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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나는 아버지의 특별한 딸, 혜경궁 홍씨입니다

《아버지의 특별한 딸》, 박정애, 메멘토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혜경궁 홍씨.

조선에서 이 여인만큼 지극한 영화를 누린 이도 드물 것이다. 아들 정조는 수원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연을 열어 장수를 축원했다. 출궁하여 환궁하기까지 여드레에 걸친 원행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신분을 빼앗기고 폐서인되거나 죽지 않으면 궐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왕실 여성의 신분으로, 이런 식의 외출을 해본 여성은 혜경궁 홍씨가 유일했다. 그해 봄, 혜경궁은 조선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영화로운 날이 있기까지 그녀야 삼켜야 할 울분과 고뇌,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아버지가 남편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했던, 심지어 시어머니와 친아버지가 남편을 죽일 것을 종용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조선에서 가장 기구한 팔자의 여인이 바로 그녀였다.

 

《아버지의 특별한 딸》 지은이는 이런 혜경궁 홍씨의 절절한 아픔과 고뇌를, 그녀가 지난날을 돌아보며 쓴 《한중록》의 각 대목과 함께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지은이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혜경궁 홍씨와 아버지 홍봉한의 관계다.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 – 아버지 홍봉한, 시아버지 영조, 남편 사도세자, 아들 정조 – 이 네 명 가운데 그녀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이는 아버지 홍봉한이고,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이 모든 것을 이겨낸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 홍봉한이 서른이 넘도록 과거에 연거푸 낙방하며 가세가 기울어가던 즈음, 풍산 홍씨 가문을 일으킬 대표선수로 화려하게 등판했다. 아버지가 세자빈 간택에 참여하며 띄운 승부수가 적중한 것이다. 그녀가 세자빈이 된 이후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해 바로 정5품 관직을 제수받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세자의 처가에 힘을 실어주고자 한 영조의 안배였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그녀는 열여덟 살의 나이로 둘째 아들 정조를 출산했다. 첫아들 의소세손이 일찍 세상을 떠난 데다, 아기의 풍채와 골격이 범상치 않고 당당하여 며느리에 대한 영조의 총애는 날로 더해갔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p.38)

내가 어린 나이에 이런 거룩하신 아들을 두고, 갑술년(영조 30년, 1754)에 군주 청연을 낳고 병자년(영조 32년, 1756)에 청선을 또 얻었다. 청연은 기질이 온유하고 너그럽고, 청선은 기상이 단아하고 온화하여 내 손안의 두 구슬이었다. 내 팔자를 누군들 부러워하지 않았으리오.

 

나라를 물려받을 남편, 잘 자라는 아이들, 출세 가도를 달리는 아버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녀의 인생은 남편과 시아버지가 본격적으로 대립하면서 순식간에 거센 풍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왕가의 부자 관계는 여염집과 차원이 다르다. 민가에서야 서로 성격이나 정치에 대한 견해가 달라도 사소한 말다툼으로 끝날 수 있지만, 왕가에서는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수도 있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은 상극이었고, 사람을 편애하는 성향이 강했던 영조는 별것 아닌 일에도 트집을 잡고 온갖 꾸중을 하기 일쑤였다. 사도세자는 처음에는 울화가 쌓이는 정도였으나 점차 화병이 심해져 폭력을 마구 휘두르고 사람을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진 부자지간을 바라보는 혜경궁의 마음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p.47)

영조는 세자가 이렇게 해도 화를 내고 저렇게 해도 화를 냈다. 심지어는 천재지변이 나도 “세자에게 덕이 없어서 그렇다”라고 했다. 그래서 세자는 가뭄이 들거나 겨울에 천둥이라도 치면 또 무슨 꾸중을 들을까 근심걱정으로 마음의 병이 깊어졌다. 지켜보는 빈궁도 간이 타고 애가 말랐다.

 

‘지극히 인자하시고 밝고 총명하신 임금께서 어찌 귀한 아드님 마음에 병이 드는 줄을 모르실꼬. 아드님도 그렇지, 아버님이 설사 좀 과하게 구시더라도 그 우뚝하고 굳센 기품으로 인내하며 효도에 힘쓰면 될 터인데, 어찌하여 그 일을 못 하실꼬. 아아, 애통하고도 갑갑한지고.’

 

감정의 골이 날로 깊어지면서 영조와 사도세자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로 변했다. 왕조시대, 임금과 그렇게 척지는 것은 아무리 아들이라도 살아남기 힘든 일이었다. 기록에 명확하게 남아 있진 않으나, 당시 세자가 공공연히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말하고 실제로 칼을 들고 나선 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제 역모로 몰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세자가 왕위에 오르게 될 가망은 없었다. 이제는 세손 정조가 임금이 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친정 가문은, 사도세자를 버렸다. 적극적으로 구명하지도 않았고 죽는 것을 방관했다. 세손이라도 살리기 위한 대승적인 결단이었을 수 있지만, 이는 정조의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남겼고 정조 즉위 직후 큰아버지 홍인한은 사약을 받는다. 정조는 이후 집권 내내 외가에 남은 앙금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정순왕후의 친정 가문인 경주 김씨가 권력을 잡았다. 친정 풍산 홍씨 가문과 경주 김씨 가문은 정적이었기에 이때 결국 그녀의 남동생 홍낙임이 제거된다. 가문에 대한 애정이 그 누구보다 깊었던 그녀는 친손자 순조가 장성하여 자신의 친정을 복권해 주기를 기다리며, 그간의 일을 《한중록》으로 풀어놓는다.

 

곧, 한중록은 친손자 순조를 위한 ‘풍산 홍씨 가문 변론서’이자, 그간의 일을 혜경궁 홍씨의 시각으로 기술한 사건 진술서이다. 한중록을 쓴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의 친정에 대한 재평가였기에, 그녀는 정조가 자신이 회갑을 맞는 해 친정을 복권해 주겠다고 한 것을 잊지 않고 써 두었다. 비록 정조는 회갑을 3년여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만 말이다.

 

(p.106)

주상께서 갑자년에 모두 크게 풀자 하시기에 내가,

“갑자년이면 내 나이가 칠십일 텐데, 내가 칠십까지 살기도 어렵거니와 혹 살아 있더라도 주상이 오늘 하신 말씀을 어기면 어찌하오?”

하고 불만스럽게 말했더니 주상께서 화를 내셨다.

“설마 칠십 노인을 속이겠습니까?”

 

역사는 오래 살아남는 자, 그리고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의 당사자들이 모두 죽고,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 가운데 붓을 들어 이를 소상히 기록으로 남긴 이는 혜경궁이 거의 유일했기에 그녀는 ‘역사’라는 기억의 전쟁터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한중록을 읽은 덕분인지는 몰라도, 순조는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혜경궁의 동생 홍낙임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당초 정조 때 반포할 예정이었던 홍봉한 문집을 펴내는 등 가문을 복권해 주었다.

 

자신의 어깨에 집안 전체의 존망이 달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여든한 해 모진 세파를 묵묵히 이겨낸 혜경궁 홍씨. 아홉 살 나이에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가문의 대표선수로 궁에 들어간 이후, 그녀의 인생은 행복할 때보다 불행할 때가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되뇌며 이겨내지 않았을까. 나는, 자랑스러운 아버지 홍봉한의 딸이다… 나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로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에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까지, 삶의 파고를 숨 가쁘게 넘나든 그녀의 인생을 작가의 멋진 필력과 함께 만나보자. 아내도, 며느리도, 엄마도 아닌 ‘딸’ 혜경궁 홍씨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