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6. 옛날에 얼음을 저장했던 창고, 석빙고·장빙고 ‘삼국사기’ 신라 지증왕 6년(505) 11월 조에는 “처음으로 담당 관청 곧 ‘빙고전(氷庫典)’에 얼음을 저장하도록 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경주에 보물 제66호 석빙고(石氷庫)가 있어 이미 이때부터 얼음을 저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고려사’ 소사(小祀) 조는 얼음을 채취할 때 지내는 ‘사한제(司寒祭)’에 대해서 전합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한양에는 창덕궁 안에 있던 내빙고(內氷庫)와 4대문 밖에 있던 외빙고(外氷庫) 곧 동빙고와 서빙고라는 얼음을 저장하는 장빙고(藏氷庫)가 있었지요. 동빙고의 얼음은 제사에 쓰고 서빙고의 얼음은 토산물을 진상하는 데 썼습니다. 이렇게 저장한 얼음은 임금이 종친과 대신, 각 관아에 빙표(氷票)를 주어 장빙고에서 얼음을 타가도록 했는데 이것을 ‘사빙(賜氷)’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얼음을 채취할 때 백성들이 큰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안 정조임금은 재위 13년에 내빙고를 없기까지 했습니다. 시원한 얼음을 즐기기에 앞서 백성의 고통을 생각한 정조임금의 따스한 마음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1605. 물을 먹는 곰의 모습, 제주 수산리 곰솔 우리나라 곳곳에는 아름다운 자태의 소나무가 많습니다. 제주도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가 두 곳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나이가 600년으로 짐작되는 천연기념물 제160호 산천단(山川壇) 곰솔 무리(8그루)입니다. 예전에 제주목사가 백록담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날씨가 안 좋아 올라갈 수가 없으면 이곳 곰솔에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400년 된 천연기념물 제441호 애월읍 수산리 곰솔인데 수산리 마을 사람들은 소나무에 눈이 덮이면 마치 백곰[白熊]이 물을 먹는 모습으로 보여 ‘곰솔[熊松]’로 불렀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곰솔’의 뜻을 ‘검은 나무껍질을 가진 소나무”로 해석합니다. 원래 바닷가에서 자라는 소나무 곧 해송은 바닷바람(해풍)을 맞아 껍질이 검어지는데 그래서 ‘검솔’이라고 했고 이 ‘검솔’이 ‘곰솔’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곰 모양 소나무"든 "검은 빛 소나무" 든 오래오래 탈 없이 소나무들이 잘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1604. “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올라 우리나라의 ‘조선왕릉’ 40기 전체가 2009년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랐습니다. 유네스코는 조선왕릉이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조경양식으로 세계유산적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며 지금까지 제례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적인 전통이 이어지는 점, 조선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관리 되는 점 등이 세계유산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부 훼손된 능역의 원형 보존과 개발압력에 따른 완충구역의 적절한 보존지침 마련․시행, 종합적인 관광계획 마련과 안내해설 체계 마련 등도 권고하였지요. 이번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에 올라 우리나라는 종묘와 창덕궁에 이어 조선왕조 관련 문화유산들이 대부분 세계유산으로 올랐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이미 올라있는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수원 화성, 경주 역사유적지구, 고인돌 유적, 제주 화산섬·용암동굴과 함께 모두 9건의 세계유산을 가지게 됩니다.
1603. 사내 또는 남편을 낮춰 이르는 말, 남진 세조 때 편찬된 불교대장경 ≪월인석보(月印釋譜)≫에 “男子 남지니라.”라고 적혀있습니다. “남진”은 “계집”의 상대말로 남편을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 또 송강 정철의 시조에는 “제 남진 제 계집 아니어든 일흠 뭇디 마오려.”라는 구절이 있지요. 이는 자기 남편, 자기 아내가 아니거든 이름을 묻지 말라는 뜻입니다. “계집”은 “아내” 또는 “여자”에 해당하는 우리말이지만 여성에 대한 억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랜 가부장제의 역사 속에서 “계집”은 그대로 남아 전해지지만 “남진”은 사라지고 “남정(男丁)” 또는 남편 같은 말만 남아서 오늘에도 쓰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직 여자를 "계집”이라고 부르는 남성이 있다면 그에 맞서 “남진”이라고 불러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남진”이 들어간 말로 “남진겨집”은 ‘부부(夫婦)’의 옛말이며. “남진계집”은 부부를 이룬 남의 집 하인을 말합니다.
1602. 대한제국 말기 명월관은 교자상까지 배달 “각 단체의 회식이나 시내 외 관광, 회갑연과 관혼례연 등에 필요한 음식을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보내어 음식을 배달하기도 하는데 (중략) 필요한 분량을 요청하면 가깝고 먼 곳을 가리지 않고 특별히 싼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위 글은 1906년 라는 신문에 실린 “명월관” 광고입니다. 광고로 미루어 보면 이 명월관은 조선음식을 팔던 첫 번째 전문음식점일 것입니다. 또 교자상까지 배달했다는 것으로 보아 한정식 출장뷔페 역사의 시작이 아닐까요? 명월관은 대한제국 말기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맡아 하던 안순환(安淳煥)이 지금 동아일보사 자리에 문을 열었던 음식점이지요. 하지만, 당시 언론은 “서양그릇에조선음식을 담거나 신선로에 일본요리를 담았다.”라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1601. 고려시대 공민왕 때까지도 피붙이 사이 혼인 고려왕조의 피붙이 사이 혼인은 제2대 혜종(惠宗)이 맏공주를 아우 소(昭)의 아내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 초기 김종서(1390~1453)·정인지(1396~1478) 등이 쓴 ≪고려사(高麗史)≫ 를 보면 “문무양반들은 동성혼인(同姓婚姻)을 하지 말 것이며, 외가 사촌(四寸)도 구혼(求婚)할 수 없도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피붙이 사이의 혼인을 못하게 한 것이죠. 하지만, ≪고려사≫ 를 읽어보면 “공민왕 15년(1366년) 왕씨를 익비(益妃)로 삼았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익비는 제8대 임금 현종의 아들인 평양공(平壤公) 기(基)의 13대손인 덕풍군(德豊君) 의(義)의 딸입니다. 이를 보면 고려왕조는 제31대 공민왕 때까지도 여전히 피붙이 사이의 혼인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고 :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이능화, 동문선, 1990
1600. 조선시대에 쓰인 음악책 “악학궤범“을 아시나요? “악학궤범(樂學軌範)”은 조선시대에 쓰인 음악 서적 곧 악전(樂典)으로 1493년(성종 24) 임금 명에 따라 만든 것입니다. 가사가 한글로 실려있으며 궁중음악은 물론 당악, 향악에 관한 이론과 제도, 법식 등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지요. 9권 3책인 이 책은 당시 예조판서 성현(成俔)을 비롯하여 유자광·신말평·박곤·김복근 등이 엮은 것입니다. 특히 이에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 관악기 “지(篪)” 타악기 “령도(靈鼗) 등 많은 악기가 소개되었고, 악공이 들고 문무를 안내하는 깃발로 꿩의 꽁지로 장식한 “독(纛)”, 관복에 관한 얘기도 실려있지요. 조선은 정악은 물론 민속악도 크게 발달했으며, 뛰어난 음악들이 전승되었지만 이에 견주면 음악에 관한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전부터 내려오던 악기와 음악제도에 관한 내용이 임진왜란 후 불타서 없어졌으나, 다행히 《악학궤범》만은 되찾아 1610년(광해군 2)에 복각되었습니다.
1599. “동무”는 마주 서서 춤을 추는 사람 “운서(韻書)에 이르기를 ‘동무(同舞)는 바로 마주 서서 춤을 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동무(同儛)’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 글은 조선후기의 학자 조재삼(趙在三)이 쓴 백과사전 격인 책 ≪송남잡지(松南雜識)≫에는 나오는 것입니다. 이 “동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북한에서 “혁명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사람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로 쓴다고 하여 언젠가부터 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두문불출 골방에 엎드려 한서나 뒤적이는 / 이가 다 빠진 늙은이는 내 걸음동무다." 이 글은 신경림 시인의 “산동네"라는 시 일부입니다. “걸음동무”는 같은 길을 가는 친구 곧 “동행”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걸음동무” 한 사람만 있다면 참 좋을 일입니다.
"1598. 말 위의 무예 마상재, 일본에서 인기끌다 “문득 일어나 안장 위에 가슴 대고 네 활개를 펴네 / 마치 술 취한 사람에게 차인 바둑판 다리가 하늘을 향하듯 / 문득 허리 펴고 팔 높이 들어 휘저으니” 이는 다산 정약용의 라는 한시 일부입니다. 마상재(馬上才)는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마상무예라고 하지요. 마상재의 종목에는 말의 옆구리에 숨어 적의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는 등리장신(鐙裏藏身)이 있는데 이성계가 적장의 창을 이 재주로 피했다고 합니다. 그 밖의 재주로는 좌우초마(左右超馬), 마상도립(馬上倒立) 등도 있습니다. 또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 호위무관들이 마상재를 뽐내 왜인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일본 최고위직인 간바쿠(関白, かんぱく)가 떠나가는 통신사 일행을 붙잡고 '부디 다음 사행 때에도 마상재 하는 사람을 꼭 데려오십시오!'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1597. 부와 권력의 상징 안경, 안경집은 거북이 등껍질 "선묘가 하사한 물건을 보았더니, 크기가 돈짝만 한 것 두 개가 있었는데, 흡사 돌비늘(운모)과 같고 금으로 테를 둘렀으며 자루가 달렸다. 오므리면 하나가 되고 펴면 둘이 되었는데, 노인이 두 눈에 걸면 글자가 배나 크게 보인다." 이는 조선후기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이덕무(李德懋)의 책 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덕무가 살았던 당시 안경은 알이 동전 크기만 한데다 안경테는 금으로 장식했고, 가지고 다니기 편하도록 좌우의 안경알이 접어지는 형태였던가 봅니다. 그리고 돋보기로 글씨가 크게 보였으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조선후기에는 안경이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허리춤에 안경집을 곱게 매달아 다녔는데 당시 안경집 중에는 거북이 등껍질이거나 상어 가죽인 어피에 옻칠을 해서 매화꽃 무늬가 보이도록 한 것이 고급스러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