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신의 아내 최(崔)는 나이 45살에 이르도록 아들이 없어 마땅히 의절(義絶)해야 하겠으므로, 신이 마지못하여 내보내고 강비호(姜非虎)의 딸에게 다시 장가 들었더니, 최(崔)의 아버지 주(澍)가 일찍이 사헌부에 고소하여 신을 죄주고자 하였으나, 사헌부에서는 최 여인이 신과 더불어 아버지의 삼년상(三年喪)을 지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임금께 말씀 올리고 다시 모여 살게 하였습니다.“ 이는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1425) 11월 16일 기록으로 사헌부가 이미(李敉)의 유처취처(有妻娶妻, 아내가 있는데 또 아내를 얻음) 죄를 탄핵하고 ”최 여인이 시아버지 삼년상을 치렀으니, 다시 합쳐 살고 새장가를 든 여인과 이혼하라.“라고 내린 판결에 불복하여 ”대를 잇지 못하면 안 되니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다시 상소하자 나라는 이 상소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원 부인과 살지 않는 죄로 곤장 90대를 때렸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조선시대는 대를 잇는 것이 가문에 가장 큰 일로 아들을 낳지 못하면 새 여자를 들이는 일이 예삿일이거니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시아버지 삼년상을 치르면 원래의 아내와 헤어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 장안에 얼마 전부터 이상야릇한 소리 하나가 자꾸만 들려와 그 소리만 들으면 사시같이 떨어대며 식은땀을 줄줄 흘려쌌는 사람들이 있으니 해괴헌 일이다 이는 대개 돈푼깨나 있고 똥깨나 뀌는 사람들이니 더욱 해괴한 일이다 쿵 바로 저 소리다 무대에서는 임진택 명창이 속삭이듯 그의 창작판소리 <소리내력>을 아니리로 시작한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감방장의 제안으로 몰래 오락시간이 펼쳐졌는데, 이날 임진택은 4평짜리 감방에서 10여 명의 죄수 청중을 앉혀놓고 김지하의 담시 <소리내력>을 읊었다. 이렇게 북반주도 없이 목소리를 낮추어 흥얼거려 암송한 담시 <소리내력>이 ‘창작판소리’ 12바탕의 첫 계기가 되리라고는 자신도 몰랐다고 술회한다. 어제 7월 13일 저녁 5시,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7.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에서는 ‘우리시대의 광대’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50돌을 기리는 토크콘서트 <소리의 내력>이 열렸다.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의 이번 공연은 객석이 빈자리가 없었던 것은 물론, 서서 보는 관객들도 제법 있을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운동’을 수행하고자 전공인 외교관의 길도, 좋은 직장인 KAL(대한항공)도 뿌리쳤으며, 전두환 군부 때인 KBS PD시절 청와대에 불려 갔을 때 면전에서 ‘국풍81’ 행사 지시를 거부했던 겁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정통성을 끝내 견지한 민족ㆍ민중예술의 귀감을 창출함으로써 세간으로부터 최초로 ‘우리 시대의 광대’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한국 현대 ‘창작판소리’의 독보적인 존재임은 물론 우리 시대가 낳은, 참으로 독특하고 탁월한 ‘광대(廣大)다.“ 이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우리 시대의 광대’ 임진택 소리꾼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내일 7월 13일 저녁 5시,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7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에서는 소리꾼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50돌을 기리는 토크콘서트 <소리의 내력>이 열립니다. 임진택은 1974년 7월, 서대문구치소 감방 안에서 담시(譚詩) 운율에 맞춰 읊은 소리내력을 시작으로 김지하 시인의 담시 3부작 소리내력, 똥바다, 오적을 판소리로 작창하여 새로운 창작판소리의 시대를 열었는데 올해가 그 50돌 되는 해지요. 임진택은 소리내력, 똥바다, 오적뿐만 아니라 오월광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황제는 태사지신께 감히 고하옵니다.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덕은 커서 만물을 싣고 있고, 공은 높아 백성을 생존케 하시었습니다. 바라옵건대 흠향하시옵고, 복록을 내려 도와주시옵소서. 삼가 희생(犧牲)과 폐백과제와 도량서직粱黍稷)과 여러 가지 제수를 차려 의식에 따라 경건하고 정결하게 받들어 올리옵고, 후토구룡 씨로써 배위의 신주로 삼으니, 바라건대 흠향하시옵소서.” 무대 위에서 황제가 축문을 읽는다. 어제 7월 10일 낮 3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는 2024‘ 국립국악원 대표 공연 <사직제례악>의 언론인들을 위한 프레스 리허설이 열렸다. <사직제례악>이 무엇일까?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뒤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음력 2월과 음력 8월에 땅의 신인 사신(社神)과 곡식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큰제사 곧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올렸다.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보면 ‘우사직 좌종묘(右社稷左宗廟)’라 하고, 임금이 도성을 건설할 때 궁궐 왼쪽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세워야 했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종묘와 사직 나라의 뿌리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활인서는 조선시대 도성 밖 동ㆍ서쪽에 설치하여 돌림병의 치료와 백성에 대한 구휼활동을 담당하였으며, 도성 안으로 유입되는 돌림병의 전파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동활인서는 혜화문에서 광희문으로 한 차례 장소를 이전하였으며, 서활인서는 19세기 후반까지 서소문에 있었지요. 지난 2022년 서울역사박물관은 도시 한양을 여성의 시각으로 처음 조명한 서울기획연구 9 《한양의 여성 공간》 보고서를 펴냈는데 여기에는 활인서 얘기도 들어있습니다. 나라에서는 한양도성에 거주하는 무당들을 도성에서 나가게 하거나 관리하기 위해서 무적(巫籍, 무당의 명부)에 등록한 뒤 활인서에 적절하게 배정하여 구료 업무를 맡게 하였으며, 또한 동과 서 양서(兩署) 인근에 계획된 주거공간인 무녀촌(巫女村)을 만들어 이들을 살게 하였지요. 이들이 살았던 곳에는 활인새 뒤골, 신당동(神堂洞), 무원교(巫院橋) 등이 지명이 남아있습니다. 무녀들은 활인서를 없앨 때까지 무보수로 환자들의 구료ㆍ구휼활동을 책임지고 활인서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무세(巫稅)의 형태로 상납하였는데 무녀들의 활인서 활동은 마땅히 져야 하는 부역에 응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판소리학회(회장 최혜진)는 학술대회 ‘창작판소리와 임진택 소리 50년’을 7월 13일(토) 낮 1시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강의실에서 연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판소리 학계와 공연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광대 임진택이 지난 50년 동안 짓고 부른 창작판소리가 가지는 문학적 값어치와 공연학적 미학, 그리고 문화사적 의의에 대한 주제발표와 토론이 준비되었다. 먼저 이윤선(서남해안포럼)은 [임진택의 소리 내력 반 백년, 판소리의 소리 내력 반 천년]을 주제로 기조발제를 한다. 임진택 창작판소리 50년의 역사와 이를 둘러싼 우리 판소리의 역사, 연희사의 ‘내력’을 살핀다. 제1주제로 이정원(서강대)이 [임진택 창작판소리의 사설에 대한 문학적 접근]을 통해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전 작품을 대상으로 시기별 특징과 예술적 소통 양상을 들여다본다. 다음 제2주제 [비가비 광대 임진택의 판소리 작창과 가창 연구 - ‘소리내력’과 ‘백범 김구’를 중심으로]에서 김수미(서울대)는 임진택의 작창과 가창이 어떤 방식으로 판소리의 주요 값어치인 이면 구현을 실행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마지막 제3주제로는 김소연(성균관대)이 [임진택 판소리 공연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시대의 광대’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50돌을 기리는 토크콘서트 <소리의 내력>이 2024년 7월 13일(토) 저녁 5시,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7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다. 이 공연은 2024년 원로예술지원 프로젝트로 선정되었다. 임진택은 1974년 7월, 서대문구치소 감방 안에서 담시(譚詩) 운율에 맞춰 읊은 <소리내력>을 시작으로 김지하 시인의 담시 3부작 <소리내력>, <똥바다>(1985년), <오적>(1993년)을 판소리로 작창하여 새로운 창작판소리의 시대를 열었다. 올해가 그 50돌 되는 해다. 1990년에는 창작판소리 <오월광주>를 전통 판소리 양식으로 직접 사설을 쓰고 소리를 작창하여 공연했으며, 이후 한동안 판소리계를 떠났다가 심기일전(心機一轉), 환갑을 맞은 2010년 창작판소리 열두바탕 추진을 기획하고 <백범 김구>(2010년)를 비롯하여 <남한산성>(2011년), <다산 정약용>(2017년), <세계인 장보고>(2019년), <윤상원가>(2019년), <전태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애련설(愛蓮說) - 주돈이 연꽃은 진흙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愛蓮之出淤於泥而不染) 맑은 물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아니하니(濯淸漣而不妖) 속은 비었으되 겉은 곧으며, 덩굴은 뻗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아니하니(中通外直不蔓不枝)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으며 맑고 우뚝하게 서 있네(亭亭靜植) 이제 연꽃이 곳곳에 아름답게 피어 있다. 그런데 유학자나 문인들에 앞서 우리는 오히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꽃의 의미를 먼저 가르쳐 주었다. 군자로서 이웃에 맑은 향기를 전해주는 것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더럽다고 하는 진흙탕 속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점을 불경은 가르쳐 주는 것이다. 영산(靈山)에서 범왕(梵王, 불교 호법신의 하나)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고 대중들이 어리둥절할 때 제자 가섭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는데 그것이 ‘염화시중’ 곧 ‘염화미소’라 하며 이후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 연꽃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진흙탕은 욕심과 음모, 번뇌와 괴로움으로 점철된 우리 사바세계를 뜻하고, 연꽃은 그런 유혹과 괴로움에 물들지 않고 마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1430) 3월 5일에 보면 "정부ㆍ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직 벼슬아치들과 각도의 벼슬아치들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세종임금이 토지에 관한 세금제도 곧 공법(貢法)을 시행하기 전 백성들에게 의견을 묻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민투표를 1430년 3월 5일부터 무려 5달 동안 시행한 것입니다. 이에 호조가 공법 시행에 관한 투표의 결과를 보고했는데 17만 여명의 백성이 참여해 9만 8천여 명이 찬성하고, 7만 4천여 명이 반대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는 찬성이 많았고, 평안도나 함경도는 반대가 많았습니다. 그때 인구를 생각할 때 17만 명의 투표 참여는 노비나 여성을 빼고 거의 모든 백성이 참여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모든 정책은 백성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임금의 뜻대로 행해진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을 끔찍이 사랑했던 세종임금은 이렇게 벼슬아치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 뜻을 묻고 그 결과에 따라 공법도 시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전화나 인터넷으로 쉽게 여론조사를 할 수 있지만,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십여 년 전 도쿄국립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오구라컬렉션(小倉 Collection)이 기증한 우리나라 문화유산들이 버젓이 전시되고 있었지요. 오구라는 1922년부터 1952년까지 조선에서 무려 1,100여 점의 문화유산을 약탈해 갔는데 이 가운데 39점은 일본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의 수준 높은 문화유산들입니다. 이 문화유산들은 오구라 사후인 1982년 그의 아들이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그 가운데는 견갑형 청동기, 금관 따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름이 비슷한 ’오쿠라 컬렉션‘은 명치시대의 실업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가 만든 것으로 초대총독 테라우치와 가까이 지내 부를 축적하면서 조선의 문화유산을 다량으로 약탈, 수집하여 일본 처음으로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이란 개인 미술관을 만들었지요. ’오쿠라 컬렉션‘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터석탑 따위가 있습니다. 일본은 12세기부터 1868년 메이지유신 때까지 일본 정치를 지배했던 ’사무라이‘ 탓에 문화가 꽃 피울 수 없었기에 문화 콤플렉스를 가졌고, 문화유산이 돈이 된다는 생각으로 우리 문화유산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