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 하루만이라고 임금과 왕비가 되는 궁중혼례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왕실 행사의 이모저모를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정리한 책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화려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왕실의 결혼식 특히 임금과 왕세자의 혼례의식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이지요. 이 중 가장 극적인 결혼식 장면을 담은 것이 1759년 66세의 영조임금이 15살밖에 안된 어린 신부 정순왕후를 맞이한 과정을 기록한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입니다. 가례에 나오는 여섯 가지나 되는 절차는 먼저 간택된 예비 왕비가 거처하는 별궁에 청혼하러 사자를 보내는 “납채(納采)”, 혼인이 이루어진 징표로 별궁으로 예물을 보내는 의식인 “납징(納徵)”, 길일을 택하는 “고기(告期)”가 있습니다. 또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인 “책비(冊妃)”, 임금이 직접 별궁으로 나아가 왕비를 맞이하는 “친영(親迎)”, 친영날 밤에 임금이 대궐로 맞아들인 왕비와 서로 절한 뒤 술을 주고받는 “동뢰(同牢)”가 있지요. 이 중 “친영례”와 “동뢰연”이 오늘날 예식장에서 행해지는 결혼식에 해당하는 셈이지요. 요즘 대부분 신랑 신부는 서양에서 들어온 예식으로 혼인을 치릅니다. 하지
1800. 서울에 있는 안중근 의사 빈뫼(허묘)를 아시나요? 올해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지 100돌입니다. 그래서 지난 3월 26일엔 곳곳에서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행사가 열렸지요. 그런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행사는 안중근 의사의 빈뫼에서 100년 만에 처음 열린 제례였습니다. 서울 효창원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 의사의 묘소를 만들면서 미처 유해를 찾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봉환해올 것으로 믿고 만들어둔 빈뫼가 있지요. 아직도 우리는 안 의사를 유해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모셔오시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동안 빈뫼를 두고서도 제사를 지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제 10돌을 맞아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효창공원을 사랑하는 모임, 대한민국임시정부사적지연구회 주관으로 안 의사의 위패를 처음 모시고 추모 제례를 지낸 것입니다. 이 추모제에는 민족정기구현회, 청년백범 등 20여 개 시민단체가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제례를 주관한 선비문화학회의례단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문묘제례)에 능통한 단체로 국립국악원이 주최한 문묘제례 시연도 주관한 단체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 묘를 유해가 없다 하
1799. 여자 한복 치마의 종류, 겹치마·대란치마·속치마 한복 가운데 치마는 “주로 여성들이 하반신에 둘러 감싸는 옷”입니다. 삼국시대 문헌에는 “상(裳)·군(裙)”으로 표기되어 있고, 조선시대에는 세종(世宗) 2년 원경왕후(元敬王后) 장례의식을 기록한 《천전의(遷奠儀)》에 쳐마[赤]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대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의 기록도 같습니다. 1527년(중종 22) 최세진(崔世珍)이 지은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츄마 상(裳)은 남자옷이며, 츄마 군(裙)은 여자옷”으로 기록되어 있고, 초간본(初刊本) 《내훈(內訓)》에는 치마로 쓰인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부터는 치마라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br>상고시대 한국치마의 기본은 고구려벽화(4~6세기)에서 알 수 있지요. 치마는 삼국시대까지 여자들이 입었으나, 신라 때 당나라의 복식(服飾)이 전해지면서 남자들도 입게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이 예복에 덧두르는 옷으로 입기도 했습니다. 치마 종류를 보면 홑치마, 겹치마, 누비치마가 있으며, 모양에 따라 뒤를 여미고 입는 풀치마와 뒤가 막힌 통치마가 있지요. 그밖에 일 할 때 입는 앞치마가 있으며, 겉치마 밑에 받쳐입는 속치마가
1798. 솔잎혹파리와의 전쟁을 벌여온 정이품송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속리산 들머리의 '정이품송(正二品松)'은 600년 동안 벼슬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악성 종양으로 고생하던 세조는 복천암 약수가 좋다고 하여 찾아가던 중, 한 소나무 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가지에 가마가 걸릴까 봐 "연 걸린다"라고 꾸짖자 소나무가 가지를 번쩍 들어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었고 뒷날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이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하지요. 하지만, 천연기념물 제103호 정이품송은 솔잎혹파리와의 오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1929년 전남 목포와 창덕궁 후원에서 처음 발견된 솔잎혹파리는 점차 온 나라에 퍼져 소나무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습니다. 솔잎혹파리가 1978년에는 속리산까지 침범하여 정이품송까지 피해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처음엔 아주 작은 피해로 그쳤지요. 그러나 1981년 이상기후(바람)로 인하여 솔잎혹파리 피해가 78.2%에 달해 고사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러자 관리담당부서인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정이품송 살리기 비상사태에 돌입하게 되지요. 1982년 5월 공사를 벌여 높이 18m, 너비 96m의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초대형 방충망을 설치하였습니다. 그
1797. 바둑이나 장기처럼 유행했던 놀이, 쌍륙 “우리나라 풍습에 바둑·장기·쌍륙을 잡기(雜技)라고 부른다. 바둑알은 바닷물에 씻겨 반질반질하게 된 검은 돌과 흰 조개껍데기를 쓰고, 장기의 말은 나무로 차·포·마·상·사·졸 등의 말을 깎아 글자를 새기고 색을 칠해 쓴다. 쌍륙은 흑백의 말을 나무로 깎아 뼈로 만들어 쓴다.” 위는 조선 중기의 문인 심수경(1516-1599)의 수필집 ‘견한잡록(遣閑雜錄)’에 있는 내용입니다. 투호는 지금 거의 잊혔지만 조선 중기에는 바둑, 장기와 어깨를 견줄만한 놀이였습니다. 다만, 장기와 바둑은 주로 남성들의 놀인데 반해, 쌍륙은 여성들도 즐기는 놀이였지요. 쌍륙은 쌍륙판에 말을 놓고, 그 말을 움직여 상대방의 궁에 먼저 들어가는 쪽이 이기는 놀이입니다. 말을 앞으로 가게 하는 방법은 6면체의 주사위 두 개를 던져 나오는 숫자에 따릅니다. 따라서 ‘6면체 주사위가 둘 있다.’라는 뜻으로 쌍륙(雙六)이라 한 것이지요.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쌍륙’이란 제목의 한시가 남아 있고, 김시습(1435-1493)의 문집 ‘매월당집’에도 같은 제목의 한시가 있습니다. 또 신윤복의 중에도 “쌍륙놀
1796. 절개를 지키려 목숨을 버렸던 조선의 여인들 조선시대에는 효와 더불어 절개는 아주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여인네들이 많았지요. 심지어 절개를 지키려는 주인마님을 따라 같이 죽은 계집종도 있을 정도입니다. ≪정조실록≫ 8년 3월 2일 자 기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안동 선비 남시윤이 과거 시험장에서 죽었는데, 그의 처 신씨가 장례를 치른 뒤에 치마로 낯을 가리고 물에 뛰어들어 죽자, 그의 계집종도 동시에 물에 뛰어들어 죽었으므로 하루 동안에 절개가 쌍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절개도 효보다는 앞서지 못했습니다. ≪한중록≫ 권3에 보면 영조임금의 딸 화순옹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이 죽자 식음을 전폐했지요. 그러자 아버지 영조임금이 찾아가서 간곡히 말렸습니다. 그런데도 역시 굶기를 거듭하여 14일 만에 죽습니다. 그러자 관례를 깨고 영조임금은 화를 내며 열녀문을 세우지 못하게 합니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해 죽었다는 것 때문이지요. 물론 뒤에 정조임금에 의해 열녀문은 세워졌습니다. 이밖에 ≪현종실록≫에 보면 병자호란 때 미처 피난가는 배에 오르지 못한 처녀의 얘기도 나옵니다. 배
1795.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마이크를 쓰지 않았던 임방울 명창 우리나라 최고의 소리꾼으로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임방울 명창은 1904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임 명창은 서당보다는 소리판에 더 마음이 있어 14살부터는 책 보따리를 내동댕이치고 소리판에 뛰어들었지요. 그 뒤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후 본격 소리꾼으로 나섰습니다. 임 명창은 목이 잡혔다 트였다 하기를 수십 번 가슴이 붓고 목에서 피가 쏟아지는 고비를 거듭하여 비로소 목을 얻었는데 외삼촌인 국창 김창환의 소개로 25살에 서울에 올라와 첫무대에 섭니다. 그 첫무대에서 쑥대머리를 불러 선풍을 일으킨 후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측음기판으로 음반을 내 1백20만 장이라는 지금도 이루기 어려운 판매기록을 세웠지요. 자신의 대명사처럼 유명해진를 부르며 임 명창은 일제치하의 암담한 민족현실과 가난에 대한 한스러움을 춘향의 신세에 대비해 울분의 소리를 토해냈습니다. 해소 때문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임 명창은 1961년 부산 공연 중 피를 토하고 쓰러져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최초로 국악예술인장으로 장례를 치렀지요. 평생 양복 입기를 꺼리며 흰색 한복 두루
1794. 과거시험장의 낙방지로 누비방한복을 만들었다 “보통 비변사에서 시험관에게 알려 낙방지를 남김없이 북쪽 변방에 실어 보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300장 정도로 책임만 면하고 있으니 아주 온당치 못합니다. 낙방지를 서울과 지방의 시험관들이 자기가 차지하거나 남에게 주는데, 이는 재물 횡령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시험장에 들어왔던 사람 수를 보고해서 사사로이 쓰지 못하게 하소서.“ 위 내용은 광해군일기 9년 6월 22일 자 기록입니다. 과거시험장에서 낙제한 사람들의 시험지를 버리지 않고 관청 용품으로 쓰거나 옷감 대신 군사옷을 만드는 데도 썼는데 이를 횡령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옷감이 부족한 때여서 과거시험의 낙방지는 납의(衲衣) 곧 누비방한복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시험을 자주 치를수록 군사들은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지요. 원래 이 낙방지로 만드는 납의는 불교 스님들이 입는 회색의 웃옷을 말합니다. 납의의 납은 누덕누덕 기웠다는 뜻이지요. 낡아서 버린 낡은 헝겊을 이것저것 모아 빨아서 바늘로 기워 꿰매거나 벼서 회색물을 들여 입었던 스님들의 옷에서 유래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님들이 스스로 “납자(衲子)”라고 낮추어 부르기도
1793. 덕혜옹주의 떨잠, 조국과 어머니를 상징하는 물건 최근 조국과 일본이 모두 외면했던 망국의 황녀 “덕혜옹주”의 가슴 아픈 삶을 그린 소설이 나와 화제입니다. 책에서는 덕혜옹주의 어머니 복녕당 양귀인이 덕혜옹주에게 떨잠을 머리에서 뽑아줬는데 덕혜옹주는 일본 유학에서 어머니와 조국이 그리울 때마다 떨잠을 꺼내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하지요. 떨잠은 큰머리·어여머리의 앞 중심과 양 옆에 꽂은 머리꾸미개인데 "떨철반자“라고도 합니다. 원형·각형·나비형의 옥판에 칠보·진주·보석 등으로 꾸미고, 은실로 가늘게 용수철을 만들어 끝에 은으로 만든 꽃·새 모양의 떨새를 붙입니다. 떨잠은 옥판 위의 떨새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이때 떨새의 모양은 무척 아름답게 보이지요. 조선시대 궁중 왕비들이나 후궁 등 왕실의 높은 계급의 여인들이 어여머리에 떨잠을 달았으며 왕비는 최고의 권력을 상징하는 나비떨잠을 거꾸로 달지 않고 제대로 달았고, 후궁 같은 이는 나비떨잠을 거꾸로 꽂았습니다.
1792. 조선시대 쇠고기는 나라에서 먹지 못하게 했다 요즘 많은 이들이 애완동물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개고기 먹는 것을 야만시하지요.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개고기 식용은 당연한 것이었고, 오히려 쇠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기록이 많습니다. 농사가 근본인 나라에서 쇠고기를 먹는 것은 그 근본을 헤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숙종실록 9년 1월 28일 조에 보면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송시열이 가뭄을 걱정하면서 중국 송나라 유학자 정자의 다음 말을 인용하여 쇠고기 도살을 금하게 하자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정자는 “농사가 흉년이 드는 것은 소를 잡는 데서 이루어진다. 사람들이 소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먹고 살면서도 소를 도살해 먹기 때문에 소의 원한이 천지의 화기를 손상하고 이것이 자연의 운행질서를 깨뜨려 비가 내리지 않는다. 평생 소의 육신을 부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고기까지 먹다니 잔인하지 않은가?”라고 말합니다. 조선 초기 나라에서는 “금살도감(禁殺都監)”이란 관청을 만들어 소를 잡지 못하게 했고, 태종 11년에는 전문으로 소를 잡는 신백정을 도성 90리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또 세종 때는 다시 돌아온 신백정들을 바닷가로 내쫓는다는 얘기가 나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