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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김덕령과 송구봉, 조선의 아까운 두 천재

《조선의 영웅 김덕령》, 신동흔 글, 김용철 그림, 한겨레아이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임진왜란 때 중히 쓰였으면 어땠을까 싶은 인물이 둘 있다. 바로 이 책 《조선의 영웅 김덕령》의 주인공인 김덕령과 송구봉이다. 조선 중기의 걸출한 인물이었던 둘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눈과 신분의 굴레에 매여 높은 뜻을 못다 펼친 채 스러져갔다.

 

 

솔직히 역사에 밝은 이에게도 김덕령과 송구봉의 이름은 생소할 법하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그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우고도 반란 수괴 이몽학을 도왔다는 죄명으로 모진 국문을 받다 순국했고, 율곡 이이의 절친한 벗이었던 송구봉은 율곡을 능가하는 천재로 이름이 높았으나 미천한 출신 때문에 출사하지 못하고 재야에 묻혀 지냈다.

 

지은이는 먼지를 덮어쓰고 박제되어 있던 두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들은 둘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선이 많았던 덕분인지 유난히 전설과 설화가 많다. 이런 이야기들을 얼기설기 엮어낸 지은이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전우치가 족자에서 뛰어나온 것처럼 두 사람이 책 밖으로 걸어 나올 것만 같다.

 

광주 무등산 기슭에서 태어난 김덕령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다. 전설에 따르면 중국 지관이 무덤을 쓰려고 점찍어둔 자리에 김덕령의 부모가 무덤을 쓴 뒤로 그 명당의 정기를 받아 천하 준재인 김덕령이 태어났다. 김덕령은 자라면서 더욱 총명하고 무예가 빼어나 모두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무등산 장사’였던 김덕령에게 의병을 이끌어줄 것을 청했다. 그는 아버지의 상중이라는 이유로 거듭 거절했지만,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의병장으로 신출귀몰한 활약을 펼쳤다.

 

김덕령이 세운 눈부신 전공은 선조 임금의 귀에도 들어갔다. 선조는 시기와 의심이 많은 임금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김덕령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의병장 이몽학의 반란에 김덕령이 연루되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

 

목숨을 노리는 수많은 왜적의 칼날도 피한 김덕령은, 그렇게 자신이 지키려 애썼던 나라의 임금에게 죽임을 당했다. 토사구팽도 그런 토사구팽이 없었다. 이 참극을 지켜본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이놈의 나라, 지켜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P.66-67)

김덕령이 죽임을 당한 사실은 나라 안에 쫙 퍼졌어. 의병과 백성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의 통곡을 터뜨렸지. 나라와 백성을 구해야 할 조정 신하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내걸고 싸우던 장수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어? ...(가운데 줄임).... 그때 만약 김덕령이 죽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김덕령의 전설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전쟁이 훨씬 빨리 끝났을 거라고 말하곤 한단다.

 

조선의 숨은 천재로 알려진 송구봉 또한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다. 율곡 이이에 필적할 만한 식견과 혜안을 갖추었지만, 서얼이었던 탓에 과거를 보아 출사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이를 데 없이 영특하고, 특히 눈빛이 유난히 밝고 강해 어른들도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였다.

 

전설에 따르면 구봉은 어느 날, 율곡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자신이 평소 타고 다니는 소를 타고 가다 보면 목적지에 이를 것인즉, 나라의 국운이 걸린 편지 한 통을 꼭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축지법을 쓰는 소를 타고 어느새 금강산에 다다른 율곡은 벼랑길에서 한 젊은이를 만났다. 바로 송구봉이 중간에 만나거든 꼭 같이 가라고 당부했던 젊은이였다. 두 사람은 소와 말을 타고 험준한 산길을 올라, 마침내 신선이 사는 세계에 이르렀다.

 

(p.94)

율곡은 소매 속에서 구봉이 써 준 편지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어. 노인은 편지를 다 읽고서 다른 노인들에게 보이면서, “이거 문곡이 보낸 편지구먼.” 하는거야. 그 말에 율곡은 비로소 구봉이 문곡성의 정기를 받은 인물임을 깨달았어. 옛말에, 문곡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면 큰 학자가 된다고 하지.

“그래, 문곡이 뭐라 적었는가?”

“앞으로 조선에 닥칠 왜란을 막아 달라는구먼.”

“그거야 정해진 운수인 걸 우리가 어쩐단 말인가?”

“나라에서 구봉이나 김덕령 같은 인재를 쓰면 몇 년 안에 전쟁이 끝나련만...”

“이러면 어떻겠나? 왜란을 15년에서 7년으로 줄여준다면?”

“그게 좋겠군. 아무래도 7년 정도는 어쩔 수가 없어.”

 

이리하여 조선은 7년간의 왜란을 겪게 된 것이었다. 율곡이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젊은이는 바로 이순신이었다. 그리고 신선들이 젊은이에게 건넨 종이모형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거북선 모형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이는 송구봉이 신령하리만치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율곡 이이의 천거로 선조 앞에 나아가 자신의 역량을 입증해 보이기도 했으나, 신분이 미천한 자를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 여론에 밀려 끝내 뜻을 펼치지 못했다.

 

(p.114)

오늘날까지도 시골의 노인들은 송구봉에 관한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려주지. 이야기 뒤에는 꼭 이렇게 덧붙이고는 한단다. “그때 그 어른이 나랏일을 맡았으면 그까짓 왜놈들 단번에 쓸어버렸을 거야.”

 

그렇다. 어쩌면 두 사람을 중히 썼더라면 임진왜란은 훨씬 더 빨리 끝났을지도 모른다. 인재가 있어도 신분에 얽매여 쓰지 못하고, 인재를 두고도 역심을 품을까 날개를 꺾어버렸던 조선. 비단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조선 땅에서 얼마나 많은 인재가 억울하게 스러졌는지를 생각하면, 이 땅의 백성들이 겪었던 무수한 고초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김덕령이 그리 처형되고 나서, 조선의 백성은 의병장이 되어 나라를 위해 싸워도 수가 틀리면 개죽음을 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어쩌면 병자호란 때 임진왜란 때만큼 의병이 모이지 않았던 것도 그런 경험에서 우러난 깨달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옥사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곽재우도 그 이후 조정에 환멸을 느끼고 은거하며 지냈다.

 

아까운 두 명장, 김덕령과 송구봉을 되살려낸 이 책을 계기로 두 사람에 좀 더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관련 기사나 문헌을 찾아봐도 좋겠다. 두 사람을 자세히 다룬 책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이 책은 두 사람을 처음 알아갈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