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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가는 길 ‘문명 보고서’

백이ㆍ숙제 무덤에서 제례를 지내다

닫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가는 길 ‘문명 보고서’ 7

[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 열하일기를 따라서, 답사 6일 차

일자 : 2025년 4월 23일(목요일), 이동 거리 383km

숙박 : 북경금봉대주점(北京金凤大酒店 010-8459-6363)

 

우리가 묵은 리조트식 호텔은 북대하(베이다이허) 지역으로, 해변이 은모래로 발해만에 길게 뻗어 있는 중국 가장 큰 여름 휴양지이며, 해마다 베이다이허에서 양회와 같은 정치 행위가 열리는 곳입니다. 식사 뒤 호텔 부근 해변에 있는 진시황이 방문했던 작은 포구를 찾아갔습니다. 소문대로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져 있었는데, 저는 늦잠을 자서 해변 산책을 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노룡두와 산해관

 

노룡두(老龙头)는 발해만으로 연결되는 만리장성 끝으로, 바다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랑합니다. 산해관 장성(山海关长城)을 찾아갔습니다. 이곳부터 관외 지역과 관내 지역으로 나뉘며, 북경까지 순탄한 도로가 건설되었습니다. 당 태종은 안시성에서 양만춘이 쏜 화살을 눈에 맞고 도망쳐 이곳에 와서야 안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작년 실크로드 답사 때 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광화문)을 찾았는데, 올해 동쪽 끝인 산해관을 답사하니 감격스러웠습니다. 중국 최대 관광지답게 인산인해를 이루어 놀랐고, 성의 규모와 크기에도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누각 현판에는 큰 글자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이곳에 조선 사신들이 묵었던 조선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암이 이곳을 통과할 때 엄격한 검문이 있었다고 기록했지만, 지금은 문을 막아두고 얼굴 인식과 여권 대조를 통해 돈을 받는 데 열심입니다.

 

《열하일기》에는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요, 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또 벼슬살이도 이와 같아서 바야흐로 위로 자꾸만 올라갈 땐 한 계단이라도 남에게 뒤떨어질세라 혹은 남을 밀어젖히면서 앞을 다툰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암이 “아아, 슬프다. 몽염(蒙恬)이 장성을 쌓아서 되놈을 막으려 하였건만 진(秦)을 망칠 호(胡)는 오히려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서중산이 이 관을 쌓아 되놈을 막고자 하였으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서 적을 맞아들이기에 급급하였다”라고 한탄하며 명나라의 멸망을 기록하였습니다.

 

 

 

백이ㆍ숙제 무덤의 흔적을 찾아서

 

영평성 이제묘(伯夷叔齐墓, 永平府古城遗址望京门, 箕子朝鲜)는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백이·숙제 두 분 형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 굶어 죽었습니다. 연암은 1780년 7월 25일, 영평부의 이제묘에서 고사리를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저는 이곳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영평부를 17년 만에 다시 찾아왔는데, 아쉽게도 성 주변에 도로가 생기고 이제정(夷齐井) 비석, 이제 고리 석판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성안 주민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이제 고리에 관하여 아는 사람이 없어 결국 성을 둘러본 후 옹성 안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열하일기》에 “난하(灤河) 기슭에 자그마한 언덕을 ‘수양산(首陽山)’이라 하고, 그 산 북쪽에 조그만 성이 있으니 ‘고죽성(孤竹城)’이라 한다. 또, 영평도 역시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접한 곳에 새로 조성된 고죽문화공원(孤竹文化公园)도 둘러보았습니다.

 

산서성 영제시의 백이ㆍ숙제 묘…?

 

2023년 11월 26일(일요일) 산서성 영제시 답사 시에 백이ㆍ숙제 무덤(伯夷叔齐墓, 山西省 永濟市 首阳乡长旺村南山1公里)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저의 기록을 보면 “도로에 주차하고 농로를 60m쯤 들어가니 과수원 한가운데 잡풀이 무성하고 반쯤 무너진 묘 2기가 토성 아래에 있다. 길 입구에 있는 표석으로 이제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답사회는 2007년 8월 화북성 난하 유역 지금의 진황도시 노룡현 영평부 고려성에 있는 백이·숙제 묘를 답사 하여 나무로 세운 표석을 보았는데, 이곳에 또 있다니 어느 곳이 진짜 수양산(首陽山) 인가 궁금하다. ‘이’와 ‘제’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자로 동이족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저는 두 곳을 모두 답사하였는데, 어느 곳이 '진짜' 수양산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두 지역 모두 백이ㆍ숙제의 고결한 정신을 기리는 장소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백이ㆍ숙제 제사 제문

 

維歲次 乙巳年 四月二十四日

영평성 이제묘(夷齊廟) 앞에서 고죽국의 절의로운 두 성현 백이(伯夷)ㆍ숙제(叔齊)를 기리며, 열하일기 답사단 대장 안동립은 삼가 고하나이다. 두 분께서는 은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도 도리를 지키시고, 끝까지 군신과 형제의 의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백이 공은 부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를 사양하셨고, 숙제 공은 형을 따라 나라를 떠나시니, 의를 중히 여긴 뜻이 천하에 빛났습니다.

 

주 무왕(周 武王)이 나라를 치려 하자, 장례도 마치지 않은 채 칼을 드는 것은 효도도 아니요, 임금을 치는 것은 인(仁)이 아니라고 막으셨으니, 올곧은 정신은 시대를 초월해 전해집니다. 끝내 두 분께서는 새 왕조의 곡식도 입에 대지 않으시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며 절개를 지키다 돌아가셨습니다.

 

공자께서도 《논어》에서 “진정 인을 행한 자들”이라 높이 칭하셨습니다. 이에 저희 열하일기 답사단이 맑은 물로 손을 씻고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여 진설하오니, 백이 공과 숙제 공께서 이 미약한 정성을 받아주시고, 두 분의 인과 의의 정신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이들의 마음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저희 스물네 명은 연암 박지원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실사구시와 절의의 정신이 이 시대에도 이어지도록 널리 흠향하시기를 삼가 원하옵니다.

伏惟

尚饗

 

백이ㆍ숙제 제사 제례

 

1. 집례 : “자리를 정돈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고죽국 두 성현 백이ㆍ숙제 공을 기리는 제례를 올리겠습니다. 모두 정숙하며 공수 자세로 서 주십시오.”

2. 초헌례 : “먼저 초헌례입니다. 초헌관 안동립 대장께서 첫 잔을 올리신 뒤, 독축관 최성미 선생의 축문을 부복하여 받들겠습니다.”

→ (초헌관 나아가 → 잔 올림 → 부복)

→ (참석자들은 국궁: “모두 경건히 국궁 자세로 서 주십시오. 독축 낭독 시작”)

3. 독축 (최성미) 종료 후 : “이제 초헌관께서 두 번 절을 올리시겠습니다.”

→ (초헌관 공수 1, 배 2, 흥)

→ 초헌관 자리로 복귀

4. 아헌례 : “다음은 아헌례입니다. 아헌관 이우헌 선생께서 먼저 나아가 잔을 올리신 후 절을 올리시겠습니다.”

→ (잔 올림 → 공수 1, 배 2, 흥)

→ “이제 아헌관 홍승원 선생께서 잔을 올리시겠습니다.”

→ (잔 올림 → 공수 1, 배 2, 흥)

5. 종헌례 : “이제 종헌례입니다. 종헌관 이래현 선생께서 나아가 잔을 올리시고 절을 올리시겠습니다.”

→ (잔 올림 → 공수 1, 배 2, 흥)

6. 삼헌례 (일동 절) : “이제 모두 함께 절을 올리겠습니다. 공수 후, 큰 절 두 번입니다.”

→ (일동 공수 1, 배 2, 흥)

7. 폐식 : 일동 평신

“이상으로 제례를 모두 마쳤습니다. 두 성현의 절의와 인의 정신이 저희 모두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기를 바랍니다. 모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집례 : 김희곤

독축 : 최성미

집사 : 박석룡, 문부산

촬영 : 이효웅, 하영택, 황일만, 윤영일

준비 : 김완숙, 강경숙, 강명자, 엄수정, 안옥선, 이미선

 

[제물 준비]

술(궁인창), 고사리나물(강명자), 채리(김완숙), 딸기(조평규), 육포(김희곤), 대추, 사과(안동립)

인삼과(공동)

※ 집례(의식을 진행하는 사람)가 공수(공손히 손을 모음), 배(절), 흥(일어남) 또는 국궁(몸을 굽혀 인사함), 배, 흥과 같은 구령을 외치며 절의 동작을 안내합니다. 절이 끝나면 “평신”이라고 하여 모두가 똑바로 서는 동작을 지시하기도 합니다.

 

 

소설 호질의 배경 옥전현

 

 

1780년 7월 28일, 연암 박지원이 옥전현에서 벽 위에 한 편의 기문(奇文)을 베껴서 쓴 소설 《호질(虎叱)》 일부의 기록입니다. “정(鄭)의 어느 고을에 살고 있으면서 벼슬을 좋아하지 않는 척하는 선비 하나가 있으니, 그의 호는 ‘북곽선생(北郭先生)’이었다.… 그리고 그 고을 동쪽에는 동리자(東里子)라는 얼굴 예쁜 청춘과부 하나가 살고 있었다. 천자는 그의 절조(節操)를 갸륵히 여기고 제후(諸侯)들은 그의 어짊을 연모하여, 그 고을 사방 몇 리의 땅을 봉하여 ‘동리과부지려(東里寡婦之閭)’라 하였다.… 동리자는 이렇게 수절(守節)하는 과부였으나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각기 다른 성(姓)을 지녔다. 어느 날 밤 그 아들 다섯 놈이 서로 노래처럼 된 말로서,

 

水北雞鳴(수북계명) 강 북편에 닭 울음소리

水南明星(수남명성) 강 남쪽엔 별이 반짝이네

室中有聲(실중유성) 방 안 소리 자아하니

何其甚似北郭先生也(하기심사북곽선생야) 북곽선생 어인 일고

 

하고는 성 다른 형제 다섯이 번갈아서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버스에서 호질의 내용 일부를 성우 같은 목소리로 ‘김완숙’ 님의 낭독으로 연암 선생의 발자취를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된 옥전현에서 연암의 흔적을 찾아보려 둘러봤는데, 아쉽게도 텅 빈 기차역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은 위선적인 선비 북곽선생과 동리자의 문란함을 꾸짖으며, 똥구덩이에 빠진 북곽선생을 바라보고 범이 구역질하고 ‘그 선비 구리도다’라고 풍자하여, 당시 조선 사회의 위선과 부패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형석 박사는 《고조선 강역 연구》에서 《열하일기》에 “요동지역에 ‘평양’(平壤)이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라고 말하며, 평야 지대인 요동지역에 평양이 있었다면, 평양은 ‘넓은 땅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일 수 있다고”하여 갈석산(葛石山)을 답사하려고 하였으나, 시간 제약으로 아쉽게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1780년 7월 30일, 연암이 경항대운하(京杭大运河)에서 수만 척의 배를 보았고, 통주에서 북경 조양문까지 돌을 깔아 도로 40리를 건설하여 쇠수레가 다녔다고 하였습니다. “강역에 닿으니, 강물은 넓고, 또 맑아 수없는 배들이 몰려 대고 있으니, 장관은 만리장성의 놀라움과도 비할 만했습니다. 10만 척이나 되어 보이는 큰 배들은 모두 용을 그렸다. 또한, 길바닥에 죽 돌을 깔아 쇠수레 바퀴들이 마주치는 소리가 더욱 놀라워 사람의 심신을 뒤흔들어 오히려 불안케 만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북경으로 진입하는 도로에 검문소를 여러 곳에 설치하여, 모든 차량을 엄격히 검문합니다. 외국인은 여권을 등록하고, 공안이 차량에 올라와 인원을 세는지 둘러본 뒤 20여 분 만에 통과하였습니다. 검문소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버스에서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경항대운하 항구의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