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예절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변해왔습니다. 사람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동안 만들어진 생활의 양식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문화의 한 부분인 인사예절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다르게 변합니다. 지역에 따라 인사하는 방법이 다른 것은 지역, 인종, 시대에 따른 다양성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표현방식은 달라도 남을 처음 만났을 때 인사를 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반가움과 공경의 표현입니다. 어쨌든 인사예절이 나타내고자 하는 근본정신은 시대와 환경이 바뀐다고 해도 언제나 같은 것인데 그것은 자기 자신은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는 마음의 표현이며 실천의 원칙입니다. 전통적인 우리 인사법을 살펴보면 먼저 두 손을 잡는 공수(남자는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듯 덮고, 여자는 오른손이 왼손을 감싸듯이 덮음)를 하고, 공수한 손을 배꼽에 대고 허리를 15도에서 30도 정도 숙여서 합니다. 우리는 남자를 양 여자를 음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공수할 때 남자는 왼손이 위에 여자는 오른손이 위로 가게 포개어 잡았던 것입니다. 남자의 옷과 여자의 옷을 어느 쪽으로 여미는 가를 살펴보
선농제는 농업신인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드리던 국가 제례의식이다. 제사 뒤 임금이 동쪽 교외 적전(籍田 : 임금이 몸소 농민을 두고 농사를 짓던 논밭)에서 오추례(五推禮)를 시행하여 농사의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경적례(耕籍禮) 또는 적전례(籍田禮)라고도 부른다. 선농제 기록은 『삼국사기』에 선농과 중농, 후농의 제사 기록이 처음 나온다. 선농제는 유교 국가의 임금들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천적인 권농책(勸農策)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에서 일찍부터 시행되었다. 선농제는 고려시대엔 음력 1월의 길해(吉亥: 길한 해일)에 지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1월엔 추워서 파종할 시기가 아니라며 경칩(驚蟄) 뒤의 길해로 그 시기를 바꾸었다. 조선시대 선농제는 태종 16년(1416)에 제단이 축조되면서 새 제도가 마련되었으며 세종 12년(1430)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등재되었는데, 그 규모는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으로 고려 때보다 규모가 축소되었다.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선농친제(先農親祭)는 성종대에 처음 행해졌으며 이후 중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