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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칠백의총은 있어도 팔백 승군 무덤은 없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군인도 아니면서 전쟁에 뛰어든다? 지금 같으면 ‘왜? 군인은 어디가고?’ 라는 질문을 바로 하겠지만,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는 군인이 아닌 사람들이 전쟁터에 대거 뛰어들었다. ‘의병(義兵)’ 들이 바로 그들이다. 일본군이 조총 등 신무기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조선강토를 유린할 때 미처 전쟁을 준비 못한 조선의 정규군들은 그들과 정면으로 맞섰으나 연전연패하였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한양(서울) 궁궐에 있던 선조임금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한양을 버리고 북쪽 명나라 경계에 있는 의주로 도망치듯 피난을 가버리고 남은 백성들은 삽시간에 들이닥친 왜군의 총칼에 처참하게 죽어갔다.

 

조선 정규군들의 연전연패 소식에 백성들이 망연자실하던 때, 충효(忠孝)를 삶의 목표로 살아오던 선비들은 무자비한 왜군의 침략에 분연히 일어났다. 이와 더불어 불살생을 가장 큰 계율로 삼으며 수행 정진하던 승려들 또한 가세했다. 정규군 출신이 아니면서도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현실을 직시한 선비들과 승려들이 힘을 모아 왜군과 맞선 결과, 연전연패하던 조선군은  처음으로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게 되었다.

 

그 첫 승리는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난 3달 15일 만인  1592년 8월 1일 청주성 전투였다. 그 여세를 몰아 8월 18일에는 의병장 조헌과 고경명이 이끌던 의병 700명과 승병장 영규대사가 이끌던 800명의 승군이 금산벌에서 왜적과 대 전투를 벌였다.

 

"영규(靈圭)라는 자가 있어 3백여 명을 불러 모으고서 ‘우리들이 일어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나의 군대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니, 중들이 다투어 스스로 앞장서서 모이어 거의 8백에 이르렀는데, 조헌(趙憲)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청주(淸州)를 함락시킨 자가 바로 이 중이라고 합니다." “有靈圭者募得三百餘人曰: ‘吾等之起, 非有朝廷命令。 若有畏死之心者, 勿入吾軍。’ 僧徒爭自先募, 幾至八百, 與趙憲合兵, 復拔淸州者是僧也云。”

 

이는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1592) 8월 26일 기록으로 영규대사는 승병을 800명 모으면서 ‘죽음이 두렵거든 내 군대에 들어오지 마라’는 단호한 의지를 내보였다. 바로 승병(僧兵)들의 대활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조선 의병들이 죽창과 활로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592년 8월 18일, 금산 연곤평 전투에서 조선 의병들은 필사무퇴(必死無退)의 정신으로 적병과 결전을 벌였으나 애석하게도 모두 순절의 길을 걷게 된다.

 

바로 금산 전투가 있던 그 자리에, 조헌 선생의 제자였던 박정량과 전승업 등이 700여명의 의병 시신을 거둬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 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나 이상하다. 이날 전투에서 숨졌던 조헌과 고경명이 이끌던 700명의 무덤은 있는데 영규대사가 이끌던 800명의 승병 무덤은 안보인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역사 속 묻힌 의승 활약 재조명 ‘영규 대사와 8백 의승’>(2016.10.18. 연합뉴스보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날 보도에 따르면, 김상영 교수(중앙승가대 불교학부)는 “임진왜란의 역사에서 영규(靈圭) 대사와 의승 들의 활약은 온전히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역사 속 기록을 발굴해 이들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불교사적 관점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고 했다. 

 

또한 김상영 교수는 “영규 대사와 800명의 의승(義僧)은 칠백의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시신 수습조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역사 속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임진왜란 이후 유생과 관료 중심으로 공적이 왜곡되거나 승병들의 활약상이 누락 되었다. 당시 승려들은 피지배계층이고 국방에 대한 의무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의승을 규합하는 등 전란 역사상 큰 역할을 했다.”라면서 이들에 대한 역사적인 재조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금산칠백의총은 1963년 1월 21일, 국가에서 사적 제105호로 지정했다. 이후 1971부터 1976에 걸쳐 칠백의총 정화사업을 통해, 종용사(사당), 의총문, 취의문 신축, 순의비(일제가 훼손한 것을 복원), 순의비각 신축 등 대대적인 정비에 들어갔다. 1999년에는 대통령령으로 (제16347호)로 칠백의총관리소의 직제 개편을 하였으며 충남 금산군 금성면(의총길 50) 180,646제곱미터(54,741평)의 규모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사적지다.

 

임진년에 일어난 침략전쟁, 임진왜란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새기고 있는 가슴 아픈 전쟁의 역사일 것이다. 비록 왜적에 졌지만, 나라를 지키려던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은 우리 겨레의 가슴에 영원한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며칠 전 둘러본 금산칠백의총은 숭유억불(崇儒抑佛,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던 일)시대에 일어난 전쟁이라 유생들의 업적(?)에 견주어 승병들의 활약에 대한 기록이 일천하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 아쉬웠다.

 

 

 

 

 

 

 

*칠백의총은 금산칠백의총으로 변경됨(2011.07.28 고시)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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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