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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거리와 꾸미개

한복은 수천년 세월을 입어온 우리의 옷

무용총 주실동벽-가무도 해방 이후 서양문화가 물밀듯 밀려오면서 우리 문화가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에 따라 한복도 서서히 주인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젠 명절 때도 일부의 사람만 찾게되었고, 정부나 단체나 회사나 심지어 집안의 큰일에서조차 한복을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이러다간 우리의 옷 한복이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게 되는 험난한 꼴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그렇지만 분명히 한복은 우리 민족이 수 천년 역사 동안 발전시켜왔던 우리의 옷임에 틀림없음이 각종 사료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민족이 입어온 옷의 변화를 대강 살펴보기로 한다. 1. 옷의 기원 맨 먼저 우리 옷의 역사를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은 언제일까?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바늘이나 실을 잦던 도구들은 가장 오래된 우리 옷의 자료이다. 또 농경문 청동기에는 저고리와 바지의 기본 복식에 성인 남자는 상투를 하고, 미혼남자는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이 나타난다. 그 뒤 부족국가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면 두루마기를 중심으로 저고리, 바지, 치마, 모자, 허리띠, 신 등의 양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옷은 아한대성 기후로 삼한 사온이 계속되는 자연 조건과 북방 유목민 계통의 문화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속옷부터 겉옷에 이르기까지 몸을 싸는 형식이다. 또 저고리와 바지가 떨어져있고, 앞이 트여 있는 활동적인 옷이다. 이때 나타난 바지, 저고리의 기본 복식은 현대에까지 이르렀다. 기본복식이 흐트러짐 없이 이어온 것은 동양 삼국에서 우리나라 뿐이라 한다. 2. 삼국시대의 옷치레(복식) 무용총 벽화 - 수렵도 백제 사절 - 양직공도 신라 여인의 복식 삼국시대의 옷치레는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서 쉽게 볼 수 있고, 몸치레(몸장식)는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남자의 대표적인 옷차림은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저고리 위에 허리띠를 매어 간단히 하고, 머리에는 수건이나 삼각형태의 고유의 모자 ‘절풍(折風)’을 썼으며 장화처럼 생긴 목이 긴 신발을 신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옷차림은 상당히 활동적이어서 씩씩하고 호전적이었다는 그들의 기질을 잘 나타내준다. 고구려 여인들도 평상시에는 남자와 같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신발도 남자의 것과 같은 형태의 것을 신었는데 의례가 있을 경우에는 바지 위에 치마를 덧입어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활동적이고 기능적인 옷치레와 신라의 독창적이고 화려한 금속공예의 몸치레, 거기에다 기혼녀와 미혼녀의 구별이 있는 백제의 엄격한 사회윤리관념을 종합해 보면 삼국시대의 복식은 기능성에 중점을 둔 군복 형태의 복장이었으며, 필요에 따라 장식을 가하여 아름다움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률적인 복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고름의 등장은 삼국유사에서 김유신과 김춘추가 공을 차다가 김유신이 김춘추의 고름을 떨어지게 하고 말하기를 '집에 들어가서 옷고름을 답시다'와 같은 표현을 한 것으로 보아 옷고름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고려시대의 옷치례 치마 저고리(이인문의 '미인도') 이조년상 고려말기 문신복의 일종이다. 홍색의 포는 직령이고, 소매가 좁은 편이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 의복제도를 답습하였으나 광종 때 송나라 제도의 영향을 받아 백관의 공복을 정하여 의복에 따라 계급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충렬왕 4년에 원나라 의복제도를 따르고 공민왕 19년에는 원나라 복식을 폐하고 명나라 제도로 바꾸었으며 우왕(1374~1388)때에는 명나라와 원나라 제도를 혼용하다가 공양왕 3년(1391)에 다시 명나라 제도로 바꾸었다. 문희귀한도에 나타난 상의의 형태는 근세의 저고리와 같이 길이가 짧은 것을 볼 수 있다. 고려 말 원의 복속 이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