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철종 6년(1855) 12월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 황현은 장수 황씨의 집안으로 조선 초 명재상인 황희의 후손이다. 그의 10대조는 황진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그의 8대조인 황위 또한 병자호란 때 남원에서 의병장으로 나섰다. 그의 가문은 유학의 선비정신에 투철하여 도리와 의리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틈 철저하였으나, 시류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한 가문의 역사속에 황현의 아버지는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시골 땅 광양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고, 그 곳 광양에서 황현이 태어났다. 아버지 황시묵은 한 때 양반가문에서는 잘 나서지 않던 상업에 뛰어들어 가산을 불리기도 하였으나, 양반가문으로 집안 분위기 일신을 위하여 1850년 쯤 광양으로 이사하였다. 광양에 터를 잡은 황시묵은 선비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집안에 유교경전과 1천여 권의 다양한 책을 갖추어 놓고 인근 마을의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런 환경에서 황현도 유학과 선비의 길에 들어섰다. 황현의 스승은 왕석보(1816 ~ 1866)로 경학과 시에 뛰어났던 인물이다. 왕석보는 황현이 11살 때 지은 시를 보고 매우 놀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한국인의 풍수지리학에 대한 관심은 이땅에 터를 잡고 집짓고 살면서 부터로 생각된다. 한국은 사계절이 분명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렸하고 겨울 추위와 여름 더위가 매우 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여름이면 더위와 함께 매우 습기가 많아 견디기 어렵고, 겨울은 메마른 혹독한 추위가 심하여 또한 견디기가 어려운 자연환경이다. 이러한 자연조건은 사람이 사계절을 살아야 하기에 그 대비책을 세우기가 매우 어려우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은 그 어느 곳에 사는 사람들 보다 더 예민하고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 또 이런 곳에 사는 동식물도 특별하여 동물들은 민첩하고, 식물은 뿌리와 열매에 특별한 약효가 있다고 한다. 이런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은 자연을 탐구하였다. 추위를 잘 넘기기 위하여 집안에 불기운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여, 이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없는 온돌(구들=구운돌)을 발명하여, 불기운을 방바닥으로 보내어 방안을 따뜻하게 하고, 그 냄새, 연기와 먼지가 가득한 불기운 찌꺼기는 방바닥을 거쳐서 뒤쪽 굴뚝으로 빼내는 기술을 수천년 전부터 연구 개발하여 극도로 발전시켰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가을도 저물어가는 11월 하순이다. 이제 남쪽에만 남은 단풍잎이 조금 남아서 마지막 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산천에는 어디에도 절이 없는 곳이 없지만,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잘 어울려진 절을 찾기는 그리 쉽지많도 않다. 한국의 산하에는 오래되고 유서깊고 장대한 절들이 전국 방방곡곡 많고도 많았지만 전국토를 휩쓸고간 전쟁의 상처로 대부분 절들이 없어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뜻있는 스님들이 나타나 다시 복원불사를 진행하여 그나마 오늘날 볼 만한 절들이 들어섰다. 광양의 성불사 또한 그런 역사의 상처를 이겨내고 오늘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성불사는 이름 그대로 「부처를 이루는 절」이라는 뜻으로 이 절의 부처님은 석가모니의 제자였던 미륵을 모시고 있다. 불교의 창시자는 석가모니인데 그는 인도에서 왕자로 태어나 세상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왕위였지만, 그는 그 예정된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부처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미륵은 석가모니의 제자였으나 세상의 인연이 짧아 석가모니 보다 먼저 타계하였는데, 그가 미래 이 세상에 올 것이라는 석가모니의 수기예언에 따라 불교에서는 미륵을 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남해 여수 향일암은 예부터 한국인의 관음보살 기도처로 유명하다. 향일암은 본래 백제말기 의자왕 4년(644)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하는데, 창건당시에는 원통암이라 불렸다. 원통암이란 관세음보살을 모신 암자라는 의미이다. 그런 원통암이 고려 광종9년(958)에는 윤필거사가 금오암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조선 숙종 41년(1715)에는 인묵대사가 향일암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전한다. 향일암이란 늘 해를 보고 있는 암지라는 의미다. 향일암은 한국내 관음신앙의 이름난 기도처이기에 언제나 붐비는 암자다. 향일암은 돌산갓으로 유명한 여수반도에서 떨어진 돌산도의 남쪽 끝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옛날에는 반드시 배를 타고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돌산도가 현대적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지금은 언제나 수시로 오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온통 암벽으로 둘러싸인 곳 험준한 산 꼭대기에 있기에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다시 지은 주차장에서 가파른 계단길로 15분 정도는 올라야 하며, 암자로 오르는 길부터 암자의 구석구석이 모두가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기도를 위한 전각을 짓기도 매우 어려운 곳이다. 그런 험한 곳을 다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한국의 남해안은 수많은 돌섬들이 많이 있어 섬이 많은 바다라 하여 다도해라고 부른다. 남해안 중에서도 순천만은 갯뻘이 펼쳐진 드넓은 뻘밭에 갈대가 가득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 앞의 산들은 육지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바다에 솟아나 있는 섬들이 겹겹이 펼쳐졌다. 오늘 보는 순천만 해넘이는 갯뻘 사이에 순천시내를 지나온 동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 굽이쳐 흐르는 동천에 고깃배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해걸음에 동천을거슬러 올라오는 고깃배의 귀가모습과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와의 조화가 가장 아름다운 순천만 해넘이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시대에 지은 것으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귀한 건축물이다. 고려시대 건축물로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릉 객사문, 수덕사 대웅전, 그리고 북한 황해도 성불사 응진전이 남아있는데 이들 가운데 가장 큰건축물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이다. 안타깝게도 전란과 화재로 훌륭한 우리의 건축물들이 많이 사라져 갔지만, 그런 고난의 세월을 피하고 살아남아 고려시대 선조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을 오늘에 전하고 있어, 고려시대 사라진 건축물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은 오래된 옛날일수록 문물이 발달되지 않아서, 기술이 뒤떨어졌을 것으로 생각하며, 건축물도 작고, 그 꾸밈도 단순하였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한국에 남아있는 옛 건축물들을 살펴보면, 오래된 것일수록 그 아름다움이 더 하고, 건물의 꾸밈 또한 복잡하고, 예술적 감각이 오히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을 살펴보면, 건물의 기본 구성요소인 기둥과 보와 도리의 짜임을 보아도, 기둥은 주춧돌 위에 반듯하게만 세워도 될 것을 둥근기둥을 배흘림으로 단아하고 우람하게 다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삼밭의 삼나무가 빼곡하듯 많은 스님이 수행했다고 하여 유래한 마곡사의 가을이다. 조선말 나라의 국운이 위태로울 때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의 낭인을 처단한 김구 선생이 잠시 스님으로 머물러있었던 절로도 알려진 유서 깊은 곳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강원도 양양하면 설악산과 동해바다를 옆에둔 곳으로, 양양의 고찰이라면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난 뒤 지었다는 낙산사만 생각하기 쉬우나, 역사적으로는 낙산사에 못지 않은 고찰도 여럿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절로 오늘은 진전사터 돌아본다. 진전사는 한국땅에 선종의 씨앗을 뿌렸던 가지산파의 초조인 도의국사의 승탑과, 그가 세상을 뜬 뒤 세워진 삼층석탑만이 남아있는 절터다. 현재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은 선종을 표방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한다면 진전사를 창건했던 도의국사는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종조라고 할수있는 것이다. 양양의 진전사는 도의국사의 자취뿐 아니라, 도의국사의 뒤를 이은 염거화상과 송광사에서 선종의 꽃을 피웠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스님으로 입문한 절이며, 삼국유사를 지은 고려시대 일연선사가 스님이 된 곳이기도 하다. 진전사는 기록상 1467년까지 있었다고 하나, 이후 언제인지 폐사되어서 절의 유무에 대한 언급된 흔적이 없이 내려오다가, 일제강점기에 둔전사로 개창되어 다시 절이 되었다. 이후 주변에서 흩어진 기왓장에 진전(陳田)이라 새겨닌 기와조각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바로 신라때 창건된 진전사임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강원도는 백두대간의 높고 험한 산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뻣어내리면서 동쪽에 동해바다를 두고있고, 서쪽으로는 첩첩산중 아주 험한 산지로 되어있다. 백두대간의 산줄기는 해발 1,000m를 넘나드는 산들로 동서를 넘나들려면 어디에서든 1,000m의 고갯길을 넘어야만 하였다. 이처럼 백두대간의 동쪽과 서쪽은 험한 산세로 말미암아, 옛날에는 한번 넘기가 평생에 한 두 번도 하기 어려웠을 첩첩산중이었다. 그런데 그 험한 첩첩산중에도 부처님의 뒤를 이어 우주의 진리를 깨쳐보겠다는 스님들의 발자취가 있으니, 당시 스님들의 일념에 경의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미천골은 강원도 양양의 깊은 산골로, 백두대간의 동쪽에 있으면서도 찾아들기 매우 어려운 산골짜기였다. 지금은 사통팔달 길도 잘나있고,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고속도로까지 나있어 쉽게 찾았지만, 선림원지가 크게 융성하던 신라말에는 참으로 찾기 힘들었을 험한 곳이었다. 이곳 선림원터에는 신라말 홍각선사라는 스님이 있어 수많은 스님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를 찾아온 스님들이 많아, 스님들이 먹을 밥을 짓기위하여 쌀씻은 물이 계곡아래까지 흘러내려와 물색깔이 하얗게 변하여 이곳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어느덧 추분이 지나고 해가 짧아지는 가을이 깊어 간다. 오랜 장마와 코로나19로 모두가 지쳐있지만, 세월의 흐름은 한치도 변함이 없이 흘러감을 느낀다. 아침저녁 서늘함과 낮에는 파란 하늘이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느끼게 한다.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란 곡식을 거두어 풍요롭고, 풍경이 아름다운 가을을 말하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곡식을 거두어 식량이 넉넉하고 기르던 말이 살찌면 그 말을 몰고 전쟁터로 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라고 하니, 무더위가 갔다고 반기기만 할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지금은 다행히 말타고 전쟁터로 나갈 일은 없으니,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을 맞이하여 잠시나마 가까운 서울 남산골한옥마을에 들러 옛 조상들의 삶을 돌아보고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