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 영조임금, 어머니 묘소 옆에서 시묘살이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는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英祖)를 낳은 숙빈 최씨의 묘소 소령원(昭寧園)이 있습니다. 이 소령원은 영조임금의 효성이 담긴 곳으로 사적 제358호로 지정되었지요. ‘능’은 임금과 왕비의 무덤에, ‘원’은 세자와 후궁의 무덤에, ‘묘’는 대군과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의 무덤에 쓰는 이름입니다. 조선 시대 임금 가운데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유일한 임금 영조는 품계 때문에 종묘에 어머니 위패를 모실 수 없게 되자 묘소의 지위를 소령원으로 높였습니다. 또 “붓을 잡고 글을 쓰려 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는다(涕泗被面). 옛날을 추억하노니 이내 감회가 곱절이나 애틋하구나.”라는 “숙빈최씨소령묘갈(淑嬪崔氏昭寧墓碣)”이란 비문도 직접 썼지요. 그뿐만 아니라 영조는 어머니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한 효성이 지극한 임금이었습니다.
1595. 대한제국 말기 왜놈들이 화투국을 설치했다 조선 후기 학자 황현(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 병오년(1906년, 고종 43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화투국 얘기가 나옵니다. “예전부터 서울과 시골 여러 곳에는 투전(鬪錢)과 골패(骨牌) 같은 도박을 했는데 갑오년(1894년, 고종 31년) 이후 도박은 저절로 사라졌지만 요사이 왜놈들이 서울과 각 항구에 화투국(花鬪局)을 설치했다. 돈을 놓고 도박하여 한 판에 만 전도 던지니 아둔한 양반이나 못난 장사꾼들 중 파산하는 자들이 잇달았다.” 조선 말기 일제는 조선 침략과정에서 조선에 화투를 적극적으로 퍼뜨린 듯합니다. 그 뒤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 쪽 인물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을사오적(乙巳五賊) 곧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은 화투를 즐겼다고 하지요. 지금 한국이 화투공화국이 된 것은 다시 생각해볼 일입니다.
1594.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공로자들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지은이 김슬옹 박사는 훈민정음은 물론 세종의 홀로 작품이지만 창제와 초기 보급에 큰 공적을 남긴 사람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 여덟 사람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집필한 공동 저자들입니다. 세종의 뜻을 이어 거의 완벽하게 풀이한 문자 해설서를 펴냈지요. ▲ 훈민정음 언해본(왼쪽), 세종실록 또 문종과 수양대군(세조), 정의공주는 창제 과정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습니다. 문종은 책임연구원 구실로 큰일을 하였고, 수양대군은 언문으로 번역하고 집필하는 일과 언문 관련 책 보급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요. 정의공주는 세종의 둘째 딸로 정사에는 없지만 야사나 정의공주 남편 쪽 족보 등에 의하면 창제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합니다. 이 밖에도 반대 상소 덕에 창제 과정과 그 당시 시대적 갈등, 세종의 생각 등이 잘 드러나게 한 최만리도 김 박사는 공로자로 꼽습니다.
1592. 재산 대신 복첩을 물려주었던 육의전 상인들 조선시대 종로에는 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고 나라에서 필요한 물건을 대주던 여섯 종류의 큰 상점 곧 육의전(六矣廛)이 있었습니다. 이 육의전 가게들에는 복첩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는 단골손님의 이름을 적은 수첩입니다. 그래서 복첩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단골손님은 많은 것이고, 그것이 그 가게의 규모를 가늠하는 것이었지요. 이 복첩은 조상의 위패와 나란히 모실 정도였으며 그 단골손님 가운데는 3대에서 7대까지 내려오는 단골손님인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 육의전 가게들은 아버지가 늙으면 자식에게 재산이 아닌 복첩을 물려주었지요. 육의전에 제사가 있는 날 아이들이 느티나무가지에 매달려 가지 끝으로 옮겨가게 합니다. 바지가 벗겨지더라도 손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를 “복가지타기”라 했는데 그처럼 단골을 잡으면 어떻게든 놓지 말라는 신용교육을 그들은 했던 것입니다.
1591. 옛날 종이 대신 썼던 목간, 남근 목간은 무엇? 목간(木簡)은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대나무로 된 죽간(竹簡)과 함께 글자를 기록하려고 썼던 목편(木片) 곧 나무 조각입니다.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처음 발견된 목간은 지금까지 400점 가까이 나왔습니다. 목간은 보통 나무를 너비 약 3cm, 길이 약 20∼50cm, 두께 3mm 정도의 긴 판자모양으로 잘라 거기에 먹으로 글을 썼지요. 그렇지만, 목간 가운데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남근 모양의 백제 목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간은 일본 목간 연구의 권위자인 히라카와 미나미 국립역사민족박물관 교수가 고대 일본 왕실 제사 의식물의 원형이라고도 말합니다. 또 김영욱 서울시립대 교수는 “2002년 백제의 옛 도읍인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6세기께 목간 글자를 분석한 결과 ‘저이’(猪耳)란 한자어가 돼지란 뜻의 백제 고유어 ‘돝+△ㅣ’, 곧 ‘도치’를 향찰로 표현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1590. 애국지사, 현충원에서 일본의 향기에 괴로워 현충일 우리는 여러 국립묘지에 가 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합니다. 그런데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근처에는 일본향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현충원 내 큰길 가로수는 일본인들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벚나무가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본 한 참배객은 독립을 위해 투쟁하시다 돌아가신 분들이 괴로워하실 거라고 말합니다. 또 펼침막(현수막)에 “보훈의 향기로 빛나라”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는 “일본의 향기로 빛나라”라고 고쳐야 할 것이라고 꼬집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묘비에는 죽음이라고 쓰면 될 것을 서거, 별세, 영면 등으로 써서 혼란을 주고, 온통 한자로 도배를 한 데가 많아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읽지도 말라는 것인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진정으로 애국지사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1589. 야사 ≪매천야록≫이 많이 읽히는 까닭 왕조시대에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나라에서 임명한 사관의 고유 임무였습니다. 그러나 문인이나 학자들도 세상이 걱정스러우면 나름대로 역사를 기록했지요. 이렇게 사관이 아닌 재야문인이 기록한 것을 야사(野史)라고 합니다. 그에는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 김윤식의 ≪음청사(陰晴史)≫와 ≪속음청사(續陰晴史)≫, 정교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따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매천야록(梅泉野錄)≫이 가장 많이 읽히는 까닭은 현실에 대해 비판적 시각으로 쓴 때문입니다. 하지만, 황현은 동학을 비적이라 표현했고, 처음에는 의병도 부정적으로 보는 등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그는 자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에서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難作人間識字人)”라고 탄식했습니다. 한 지식인의 독백 속에서 고뇌를 엿보게 됩니다. 참고 : ≪매천야록≫, 황현 지음,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2006
1588. 마중물처럼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된다면? 바삭거리며 타는 목마름으로 / 허공에 눈길이 길어진다는 그대 가슴에 / 내 작은 가슴 열어 조금 고여 있는 물을 / 부어주었더니 / 그대, 저 깊은 곳 어디에서 / 맑고 시원한 물을 콸콸콸 쏟아내며 달려오고 있으니 /갈바람 살짝 묻어나는 새벽길에서 그대를 마중하며 /오늘 살아있다는 시간이 더욱 소중해지고 있어“ 조용순 시인의 “마중물”이란 시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마당에 펌프가 있었던 집을 자주 보았습니다. “마중물”은 펌프질을 하기 전 한 바가지 정도를 펌프에 부어 저 아래서 물이 잘 올라오도록 했던 물을 이릅니다. 손님이 오면 주인이 마중을 나가 맞이하듯이 펌프질을 할 때 미리 다른 물을 부어주어 새물을 맞이하라는 뜻이 담겨 있지요. 우리네 삶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마중물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1587. 온나라에 있는 봉수대를 표시한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라는 옛 지도는 보물 제1533호입니다. 이 지도는 17세기 말에 그려진 것으로 전국 팔도에 있는 봉수대를 표시한 것인데 봉수대를 표시하려고 각 고을의 큰 산(주산, 主山)은 물론 봉화를 올리는 산을 모두 표시하였지요. 또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백두대간을 강조하여 그렸습니다. 산 위의 봉수대는 촛불처럼 그려져 있는데,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지대와 경상도 지역에 밀집되어 있지요. 또 지도의 특징을 보면 압록강 너머 안시성을 포함한 간도 땅이 조선영토로 되어 있고, 울릉도 옆에 우산도(于山島)로 표시한 독도가 있습니다. 다만, 우산도는 울릉도의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에 그려진 것이 다릅니다. 이 지도는 2m에 달하는 큰 것으로 봉수로의 상세한 표현과 뛰어난 회화성이 돋보여 고지도 분야뿐만 아니라 회화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참고 : ≪한국의 옛 지도≫, 문화재청, 2008
1586. 조선 임금의 유모는 종1품 봉보부인 세종실록 68권, 17년(1435년) 6월 15일 4번째 기사를 보면 예조에서 “이제부터 유모를 아름다운 이름을 써서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 이름하고, 종2품으로 하소서.”라고 청하고 세종이 이를 수락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또 같은 세종실록 125권, 31년(1449년) 7월 26일 3번째 기사에는 봉보부인 이씨의 장례 지내는 데 쓸 물건 등을 주도록 명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후 임금의 유모는 “봉보부인”이라 이름하였고, 나중에 예우를 높여 조선시대 법전인 대전회통에는 종1품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봉보부인은 임금의 탄신이나 자신의 생일 또는 나라에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특별한 축하예물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포악한 임금이라고 알려진 연산군도 봉보부인만큼은 끔찍이 여겼다고 하지요. 하지만, 대부분 사대부가 아닌 일반 백성 출신이었던 봉보부인 중 일부는 사가에 청탁꾼이 몰리는 등의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참고 : ≪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문식·김정호, 김영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