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 서서 부르는 노래 선소리를 아십니까? 서울 ·경기 ·서도 ·남도지방의 잡가 가운데 서서 부르는 노래를 아울러 말하는 “선소리”가 있습니다. 선소리는 “입창(立唱)”이라고 하여 “좌창(座唱)” 곧 앉아서 부르는 “앉은소리”에 대비되는 노래입니다. 선소리는 노래패의 우두머리인 모갑이가 장구를 메고 앞소리를 부르면 나머지 소리꾼들은 소고를 치면서 여러 가지 발림(손짓, 발짓을 섞은 동작)을 곁들여 뒷소리를 받는 형식입니다. 대한제국 말기에 선소리를 전문으로 하는 소리패가 등장,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뚝섬패 ·한강패 ·과천패 ·왕십리패 등을 형성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평양지방으로 전파되어 서도선소리를 형성하고, 남쪽으로 옮겨가 남도선소리를 만들어 내었지요. 현재 전하는 선소리에는, 경기선소리에 양산도, 경복궁타령, 자진방아타령, 서도선소리에 산타령, 남도선소리에 보렴, 긴육자배기, 개구리타령, 흥타령 등이 있습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은 최창남 선생이 예능보유자로 있지요.
1700. 입동 전 보리씨에 흙먼지만 날려주소 내일은 겨울에 들어선다는 입동(立冬)입니다. 입동은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날이지요. 농촌에서는 입동 전에 보리 씨를 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입동 전 보리씨에 흙먼지만 날려주소”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보리 씨 뿌리는 때를 강조한 속담인데 일손이 모자라서 흙먼지만 날리는 수준일지라도 반드시 씨뿌리기는 입동 전에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보리는 씨를 봄에 뿌리는 것도 있고, 가을에 뿌리는 것도 있는데, 우리나라는 가을에 씨를 뿌려 겨우내 땅속에서 충분한 성숙기를 가집니다. 그렇게 겨울 추위를 견딘 보리는 양기운이 넘쳐나는 여름철 음기운을 보충해주는 좋은 음식입니다. 같은 뜻의 속담으로 “입동 전에 보리는 묻어라.”, “입동 전 송곳보리다”, “입동 전 가위보리다”, “입동 전 가새보리 춘분 되어야 알아본다.”, “입동 전 가새보리 얼어 죽기 쉽다.” 등도 있습니다. “송곳보리”는 보리가 입동 전에 송곳 길이로 자라야 한다는 뜻이고, 가위보리는 보리 잎 두 개가 돋아난 때의 모양이 가위 모양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며, 가새는 가위의 사투리이지요.
1698. 청나라는 조선 사람들의 머리를 깎도록 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학자 조재삼의 백과사전 격인 책 ≪송남잡지(松南雜識)≫에는 박지원의 말을 옮겨 적었습니다. “청나라 초기에 한족을 포로로 잡으면 반드시 머리를 깎았는데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만 깎지 않도록 하였으니 그 까닭이 있다. 청나라 태종에게 주위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의 머리를 깎게 하도록 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태종은 라고 하였다.”청나라가 한 것을 보면 대한제국 말기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을 내린 것과 견주게 됩니다. 청나라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중히 생각하던 머리카락를 자르라고 하지는 안 했지만 일본은 우리에게 그걸 강요하여 많은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그러고 보면 청나라 태종이 좀 더 슬기로운가요?
1697. 지금은 잊혀진 악기 향비파를 아십니까? 우리 악기 중에 현악기로 향비파가 있었습니다. 향비파(鄕琵琶)는 거문고 ·가야금과 함께 신라 삼현(新羅三絃)에 들며, 고구려의 오현(五絃)과 같은 악기입니다. ≪삼국사기≫에 “향비파는 당비파와 비슷하고 신라시대 때 생긴 것이나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라고 나와있습니다. 당비파(唐琵琶)와 구분하려고 향비파라고 했으며 목이 굽은 당비파에 비하여 목이 곧아서 직경비파(直頸琵琶)라고도 합니다. 갸름하고 둥근 통에 12개의 괘(棵)를 붙이고 그 위에 5개의 줄을 얹었습니다. 통은 거문고와 같이 앞면은 오동나무, 뒷면은 밤나무를 사용하며 명주실을 5현으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요. 중국 후한(後漢)의 역사서 ≪석명(釋名)≫에 보면 “비파는 원래 호족(중국 한나라 때 신강성에 있었던 오손족)의 마상악기로 손을 밀어나가는 것을 비(琵)라 하고, 손을 당겨오는 것을 파(琶)라 하여 라 이름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교방(敎坊) 곧 가무(歌舞)를 관장하던 기관에서는 쓰는 것은 목이 굽었다.”라고 하여 당비파는 중국의 기생들이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1696. 사위집을 지어 머물게 하는 고구려 데릴사위제 지금이야 혼인을 하면 신부가 바로 시집 식구가 되지만 예전엔 신랑이 처가로 가 한동안 사는 데릴사위제도가 있었습니다. 특히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가 펴낸 《삼국지》의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에 보면 고구려의 데릴사위제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풍속에 혼인하기로 언약이 되면 신부집에서는 원래 살던 큰 집 뒤에 작은 사위집[서옥, 婿屋]을 만든다. 사위는 해가 진 저녁 무렵에 처가 문밖에 와서 아무개라고 제 이름을 대면서 자고 가겠다고 청한다. 그런 청을 두세 차례 하면 허락하여 새로 지은 사위집에서 지내도록 했다. 그 뒤 돈과 옷감을 모아 두었다가 아이를 낳아 자라면 비로소 시가로 갔다.” 또 중국 당(唐)의 이연수가 펴낸 역사서 ≪북사(北史)≫를 보면 신랑집에서는 돼지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절이 없고 혹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이를 흉보았다고 합니다.
1695. 전보국 설치하자 봉수가 모두 쓸모없어지다 전보(電報)는 이용자가 알리려고 하는 정보(情報)를 전기통신설비를 써서 글자를 빠르게 보내 받는 사람에게 배달하는 통신수단이라고 백과사전은 설명합니다. 요즘처럼 전화 그것도 손전화가 보편화하지 못했던 때 이 전보는 집안 어른의 죽음을 알린다든지 급한 일에 아주 요긴하게 쓰였었지요. 그 전보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온 지 아시나요? 우리나라에 전보가 들어온 것은 1887년(고종 24년)이었습니다. 이때 전보국을 설치하고 의주에서 서울을 거쳐 동래까지 전신주도 세웠지요. 그러자 그동안 변방의 긴급한 정황을 알리던 봉수(烽燧)와 역참제도는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온 나라의 봉수대 수는 650여 곳이고, 각 봉수대에는 40∼50명의 군사가 지켰습니다. 그런 봉수대와 그 봉수대를 지키는 군사가 필요 없어졌다는 것이지요. 세상이 발달하면 그에 따라 쓸모없어지는 것은 있게 마련입니다.
1694. 신나는 추임새 문화, 윷놀이 “모야!” “윷이야!” 윷놀이판에서 목청껏 외쳐댑니다. 여기선 놀이를 하는 사람도 구경꾼도 따로가 아닙니다. 모두 하나 되어 신이 나는 것입니다. 윷놀이는 부여 시대에 다섯 가지 가축을 다섯 마을에 나누어주어 그 가축들을 경쟁적으로 번식시킬 목적에서 비롯된 놀이인데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을 뜻합니다. 민속학자 안동대 임재해 교수는 그의 책 ≪한국 민속과 오늘의 문화≫에서 “윷놀이”는 우연성과 신명성이 큰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아무리 솜씨 좋은 놀이꾼도, 삶의 지혜를 터득한 할아버지도, 학문이 뛰어난 선비도, 철들지 않은 어린 아이에게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윷놀이는 놀이의 기능을 익히고자 오랜 세월과 돈을 투자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급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구경꾼도 응원하거나 훈수를 두어도 탓이 되지 않는 놀이입니다. 그래서 윷놀이는 무슨 특수층을 위한 놀이가 아니며, 남녀노소 모두 하나 되어 즐기면 그뿐인 놀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윷놀이는 판소리처럼 추임새 문화의 하나이지요.
1693. 조선시대 문신들의 재충전 기회 사가독서제 조선시대에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가 있었습니다. 그 시작은 세종대왕이었는데 1424년(세종 6) 집현전 학사 가운데 젊고 재주가 있는 사람을 골라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지요. 바로 재충전 기회를 준 것입니다. 처음에는 특별한 장소를 만들지 않고 문을 닫은 절집이나 자신의 집에서 책을 읽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는 공부에 몰두할 수 없다고 확인되자 성종 때 지금의 용산쪽 한강 가에 “남호독서당”을 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남호독서당은 성종 때 일어난 갑자사화 이후 없어졌고 중종 때 두모포(豆毛浦:옥수동)에 동호독서당을 다시 지었습니다. 이 사가독서제는 선비들이 몸을 가다듬고, 뜻을 옳게 가지며,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데 그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식도 쓰기만 하고 재충전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진다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1692. “봉분 위 돌 치워라!” 교토 코무덤에서 열린 위령제 “돌 치워라 돌 치워라 / 봉분 위 돌 치워라 / 먼 고향 남원땅 엄니 곁으로 나 가리라 / 왜놈 칼 맞고 코 잘려 그 길로 왜놈 땅 끌려왔네 / 돌이 애비야 돌이 애비야 / 황천길 아들 찾아 헤매셨을 엄니 / 여보 여보 돌이 아빠 울부짖으며 /지아비 시체 찾아 헤맸을 아내 / 아부지 아부지 어디계셔요 / 눈물 흘리며 엎어지고 기어가며 애비 찾았을 피붙이 / 돌 치워라 돌 치워라 / 봉분 위 돌 치워라 / 좁은 무덤 박차고 훨훨 날아 내 고향 남원땅으로 / 나 돌아가리라” 위는 이고야 시인의 “코무덤” 시 전문입니다. 지난 10월 25일 이른 11시 일본 교토 통한의 코무덤 앞에서는 한국민단교토본부 주최 “2009년도 이총 공양위령제”가 열렸습니다. 이날은 한국민단교토본부 왕청일 단장, 주오사카 오영환 총영사, 코무덤 최고 전문가인 교토조형예술대학 나카오 히로시 명예교수 등 1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행사는 제사와 시낭송, 분향이 이루어졌지만 아쉽게도 모든 객관적인 문서가 “코무덤”인데도 펼침막은 물론 행사 내내 “耳塚(이총)”이라고 했습니다.
1691. 도리깨, 곡식의 이삭을 두드려서 알갱이를 떠는 농기구 “일꾼들 두 사람이 ‘어이, 어이’ 추임새를 넣어가며 장단에 맞춰 교대로 도리깨질을 할 때마다 보리 낱알이 사방으로 튀고 짚단에서는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보리타작을 할 때는 서로 품앗이로 하지만 한창 농사일이 바쁜 오뉴월에는 사람 구하기가 힘이 들었다.” 위 글은 소설가 김범선의 “도리깨와 부지깽이”라는 수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도리깨”는 곡식의 이삭을 두드려서 알갱이를 떠는 데 쓰는 농기구이지요. 지방에 따라 도루깨·돌깨·도깨·연가·도리채·도리개라고도 불립니다. 기름한 작대기 끝에 구멍을 뚫어 꼭지를 가로로 박아서 돌릴 수 있게 하고, 그 꼭지 끝에 2∼3개의 휘추리(쭉쭉 뻗은 가늘고 긴 나뭇가지)를 잡아매서 휘둘러 가며 칩니다. 보리·밀·콩·녹두·팥·조·메밀 등의 타작에 씁니다. 도리깨로 이삭을 두드려 알갱이를 떠는 것을 '도리깨질'이라고 하지요. “오뉴월 더위 속에 남편이 도리깨질을 할 때 마누라가 부엌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로 장단만 맞춰줘도 남자들은 힘을 낸다.”라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