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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슬슬 거니는 한국의 아름다운 산책길

《슬슬 거닐다》, 글 박여진, 사진 백홍기, 마음의숲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슬슬 거닐다》

‘숨어있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책길 34곳’이라는 부제처럼, 아름다운 산책길을 걷고 싶을 때 보기 좋은 책이다. 어디론가 바쁘게 가야 하는 일상, 그 일상을 내려놓고 ‘슬슬 거닐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이 책 《슬슬 거닐다》은 번역가이자 작가인 지은이 박여진이 월간지 기자이자 사진가인 백홍기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곳을 두루두루 찾아다닌 기록이다. 이들의 발걸음이 아니었다면 쉬이 몰랐을 주옥같은 명소들이 유려한 문체로 소개되어 있다.

 

 

대표적인 곳이 문경 고모산성이다. 산성을 걸어본 이라면 한편으로는 그 촘촘한 짜임새에, 한편으로는 이제 부질없어져 버린 산성의 튼튼한 기능에 알 수 없는 감회를 느꼈을 법하다. 지은이 또한 그랬다.

 

(p.225)

성곽길에는 특유의 결연함이 있다. 촘촘히 올라간 돌 마디마다 조금의 허술함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견고함이 느껴진다. 높은 곳에서 강이나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위엄도 근사하다. 다만 활과 포를 쏴 필사적으로 막아야 할 적이 없는 이 시대의 나른함과 성곽의 결연함이 잘 어울리지 않을 뿐이다.

 

‘비장할 필요가 없어진’ 고모산성은 이제 슬슬 거닐기 좋은 산책로가 되었다. 그녀는 ‘구식이 된 성벽은 유순해질 대로 유순해져’ 꽃도 피우고, 결연함을 침범하는 이들도 순순히 받아준다며 따뜻한 시선을 건넨다.

 

성곽길은 ‘토끼비리’라 불리는 오솔길과 연결된다. 토끼비리는 태조 왕건이 진군하다 이 숲길에서 길이 막히자, 마침 그곳을 지나던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길을 찾아 다시 진군할 수 있었다는 설화에서 나온 이름이다.

 

구례 천은사도 이 책이 알려주는 숨은 명소다. 지은이는 ‘뜸을 들인 뒤 만나야 좋은 길’이 있는데, 구례 천은사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을 통과해 단도직입적으로 만나는 천은사보다, 둘레길을 돌고 아늑한 숲길을 지나 충분히 뜸을 들인 뒤 만나는 천은사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p.316)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년에 인도의 승려 덕운 스님이 창건할 고찰이다. 뒤쪽으로는 맑은 소나무 숲길이, 앞으로는 부드러운 호수 둘레길이 있다. 사찰 옆으로 청류계곡이 흐르고 그 물살 위로 오랜 세월을 늙어온 정자, 수홍루가 있다. 아치형 돌다리 위에 고아한 자태로 올라간 수홍루 옆으로 숲이 시작된다. 천은사 앞 호수에는 지리산의 능선과 구례의 하늘이 가만히 담겨있다. 그 호수 둘레로 조용한 산책로가 나 있다.

 

비단 천은사로 가는 길뿐만 아니라, 인생길도 그런 게 아닐까. 일주문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어도 천천히 돌아가는 것, 쉬운 길을 택하기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운치 있는 길을 택하는 것도 아름다운 선택이 아닐까.

 

책에 담긴 유려한 문장과 미려한 사진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의 숨겨진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 아름다움을 완상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슬슬 거닐다》, 글 박여진, 사진 백홍기, 마음의숲,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