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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성실함을 몸으로 가르쳐 준 성창순 명창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53]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성창순 명창이 뇌졸중 초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도 제자들과 약속된 수업일시나 공연 일정, 그리고 공부의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고자 노력한 사범이었다는 점, 어연경은 선생의 병원 출입이 잦았던 관계로 선생의 주민번호를 아직도 정확하게 암기하고 있다는 점, 병원을 다녀온 스승은 곧 제자들과 소리공부를 한다는 점, 이와 함께 제자들의 대학 진학이나 그들의 성장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앞에서도 잠시 말한 바 있지만, 어연경은 그의 스승, 성창순 명창의 병원 출입이 잦아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스승의 주민번호를 정확하게 암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병원에 가게 되면, 환자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주민번호 등을 확인하게 되는데, 어연경은 스승의 주민번호를 확실하게 암기하고 있었기에 각종 서류 작성이 쉬웠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본인의 번호는 기억한다고 해도 가족의 번호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기 마련인데, 어연경이 스승 성창순 명창의 주민번호를 확실하게 기억한다는 사실은 이들의 관계가 보통이 아님을 알게 만든다.

 

 

2003년, 그의 스승, 성창순 명창이 뇌졸증 초기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어연경은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은 당시 반포에 있는 <김화 내과>를 주로 다니셨지요. 그다음 종합병원으로는 <서울성모병원>이나, <목동 이대병원>, <인천 국제성모병원>, 등 필요에 따라 여러 병원을 모시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싸스나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이 돌 때도 선생님 모시고 병원에 다녔는데, 병원을 다녀오신 뒤, 제자들과의 소리 공부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거예요. 저희는 좋지만, 피곤해지신 선생님은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겠습니까? 보통 분이 아닙니다.

 

제가 둘째딸을 출산한 해였으니까, 2012년이었습니다. 선생님 연세가 80이 다 되시니까 점차 병원 모시고 가는 횟수가 늘어나는 거예요. 하루하루 겁이 나기 시작했어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주 선생님 댁을 갔지요. 가서 만약의 일을 생각해서 대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다른 제자들의 소리도 듣지요. 하루 종일 다른 제자들의 소리를 계속 듣고 있으면, 귀가 밝아지는 좋은 점도 있고요, 스스로 소리를 비교해 가면서 고쳐 나가는 공부도 되지요. 또 때로는 선생님에게 한복 동정 다는 법이라든가, 또는 모시 한복 풀매기는 법, 등도 배울 수 있어서 좋았어요.”

 

2014년, 어연경은 단국대학교 국악과로 편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7살, 3살, 두 딸을 키우던 34살 먹은 사람이 새롭게 학부 3학년의 대학생이 된 것이다. 10년 이상 젊은 학생들과 함께 대학생이 되었다는 점이 그에겐 너무도 큰 기쁨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본인보다도 어연경의 편입학을 좋아하고 환영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성창순 명창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제자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을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알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옛일들이 있어 잠시 소개하고 넘어간다.

 

《국립국악원》에 부설되어 있던 <국악사양성소>는 1955년에 개소되었지만,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라는 이름의 정규 고등학교로 개교하게 된다. 당시 글쓴이는 이곳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새로운 교과과정에는 공통과목으로 성악 1과 2가 개설되었는데, 성악 1은 가곡을 위시한 정가가 주로 교수되었으며, 성악 2에는 민요와 단가, 판소리 과목 등을 가르치고 있었다.

 

각 과목의 강사로는 정가에 전효준, 민요는 이창배, 그리고 판소리에는 박동진 등이 출강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동진의 뒤를 이어 젊은 소리꾼, 성창순이 담당 강사로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성창순 강사는 당시 40대 초반의 젊은 선생님이었는데, 재미있게, 그리고 열성을 다해 판소리를 지도해 주신다는 점과 결강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어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글쓴이는 《국립국악고등학교》 말고도 청주사대에도 출강하고 있었다. 1980년 10월 23일 청주문화원에서 열린 제22회 충북예술제의 하나인 제4회 <전통문화의 밤>에서는 성창순 명창을 초대해 <판소리 춘향가 감상회>를 열게 되었다. 성창순의 창과 함께 김동준의 북이 호흡을 맞추었고, 서한범의 해설이 곁들여져 많은 참석자를 감동시킨 무대였다고 평가되었다.

 

그 뒤, 83년도에 글쓴이는 단국대학교 국악과의 창설과 함께 초대 학과장으로 부임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나는 판소리를 전공하는 학생들의 지도 강사로 성창순 명창을 모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까닭은 실기의 능력과 함께 성실함을 몸으로 실천해 온 분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았던 것이다.

 

기억에 당시 수업을 받던 전공 학생들 가운데는 중앙대 교수와 학장을 지낸 김성녀, 국립창극단의 허종렬을 비롯하여 문화 예술계 곳곳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예술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하고 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