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름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연꽃들도 이제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꽃의 열매인 저 연밥속에 들어있는 씨앗이 새 생명이 다시 새싹이 되어 돋아나는 내년 봄을 기약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만이 세상의 진리임을 다시 한 번 느껴봅니다.
[우리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서기 600년대 백제 익산지역에 세워졌던 미륵사는 9층목탑과 더불어 9층석탑도 지어졌다. 석탑은 목탑에 비해 그 규모는 작았지만, 돌을 다듬어서 탑을 쌓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그 작업은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석탑은 가운데 세운 목탑의 좌우에 세우되 그 형태는 목탑의 형태를 흡사하게 하면서도 장식은 간략화 하였다. 그 재료는 돌(익산에서 나오는 황등 화강석)이었으나, 마치 목재로 집을 짓듯 땅을 다지고 기단을 만들어 기단위에 주초석을 앉혔다. 또 목조건물의 구석과 가운데는 3칸 집처럼 4개의 돌을 기둥처럼 세우고, 그 위에는 목조건축물처럼 처마에 장식성과 장엄성을 표현하는공포를 두었다. 각층 맨 위지붕은 기와집처럼 경사지고, 처마는 곡선을 잡아서 다듬고 이를 마치 장난감 레고블럭을 쌓아 올리듯 9층까지 이르게 하였다. 맨 위에는 철제로 만든 찰주와 아름다운 상륜부를 세워 완성하였다. 이곳에 쓰인 돌들을 발굴해보니, 돌 하나의 무게가 2톤이 넘는 돌들도 많았다. 그렇게 크고 무거운 돌들을 정교하게 다듬는 일도 참으로 난해한 일이지만, 그 무거운 돌들을 어떻게 10m이상높이 까지 올릴 수 있었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0여년 전까지만 하여도 익산 미륵사지에는 텅 빈 미륵사지에 쓰러져 가는 모습으로 겨우 서있는 모습의 서쪽 석탑만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탄압받다보니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방치된 모습으로 수 백년의 세월이 흐르고 보니 목탑과 금당을 비롯한 모든 목조건축물은 자취도없이 사리지고,비바람 불에도 강한 석탑마져도 기울기 시작하여, 동쪽에 있던 석탑은 탑을 모든 석재가주변에 널부러지고 수 백년동안 흙먼지가 불어와 덮여서 그 위에서 주변 사람들은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다. 그런 뒤 조선이 망한뒤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와서 보니, 미륵신앙의 성지였던 이곳은방치된 미륵사터에는 무너져 내리는 서쪽의 석탑만이너무도 안타까운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런데 석탑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보물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였을 것인데, 그 흩어진 모습을 보니, 탑에불사리를 모시는 곳은 석탑의 가장 높은 부분인상륜부 근처였기에 저 미륵사지서쪽에 쓰러져가는 석탑에는 사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무너져 내려누군가 가져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서 고정시켜놓은 모습이었다. 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괘불은 불교전각의 내부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각밖에서 큰 행사를 할 때 그 행사에 부처님이 와서 계시다는 것을 뜻하기 위하고, 더욱 행사가장엄하도록 하기위하여걸었던 불화이다. 이러한 괘불은 대웅전 앞에 괘불대를 세우고 걸었고, 행사는 대웅전 앞 마당에서 주로 했다. 그 행사는 주로 영산재 수륙재 등에 내걸었으며, 더러는 가뭄에 비를 내려달라는 기우제에도 걸었다. 괘불의 내용은 주로 영산회상도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축약시켜서 그렸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하늘의 천신들과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보살들이 모두 나왔다고 하며, 우주 공간에서 악귀의 출몰을 제지하는 사천왕들이 그려져 있다. 부처님은 중앙에 서있는 모습으로 그렸고, 좌우 상부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를 5명씩 나누어 그렸으며, 그 아래에는 불법을 수호한다는 8대보살(문수, 보현, 관세음, 대세지, 미륵, 지장, 허공장, 금강장)을 배치하고 있다. 또 보살과 별도로 천상의 신을 대표하는 범천과 제석천이 중단의 아랫부분에 좌우에 있다. 그리고 맨 아래 하단에는 공간세계를
감모여재도는 사당이 없는 경우에 사당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 그림으로 이동식 사당의 역할을 하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유교국가였던 조선은 임금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하여는 효를 가장 중시 하였다. 그런데 임금과 부모는 살아있을 때만이 아니라, 죽은 선대 왕과 선대 조부모에 대하여도 똑 같이 중요시 하였다. 이에 조선은 초기에 국조오례의를 제정하여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의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였고, 그중에 길례(吉禮)는 제사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제사는 하늘에 사(社), 땅에는 제(祭)를 사람에게 지내는 제사는 향(享)을 문선왕인 공자에게는 석전(釋奠)이라 하여 대상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 불렀다. 국가가 정한 의례에 따라 거행되는 제사에 쓰는 그릇은세종실록의 "국조오례의" "제기도설"에 의거하면 35종의 제기가 있었다. 여기에 정한 제기는 모두가 금속으로 만든 것이었다. 또 국조오례의 "제기도설"에 정한 각종 제기는 고대 중국의 예서에서 그 영향을 받아 정한 것이다. 이렇게 정한 금속제기는 태종 이후로 금속의 공급이 부족하게 되자 세종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해질무렵 국보289호 익산왕궁리오층석탑에 섰다. 노을과 석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왕궁리란 지명은 바로 이곳에 옛마한시대 왕궁이 있던 곳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기자가 어릴 때만 해도 지명이 왕궁리 일뿐 이곳이 왕궁터가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다. 대신 왕궁리 낮은 언덕 위에는오층석탑만이 있었다. 그때만해도 석탑이 있던 절의 이름조차 알 수없는 상태였으나 지금도 절이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다만, 이 탑이 왕궁리라는 동네에 서있기에 왕궁리오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이렇게 아름답게 잘지어진 탑이 있건만 지금도 석탑이 있던절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탑의 역사를 알기 위하여 탑을 완전 해체하여 땅속에 묻혀있던사리장엄구까지도 발굴조사했지만,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조각 하나 나오질 않아서, 지금도 왕궁리오층석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탑은 백제계의 조형성을 갖춘 고려시대 초기의 탑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탑의 내력이다. 백제시대 석탑양식은 근처에 있는 익산 미륵사탑과 부여 정림사지석탑과비슷하기에 그렇게 보는 것이고, 돌을 마치 나무로 집을 짓듯이 기둥모양과 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덥던 여름이 한풀 꺾이고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 땅속에도 그 바람이 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이 있다. 꽃무릇이다. 꽃무릇은 땅속에서 무더운 여름을 견디다 찬기운이 땅으로 스며들면 그 찬기운을 알아차리고두껍고 딱딱한흙을 뚫고푸른 꽃대를 솟아올리고 그 꽃대 끝에 열정으로 가득한빨간 꽃을 피운다. 이렇게 피어나는 꽃무릇은 꽃대는 올라오지만 다른 풀처럼 잎은 보이지 않는다. 특이하게도꽃을 피우기 위해서 솟아나는 줄기는 꽃만 피우고 시들어버린다. 그리고 그 꽃이 진 다음 뿌리에서다시 푸른 잎이 자라나 추운겨울동안 푸르게 있다가 봄에 다른 초목이 푸르게 싹을 티우면 꽃무릇의 푸른 잎마저시들어버린다. 그리고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여름내 땅속에 잠들어 지낸다. 보통 초목과는 반대로 살아가는 꽃무릇의 정체가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 독특한 생태는 삭막하게 변해가는 가을 한철을 꽃세상으로 바꾸어주고, 그 붉게 피어나는 열정적인 색과 독특한 꽃송이는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그것도 몇송이가 아니라 온 절주변과 계곡을 뒤덮어 버리는 꽃무릇 세상은 남쪽 지방 고창 선운사와 영광 용천사, 영광 불갑사를 물들이는데, 앞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에 작지만 아담하고 품격이 있는 사찰 세심사가 있다. 세심사는 중생들의 찌든 마음의 때를 싯어낸다는 의미가 있으니,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한 번쯤은 방문해 보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라 생각된다. 세심사는 염치읍의 산에 자리 잡은 절인데 염치읍(鹽峙邑)이란 이름이 지금 보기에는 대부분 평지인 이곳에 무슨 고개가 있나 싶은 생각에 의아하게 생각되지만, 옛날에는 봇짐장수들이 서해안에서 생산된 젓갈이나소금을 이고 지고 넘나들던 소금고개인 것이다. 영인산 자락에 안겨있는 세심사는 전각으로는 대웅전, 영산전, 산신각, 종각 그리고 누각이 있고, 스님이 거하는 요사채가 있는 아담한 절인데, 아담한3칸짜리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재현한 탱화가 있고, 소조상으로 석가삼존불과 깨달음을 얻었다는 16아라한이 조성되어 있다. 영산전이란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다는 것에서 따온 전각의 이름이고, 법화경을 설법하는 과정에서 많은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법화경은 많은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덥던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덧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가을의 문턱에 이르렀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숨이 막히고 기운도 빠져 하루하루가 지겹게 느껴지고, 제발 빨리 여름이 지나가기만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바뀐 날씨에 아침 저녁 서늘한 기운이 돌고보니, 이제는 살만하다는 느낌과 더불어 앞으로 다가올 추위가 문득 걱정이 된다. 이렇게 바뀌는 겨절의 변화를 실감하면서, 오백나한전의 전설이 있는 무등산 증심사를 찾았다. 증심사 대웅전 앞마당과 뒷뜰에는 이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배롱나무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배롱나무꽃에는 그동안 백일 가까운 여름내 화사하게 경내를 장식하였고, 이제가을을 재촉하는 빗방울이 맺혀있어 함초롬하기도 하였다. 증심사는 광주 무등산 남쪽자락에 있는 아담한 절인데, 본래 개창은 통일신라 후기 헌안왕 때인 860년 철감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후 1094년 고려 선종때 혜조국사가 중수하였다고 하나. 이후 차츰 쇠락하게 되었다.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고세종시절 전라관찰사 김방이 인근에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에 필요한물을 공급하여 계속된 가뭄을 극복하고자 2년 여에 걸쳐 저수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특별한 더위로 곤역을 치른 올 여름이었다. 그래도 세월은 어김없이 흐르고 흘러서 이제 더위는 한풀 꺾이고, 아침 저녁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소나기가 몇 차례 내리더니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몰려 다니고 공기도 상쾌하고 하늘은 청명해졌다. 바야흐로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화순 만연사는 800년의 역사를 품은 절로 절 경내에 심어진 배롱나무 거목에 여름내 경내를 아름답게 장식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작지만 붉은꽃이 오랫동안 피는배롱나무는 나무 줄기가 미끄럽다하여 원숭이도 미끄러지는 나무라고도 하며, 그 붉은꽃이 100일동안 핀다고 하여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한 번 핀 붉은 꽃이 백일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연달아서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포도송이처럼 한송이의 꽃이 아래 꽃송이 아래 부터 위까지 피는데 한송이가 며칠씩 피어있으니 전체적으로는 백일동안 붉은 꽃들이 계속해서 피어있음으로 백일동안 화사한 꽃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한국절 대웅전 앞에는 이 목백일홍인 배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곳 화순의 만연사의 백일홍이 꽤 유명하다. 만연사의 배롱나무에는 특별히 백일홍이 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