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1 석유, 돌을 삶아서 걸러낸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석유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석유는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생산되는데, 어떤 사람은 바다 가운데서 꺼낸다 하고 어떤 사람은 석탄에서 빼낸다 하며 어떤 사람은 돌을 삶아서 걸러낸다고 하는 등 설이 다양하나 천연자원임은 분명하다.” 석유는 메소포타미아·터키 등에서 기원전부터 쓰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종 17년(1880년)부터 석유를 썼는데 처음엔 빛깔이 붉고 냄새가 고약했다고 합니다. 석유가 등장하면서 대신 산이나 들에 기름 짜는 열매가 더는 번성하지 않았다고 하며, “자기황(自起黃)” 곧 성냥이 나돌았는데 이를 서양 부싯돌이란 뜻의 양수화통(洋燧火筒)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석유는 처음에 “검은 황금”이라고 했지만 석유 때문에 너무나 많은 전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제는 석유를 “악마의 검은 피”, “검은 눈물”이라고도 부른다지요. 또 석유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도 몰립니다. 결국, 석유도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인간에게 해로운 물건이 되어갑니다.
1720.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의 앞잡이 조선귀족을 아시나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한국어 일간신문 매일신보(每日申報)가 있었습니다. 그 매일신보에는 조선귀족이 자주 소개되곤 했었습니다. 조선귀족이란 무엇일까요?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일본 황실령 제14호 을 공포하였는데 그 내용 중 귀족의 자격을 보면 황족의 예우를 받지 못하는 왕족, 구한국 시기 명망 있는 가문 관계자, 일제 식민지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일제 식민정책을 수행하는데 일등공신을 중심으로 뽑았다고 합니다. 결국, 1910년 10월 8일 총독부에서 작위를 주는 수작식에서 모두 76명의 귀족이 탄생했지요. 이때 귀족이 된 사람들을 보면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비롯하여 일제에 빌붙거나 앞잡이가 된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용태 등 남작이 된 사람들은 기뻐서 밤새워 큰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조국을 배반하고 일제를 찬양하며 받은 귀족 지위가 그렇게 달콤했을까요?
1719.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뒤꽂이 보셨나요? 옛 여인들이 머리장식을 했던 것 가운데는 귀이개·빗치개·뒤꽂이 등이 있었습니다. 이중 빗치개는 가르마를 갈라 머리를 정리하는 데 쓰일뿐더러 밀기름을 바르는 도구였고, 빗살 틈에 낀 때를 빼는 데 썼지요. 이것은 뿔 ·뼈 ·쇠붙이 등으로 만듭니다. 또 뒤꽂이는 쪽찐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외의 장식품이지요. 이 뒤꽂이의 하나로 공주시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국보 제159호로 지정된 금뒤꽂이를 보셨나요? 이 뒤꽂이는 길이 18.4㎝, 윗부분의 폭은 6.8㎝입니다. 왕의 널(관) 안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금판으로 된 삼각형 부분과 3개의 꼬챙이로 구성되었는데 삼각형 부분은 윗부분이 새가 날개를 편 모습이고, 세 가지 부분은 긴 꼬리처럼 되어 전체 모양이 나는 새의 모양을 표현하고 있지요. 백제시대 왕비가 이 뒤꽂이를 하면 참으로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1718. 소나무로 빚은 술, 송순주·송절주·송하주 소나무는 우리 겨레의 삶과 함께한 나무인데 살림살이뿐만이 아니라 술도 많이 담가 먹었습니다. 그에는 송순주(松筍酒), 송절주(松節酒), 송하주(松下酒) 따위가 있습니다. 먼저 송순주는 대전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것인데 소나무 새순으로 빚는 술로서, 일찍이 신선들이 즐기던 불로장생주로 알려져 왔습니다. 향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병 치료 효과가 있어서 예로부터 즐겨 마셔왔지요. 《동의보감》에는 송순주가 위장병과 신경통에 좋다고 기록되어 있고, 민간에서는 풍치 예방에 사용하였습니다. 또 서울지방의 민속주 송절주는 서울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됐는데 송절 곧 소나무 가지의 마디를 넣어 만든 술로, 조선 중기부터 널리 보급된 전통 약주입니다. 또 이를 증류시켜 만든 소주는 한주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송하주는 솔뿌리를 넣고 빚은 술입니다. 동짓날 밤에 항아리에 담아 소나무 밑에 파묻었다가 이듬해 늦가을에 파내어 먹지요. 청나라 고종 건륭황제(1711~1799)는 60여 년 동안 재위했고 89세까지 살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각종 장수약술 특히 소나무술을 마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소나무술은 피 순환
1717. 손자놈 재롱에 잠화 꽂아보는 영조임금 영조실록 106권, 41년(1765) 10월 4일 기록에 보면 영조와 세손(정조)의 잠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1716. 창작판소리로 부활한 백범 김구 “너 이놈 왜놈은 말 듣거라! / 만국 공법이니 국제 공법 그 어디에 / 국가 간의 통상 화친 조약을 체결한 후 / 그 나라 국모를 시해하라는 조항이 있더냐 / 야 이 짐승만도 못한 왜놈아!” 이는 창작판소리 의 사설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지난 11월 23일 늦은 4시에 백범기념관 컨벤션센터에서 창작판소리 12바탕 준비위원회(위원장 김도현) 주관으로 열린 창작판소리 시연회가 있었습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곧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우리 전통문화에 진리 같은 좌우명일 것입니다. 전해온 12바탕 판소리가 정말 소중한 것이기는 하되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창작판소리가 생겨나지 않으면 그저 옛것인 채로 남을 수밖에 없지요. 그 창작판소리의 전통은 1904년 김창환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최병두 타령”을 시작으로 해방 뒤 월북 소리꾼 박동실이 만든 “열사가”가 그 계보를 잇고 1970년대에 고 박동진 명창도 “성웅 이순신”, “성서 판소리”, “유관순전” 등의 판소리를 창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창작판소리는 임진택의 “소리 내력”, “오적(五賊)”, “똥바다”, “오월 광주”라고 봅니다. “소리꾼
1715. 갓난아기가 입었던 “봇뒤창옷”을 아시나요? 제주도에 가면 “봇뒤창옷”이란 갓난아기 옷이 있습니다. 이 옷은 태어나서 한 달 동안 아기에게 입히는 홑옷입니다. “봇뒤창옷”은 거친 삼베로 만드는데 살갗을 튼튼하게 하고 인내심을 기르려고 한 것입니다. ‘봇태창옷’·'봇뒤적삼'·'베옷'·'삼칠일옷'·'베창옷'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봇뒤창옷”이란 말을 풀어보면 ‘봇’은 ‘자궁(子宮)’, ‘뒤’는 ‘자궁에서 떨어진 다음’, ‘창옷’은 ‘홑옷’을 뜻하여 세상에 처음 나온 아기가 입는 홑옷이란 말이지요. 모양은 깃이나 섶은 달지 않고, 길이는 엉덩이를 덮어 내릴 만큼 길며, 옷고름은 목숨이 길라고 무명실로 다는데 한쪽은 가슴 한 바퀴를 돌려 맬 수 있도록 길게 만들었습니다. 또 ‘운수 좋은 옷’으로 생각했는데 아들이 입었던 옷, 특히 큰아들 것은 잘 두었다가 전쟁에 나가거나 소송 사건,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때에 등에 대거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지요. 또 여자아이가 입던 것은 남자아이에게 절대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옷을 입지 못한 사람은 저승에 가서도 사람 축에 끼지 못한다.”라고 생각해서 빌려서라도 반드시 입혔다고 하였지요.
1714. 일제는 조선 궁궐을 노리개로 여겼다 예전에 창덕궁 등 궁궐에 가본 사람은 인정전 앞마당에 잔디가 깔린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엔 그곳에 다시 박석(薄石, 얇고 넓적한 돌)으로 바꾸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겨레는 잔디를 무덤에만 심었고 궁궐 등에는 잔디가 아닌 박석을 깔았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이 박석을 들어내고 잔디를 깐 것입니다. 조선총독부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온돌방이었던 궁궐 방을 마루로 바꿔버렸습니다. 우리 겨레는 신석기 시대부터 온돌문화였습니다. 이를 억지로 뜯어고치는 바람에 우리정부는 경복궁 복원과 함께 다시 원래대로 바꾸느라 돈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또한 창경궁은 어떠합니까? 창경궁은 원숭이 따위의 동물 우리를 집어넣어 동물원의 똥냄새를 풍기고 궁궐의 전통 나무들을 뽑아버린 자리에는 일본국화인 벚나무를 심기도 했지요. 말로는 조선을 이롭게 해주려 한다면서 궁궐을 짓밟고 끝내는 명성황후까지 시해하는 잔학한 행위를 일삼았으니 그 죄가 하늘에 이를 겁니다.
1713. 17세기 조선엔 이미 새싹채소가 있었다 요즘 새싹채소가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부쩍 인기를 끄는 모양입니다. 새싹채소는 짧은 기간에 씨앗에서 움트는 싹을 키워 처음 나오는 어린줄기와 떡잎을 먹는 푸성귀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새싹채소가 이미 17세기에도 있었습니다. 1670년(현종 11년)에 정부인 안동 장씨가 쓴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것입니다. 책에서는 “마구간 앞에 움을 파고 거름과 흙을 깔고 신감채(辛甘菜), 산갓(山芥), 파, 마늘을 심고 그 움 위에 거름을 퍼부으면 움 안에 생긴 열로 땅속 싹이 자라는데, 이것을 겨울에 썼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곧 안동 장씨가 겨울에 봄나물 맛을 느끼려고 특별히 기른 나물이지요. 궁중에서도 이런 새싹채소를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여겨 진상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부터 한겨울에도 신선한 채소를 길러 먹을 줄 아는 슬기로운 겨레였습니다.
1712. 정조와 연산군은 어떻게 달랐을까? 정조실록 권54 부록, “대왕대비전이 내린 행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정조 임금의 성품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은 겨울이면 곤룡포 외에는 늘 입는 것이 굵은 무명베옷이라서 자주 다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워서 입기까지 하였다. 여름철 옷은 자주 빨기 때문에 해어진 것도 그냥 입었고, 반찬 역시 보통 때는 세 가지를 넘지 않았다.” 또 정조는 어려서부터 화려한 옷이나 기름진 음식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정조와는 달리 연산군은 다른 품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연산군일기 1년(1495) 4월 8일 자에 보면 중국에서 나오는 검은 엿을 좋아하여 사신에게 그 엿을 사가지고 오게 하기도 하고 심한 때는 만드는 법까지 알아오라고 합니다. 또 쇠고기를 좋아하여 잔치가 있을 때마다 10여 마리를 잡아들였는데 길에서 수레를 끌거나 물건을 운반하는 소까지 잡아들였다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연산군도 그렇게 나쁜 일만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만 한나라의 임금으로 한 처신을 보면 연산군이 훌륭한 임금으로 남기는 어렵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