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0. 성균관 선비와 종의 딸 사랑이 서린 곳, 정고개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륜동 성균관 정문에서 성균관을 안고 부엉바위 쪽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사잇길이 있엇는데 그 이름이 “정(情)고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고개 너머 마을 이름이 “정(情)골”이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정고개“를 ≪이규태의 600년 서울≫에서는“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리처드슨의 대하소설 ≪파미라≫ 를 복합해놓은 듯한 사랑의 무대”라고 말합습니다. 그것은 신분차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불행한 두 젊은 남녀의 사랑 얘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제7대 세조임금의 외딸 의숙공주의 종에게 예쁜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균관에서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 안윤이 그 종의 딸을 사모하게 되었지요. 안윤이 그 종의 딸에게 한 몸이 되기를 요구했지만 그 종의 딸은 한 몸이 되기를 거부하고 정신적인 사랑만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까닭은 만약 양반이 종과 결혼하게 되면 양반은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종의 상전에게도 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 그 둘이 동거한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이에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상전은 종에게 “가문형(家門刑)”을 내렸습니다. 가문형은 스스로 자
749. 과음을 경계하려고 만든 술잔 계영배를 아시나요? “술잔에 7부 이상 부으면 술은 사라진다는데 / 이놈의 가슴은 어찌 넘치지 못하고 / 이런저런 그리움으로 고이는지 / 너무 가까이 있어서 / 못보고 그냥 보내 버린 그리움에 / 이런저런 사연 술잔에 고개 못 들고 / 물기 젓은 가슴을 쳐다볼 면목이 없어 / 반쯤은 울먹이고 반쯤은 원망하며 취합디다 / 그리운 것은 진짜 독한 법인가 보구려”(계영배 / 정설연)
1748. 산성의 나라 고구려가 쌓은 테뫼식과 포곡식 산성 고구려는 군사적으로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고구려는 평소엔 평지성을 중심으로 살다가 침략군을 맞으면 산성으로 옮겨가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산성에는 “테뫼식”과 “포곡식”이 있습니다. 먼저 테뫼식을 보면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으로 짐작되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현[桓仁縣] 오녀산에 있는 “오녀산성”의 형태입니다. 테뫼식은 산꼭대기를 평평하게 다듬고 산기슭을 수직으로 깎아내린 것처럼 보이지요. “테뫼”의 뫼는 산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니까 산에 테를 두른다는 뜻인데 난공불락의 산성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포곡식은 유리왕 때 쌓았다고 하는 환도산성입니다. 포곡식은 골짜기를 둘러싼 산줄기를 따라 성벽을 쌓아서 문을 통하지 않으면 성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워 방어하기가 쉽다고 하지요. 그 유명한 안시성도 포곡식입니다. 이 성들은 산성의 나라 고구려 사람들의 슬기로움과 자존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1747. 남자의 질투, 여자를 죽여 청계천에 버리다 성종실록 216권, 19년(1488) 5월 20일 자에는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박한주가 와서 아뢰기를, ‘수구문 밖 왕심리(往心里)에 여자의 시체를 내버린 것이 있는데, 상처가 많으므로 이를 검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청컨대, 추국(推鞫)하게 하소서.”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곳은 지금의 왕십리 근처 청계천에서 상처가 많은 20살 정도의 여자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많다는 것은 다리 한쪽이 잘려나갔고, 음문은 살이 찢긴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사건이 심각하다고 생각한 성종은 당장 당상관을 불러 철저히조사해서 죄상을 밝히도록 명합니다. 내용을 확인해보니 범인은 양반집 주인으로 자신이 데리고 놀던 예쁜 종이 이후 다른노비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 질투가 나서 죽여서 노비를 시켜 내다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전 말에 “여자의 질투는 오뉴월의 서리를 불러온다.”더니 이건 여자의 질투보다 더 무서운 남자의 질투입니다. 하지만, 조사해서 죄가 드러났어도 양반이란 신분 덕에 모든 신하들이 나서서 두둔했고 그 때문에 벌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잘못된 양반사회의 한 일그러진 모습이 씁쓸합니다.
1756. “부부금슬”은 작은 거문고와 25현 큰 거문고에서 온 말 혼례 때 보면 주례가 꼭 “금슬” 얘기를 합니다. 그 금슬은 어디서 온 말일까요? 원래 금슬은 《시경(詩經)》소아(小雅) 〈상체편(常篇)〉에 있는 "妻子好合 如鼓琴瑟 兄弟歸翕 和樂且湛(처자가 마음이 맞는 것이 거문고를 켜는 것과 같고, 형제가 화합하여 화락하고 또 즐겁다)"에서 왔습니다. 여기서 처자는 가족이나 아내의 뜻이 됩니다. 또 《시경》〈관저편(關雎篇)〉에는 "窈窕淑女 琴瑟友之(요조숙녀는 금슬로써 벗한다.)"라고 하여 얌전한 처녀를 아내로 맞아 거문고를 켜며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금슬(琴瑟)은 국악기 중 현악기인 작은 거문고 곧 “휘금”이고도 부르는 금(琴)과 25현의 큰거문고 슬(瑟)을 이릅니다. 이 둘은 늘 같이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슬인 거지요. 그런데 국어사전에 보면 “거문고와 비파를 이르는 말”로 풀이합니다. 왜 거문고만 이르던 말이 거문고와 비파가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다른 풀이로는 “금실”의 원말이라고 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금슬”은 사람들이 발음하기가 어려워 많은 사람이 금실로 바꿔 발음했기에 “금실”도 표준어로 지정했다고 합니
1745. 과거장에 들어간 사람은 10만 명, 답안지는 3만 장 조선시대에는 벼슬아치들을 과거로 뽑았음은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그 과거가 온통 부정으로 얼룩졌음을 아는 이는 드뭅니다. 먼저 과거장에 들어갈 때 예상답안지와 참고서적 등이 들어 있는 책가방 곧 “책행담”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이는 커닝의 고전적인 방법이지요. 그래서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보면 과거장이 마치 책가게 같았다고 합니다. 또 과거장에 들어가는 사람 중 실제 답안지를 내는 사람은 턱없이 적습니다. 예를 들면 정조 24년에 치른 과거는 10만 명 정도가 들어가 답안지는 3만 명만 냈다고 하지요.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응시생인 양반집 자제들은 과거장에 여러명의 조수를 데리고 들어가는데 글을 짓는 “거벽”, 글씨를 써주는 “서수”가 따라 들어갑니다. 과거를 보는 사람은 손도 까닥 안고 대리시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먼저 잡고 답안지를 다 쓰면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답안지를 대신 내주는 “선접군”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먼저 내려고 폭력까지 쓰는 까닭은 수만 장의 답안지를 며칠 안에 다 봐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실제로는 답안지 앞부분만 보거나 앞에 낸 수백 장만
1744. 동짓달엔 어머님께 버선을 해드리세요 오늘이 음력 동짓달(11월) 24일이니까 이제 곧 섣달입니다. 연중 동지와 섣달의 추위는 매섭기 짝이 없어 지금처럼 훈훈한 아파트나 두툼한 점퍼에 포근한 양말이 없던 시절에는 겨울나기가 수월치 않았지요. 이런 때에 “동지헌말(冬至獻襪)”이라는 풍속이 있었는데 “동지에 만들어 바치는 버선”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엔 동지부터 섣달 그믐까지 시어머니 등 시집의 기혼녀들에게 버선을 지어 바치려고 며느리들의 일손이 바빠지는데 이를 ‘동지헌말’ 또는 풍년을 빌고 다산(多産)을 빈다는 뜻인 ‘풍정(豊呈)’이라고도 했던 것입니다. 18세기 실학자 이익은 동지헌말에 대해 ‘새 버선 신고 이 날부터 길어지는 해그림자를 밟고 살면 수명이 길어진다.’ 하여 장수를 비손하는 뜻이라 했습니다. br>며느리가 손수 도톰한 솜을 넣어 만든 버선을 신은 시어머니는 세상에 더없는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풍습이 대대로 이어져 오던 것은 단지 발을 따뜻하게 하려는 것이라기보다 늙고 병들어 가는 시어머니의 주름과 그가 살아온 고난의 한평생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서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버선 따위를 신을 사람도 없
1743. 조선인은 천황폐하를 받들어 모셔야 한다고 가르치라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구학부 편찬 보통학교용 교과서와 구학부 검정 및 인가의 교과서 용도에 교수상의 주의 및 자구정정표”를 서둘러 배포했습니다. 긴 이름의 이 표는 그동안 보통학교에서 쓰던 교과서를 일제의 틀에 맞도록 가르치게 하려는 수작이었지요. 특히 그 표에서 맨 먼저 강조한 것은 일종의 도덕교과서인 “수신서(修身書)”에서 그동안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 순종을 이태왕, 이왕으로 낮춰 부르게 한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일본 천황을 천황폐하로, 황후를 황후폐하로 부르도록 가르치라고 강요합니다. 그리고 조선은 한일병합의 결과로 일본의 영토가 되었음도 강조하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뒷날 내지의 일본과 조선을 내선일체라 하여 일본과 조선이 하나임을 강조했지만 이 표에서는 대만, 남사할린, 조선을 빼고 내지라 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조선과 일본은 원래 하나이다.”라고 한 것이 스스로 거짓임을 밝힌 셈이지요. 참고 :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매일신보≫, 수요역사연구회, 두리미디어
1742.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의 음식, 빈대떡 우리 겨레가 좋아하는 음식 중에는 빈대떡도 있습니다. 조선의 요리서 ≪음식디미방≫과 ≪규합총서≫에는 “빈쟈법”, “빙쟈”가 나오는데 그것이 빈대떡입니다. 요즈음은 빈대떡 재료에 녹두가루나 밀가루가 쓰이며 여기에 어린 애호박을 송송 썰어 넣거나 파, 고추를 넣기도 하고 오징어나 굴 등의 해산물 또는 돼지고기를 가늘게 저며 넣고 들기름에 고소하게 지져 만들기에 영양가도 많아 남녀노소 좋아하는 음식이지요. 그런데 이 빈대떡의 유래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하면 가난한 유랑민들이 숭례문 밖으로 수없이 몰려들었지요. 그때 어떤 부잣집에서는 이들을 위해 빈대떡을 만들어 소달구지에 싣고 와서는 “oo 집의 적선이오!” 하면서 나눠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빈자(貧者)떡” 곧 가난한 이들을 위한 떡이라고 불렀다고 하지요. 곧 빈대떡은 우리 겨레가 만든 나눔의 음식이었습니다. 이 추운 겨울 먹을 양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없나 살펴보고 빈대떡을 해서 나눠주면 어떨까요?
1741. 대한이 소한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 오늘은 24절기 중 스물세 번째인 소한(小寒)입니다. 소한은 양력으로 해가 바뀌고 처음 오는 절기입니다. 원래 절기상으로 보면 대한(大寒)이 가장 추운 때지만 실제는 소한이 1년 중 가장 추운데 절기의 기준이 중국 화북지방에 맞춰졌기 때문에 조금 다른 것입니다. "대한이 소한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든가 "소한 얼음 대한에 녹는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도 한다.’라는 말처럼 대한보다 더 춥습니다. 지난 연말연시엔 눈도 오고 꽤 추웠습니다. 어제는 서울에 25.8cm의 눈이 내려 관측을 새로 시작한 1937년 이후 가장 큰 눈이었다고 하지요. "눈은 보리 이불이다.", "사람이 보지 못하는 사이에 눈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 "함박눈 내리면 풍년 든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옛사람들은 눈과 풍년과의 상관관계를 믿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눈 먹으면 감기에 안 걸린다.", "장사 지낼 때 눈 오면 좋다.", "첫눈에 넘어지면 재수 좋다."라며 눈을 좋은 조짐으로 보았지요. 이즈음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예전 우리는 겨울엔 쌀밥을 먹고, 여름엔 보리밥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식생활을 한 까닭은 물론 철 따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