담백함과 순박함이 마음을 끌어당겨 오래도록 싫증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것이다. 한국문화는 이처럼 달빛, 그것도 꽉 차 넘쳐흐르는 보름달의 달빛이 아닌 조금 부족한 듯한 미완의 달빛이라 오래도록 질리지 않고,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한국미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빛깔을 고르라면 그 또한 달빛을 닮은 은은한 순백색이 아닐는지. 담담하고 수수한 빛깔, 그 달빛을 구현하는 것은 마음을 닦는 구도 행위였고, 그렇게 해서 얻어진 순백색은 깨달음의 빛깔이자 만 년 명상을 담고 있는 영원의 빛깔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무릎을 치게 된다.

 

백자는 화려하거나 눈부시지 않다. 담담하고 수수하다. 대낮의 햇빛이 아니라 한밤중의 달빛이다. 창호지를 바른 문에 투영된 여명(黎明)의 빛깔, 깊은 산중 한옥 마당에 내려온 달빛이다. … 민족마다 도자기에 삼원색을 비롯한 유채색으로 온갖 미의식을 펼쳐냈거늘 우리 민족은 어째서 조선 5백 년간 백자만 빚어온 것일까. 순백색을 향한 끝없는 탐구는 마음을 닦는 구도 행위였다. 우리 민족은 생명의 근원의 빛깔로 백색을 찾아낸 것이며, 그것이 깨달음의 빛깔임을 터득한 것이다. 만 년 명상을 담고 있는 영원의 빛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열리고 맑아지는 순백의 세계가 백자에 담겨 있다. (p.40-41)

 

한국인이 즐겨 마시는 막걸리 또한 달빛과 같은 수수하고 담백한 매력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술이다. 저자는 ‘멋, 맛, 신명의 근원’인 막걸리에는 한국의 물맛과 자연의 맛이 깃들어 있으며, 깨끗하고 맑은 물맛이 막걸리의 바탕이고, 한국의 들판에서 농사지은 쌀맛이 막걸리의 밑천이라고 말한다. 마침 막걸리의 빛깔도 달빛과 백자처럼 하이얀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막걸리는 고두밥에다 잘 뜬 누룩을 물과 함께 버무려 술독에 넣은 다음 온돌방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발효시켜 만든다. 하지만 막걸리는 서양처럼 대단위 제조처에서 상품으로 개발되어 온 게 아니라 사정이 허락되는 집집마다 즐겨 온 가정용 술이다. 가족끼리, 이웃끼리 마시기 위해 만든 술이었기에 재료가 순수하고 맛을 돋우기 위해 잔꾀를 부릴 이유가 없었다. … 피리 소리를 듣거나 장구 장단에 맞춰 춤을 출 때도 막걸리에 취한다. 달빛에 취할 때, 농악에 취할 때, 판소리에 취할 때는 반드시 막걸리를 한 잔 마셔야 흥이 난다. 한국의 멋과 맛과 신명은 막걸리가 내는 흥이요, 꽃이다. (p.69-70)

 

한편, 저자가 밀양박물관에서 열두 폭 병풍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경험도 심금을 울린다. 잠깐 짬을 내어 밀양박물관을 찾았던 그는 ‘밀양12경도’라는 이름을 가진 열두 폭 병풍 앞에서 짜르르한 전율을 느낀다. 그 병풍은 이광진(1517~1566)의 장남 이경홍이 1566년(조선 명종 21년) 당시 지병으로 고생하는 부친을 만든 병풍이었다.

 

이광진이 병을 얻어 거동이 어렵게 되자 효성이 지극한 장남 경홍은 날마다 아버지를 업고 밀양의 12경을 구경시켜 드렸다. 몇 년간 아버지를 업고 지극정성으로 절경을 찾아다녔지만, 이광진의 병세는 점차 심해져 결국 자리에 눕고 말았다. 경홍은 더는 보여드릴 수 없게 된 밀양 12경을 그림으로 그려 아버지를 위로했다.

 

효도병풍을 보고 감동과 회한의 눈물을 흘린 것은 내가 17세에 아버지를 여의기 전까지 단 한 번의 효행도 해본 적이 없는 불효자인 까닭이다. … 내 가친께서 병을 얻어 방에 누운 것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무렵이다. 2학년에 될 때까지였으니 약 1년을 그리 누워 계시다 가셨다. 한 번이라도 아버지를 업고 즐겨 산책하시던 촉석루를 구경시켜 드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 한쪽이 시려온다. (p.53-54)

 

이렇듯 저자의 사부곡(思父曲)을 비롯하여, 오랜 완상 끝에 얻어낸 한국미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대한 저자만의 견해는 독자의 마음도 흐드러진 달빛 속으로 데려간다. 굳이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수필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어 마음이 가는 대로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혹시 아는가. 이 책을 읽고 나면 달빛 휘영청 밝은 밤, 달항아리를 보며 막걸리를 마시는 풍류를 좋아하게 될지. 게다가 완벽하지 않은 것들, 미완으로 남은 것들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면, 이 세상에 허다한 불완전한 존재들도 더 넓은 마음으로 껴안게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