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산회상도가 그려진 괘불을 걸고, 주변에는 휘장과 오색천을 걸어서 장소를 성역으로 장엄하였으며, 괘불의 아래에는 불단과 공양물을 진설하였다. ▲ 영산회상도 앞에서 영산재가 열리는 공간을 신성화 하기위한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영산재가 열리는 곳으로 영혼을 모시기 위하여 영혼을 부르는 의식을 거행한다. 모신 영가들을 영산재가열리는 장소로 이운하는 과정(가마 안에는 영가들이 있다고 봄) ▲ 영가를 모셔와 영산회상도에 모셔진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부모나 일가친지들의 영가를 함께 모시기도 한다. ▲ 스님들이 영산회상이 잘되도록신성화하기 위한 의식을 거행한다. | ▲ 스님들이 영산회상에서 설법을 듣고, 또 시간이 되어 영산회상의 신성공간에서 공양을 하는 것 자체도 의식의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보시를 하는 것도 공덕이지만 보시를 받아주는 것도 또한 공덕이 되는 것이다. ▲ 열지어 앉은 스님들이 자신이 먹을 식사량만큼씩의 음식공양을 자신의 바루에 받고 있다. ▲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기쁨에 넘쳐서 꽃을 들고 춤을 추는 모습 1 ▲ 영산회상도 앞에서 스님들이 설법을 듣고춤을추는모습 2
▲ 부로콜리 농장의 모습 ▲ 길고 긴 부로콜리 고랑 ▲ 곁가지를 따주는 농부들 ▲ 곁가지 따는 농부들 ▲ 작업하기 힘들다는 도시농부 ▲ 곁가지를 따기 전 부로콜리 곁가지가 많은 것은 5~6개씩도 생겨난다. 이런 곁가지를 따주어야만 한송이 탐스러운 부로콜리가 맺게된다. ▲ 곁가지를 딴 후 부로콜리 곁가지를 제거한 부로콜리 포기는 이제 크고 탐스러운 한송이를 맺게 될 것이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여름철이면푸른 꽃송이가 맺힌 부로콜리는 영양가 있고 맛도 좋은푸성귀로 인기가 높다. 도시인들은 그런 부로콜리가 어찌 생겼는지는 그저 탐스럽게 생긴 부로콜리 한송이로만 알지만, 그 부로콜리가 농장에서 심어지고 가꾸어지고 생산되기 까지의 수고를도시인들은 알지 못한다. 그저 밭에다 심어만 놓으면 아름답고 탐스럽고 토실토실한 부로콜리가 열리는 줄 알 뿐이다. 그래서 부로콜리 농장을 찾아가 하루 일손을 도우면서 어떻게 키워지는지를 알아보았다. 우리가뜨거운 물에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먹는부로콜리 송이는 부로콜리가 열매를 맺기 위하여 피우는 꽃송이로, 그 꽃송이가 활짝 피기 전에 꽃을 가득품은 송이가 벌어지기 직전에 싱싱한 푸른송이를 따서 시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이 쇠북과 쇠불걸이 공주 갑사에 소장되어 있던 것으로 절에서는 요사채 처마밑에 걸어두고각종 신호를 할 때 쳤다고 한다. 이를 테면 공양(식사)시간, 또는 공동 운력(노동), 회의알림 등 절간이 넓어서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부르기보다는 쇠북을 침으로써 절내 모든 곳에 있는 스님들이 알아듣고 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쇠북은 아래 받침이 해태상이며 가운데 북을 걸고 북의 주변에 청룡과 황룡이 서로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태로 만들었는데 그 섬세한 조각기법과 디자인 감각이 현대에 비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고 세련되어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불교미술실에 전시 중이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 군데군데 덧을 설치한 죽방렴 ▲ 죽방렴의 상세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옛날 부터 전해내려오는 고기잡이 방법이 있는데, 사진과 같은 방법의 어로법을 죽방렴(竹防簾)이라고 합니다. 대나무 어사리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방전으로 불렀습니다. 죽방렴(竹防簾)이란 대나무발을 짜서 썰물을 따라 내려오는 물고기를 대나무 발로 가두어서 잡는 오래된 어로방법입니다. 밀물을 따라서 올라왔다가 썰물을 따라 다시 바다로 가다가 넓은 입구쪽으로 잘못 들어가면 결국 저 좁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다시는 바다로 가지 못하고 갖혀서 죽는 것이지요. 고기잡이는 3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지며, 5월에서 8월 사이에 멸치와 갈치를 비롯해 학꽁치장어도다리감성돔숭어 따위가 잡힙니다. 그 가운데멸치가 80% 이상인데, 이 죽방령에서 잡힌 멸치는 죽방멸치라하여 최상품으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넓고좋은 길인 줄 알고 가지만, 자칫 한발짝 잘못들여놓으면 저 신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느 길이 살 길이고 어느 길이 죽는 길인지 깊이 잘 생각하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저런 죽방렴(竹防簾)이 옛날에는 많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경남 남해 창선교 부근
▲ 용문사 일주문 ▲ 용문사 일주문 ▲ 용문사 승탑 ▲ 용문사 대웅전의 용머리 ▲ 용문사 위에서 본 전경 ▲ 용문사 지장전의 지장보살과 협시 그리고 지옥의 10대왕들 ▲ 용문사 대웅전 ▲ 용문사 대웅전 ▲ 야외 지장보살 상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대부분 경상도와 남해일원에는 관세음보살이 중생들과 가깝다. 그런데 귀하게도 지장보살과 중생이 가깝게 접하는 절이 남해 용문사다. 절에 가면 누구나 맨 먼저 찾는 보살이름이 관세음보살인데, 관세음보살은 현생의 중생들의 삶을 보살피는 보살이라면, 반면에 지장보살은 현생에서 삶을 다 살고난 후에저승으로 간 중생중에서도 지옥에 떨어져 현생의 죄과를 각종 지옥의 형벌로고통받는 중생들의 구제와 천도를 주관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그 모습이스님처럼 머리를 빡빡 민 보살로 6개의 고리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는데, 이를 육환장이라고 한다. 그는자신의 성불을 뒤로 미루고 지옥의 중생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어떤 지옥도 마다 않고 찾아 나선 보살이라하니, 그 서원이 하도 넓고크다 하여 대원본존지장보살이라 한다. 한 많고 이세상을 아무리 잘 살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세상살이 살다보면 크고 작은
▲ 보리암의 일출 ▲ 보리암의 해우소 ▲ 보리암의 풍광 ▲ 제석봉에서 본 보리암 ▲ 보리암 풍광 ▲ 보리암을 담는 사진작가 ▲ 보리암을 바라보며 ▲ 보리암의 전경 ▲ 보리암을 품은 금산 ▲ 보리암의 해수관세음보살 ▲ 해수관음을 향하여 ▲ 해수관세음보살과 주변 산세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아름다운 한려해상국립공원 남해 보리암을 다녀왔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이니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명소이다. 보리암이 있는 곳은 남해 금산인데, 그 금산은 비단으로 드리운 산이란 뜻이다. 그런데 금산으로 불리게 된유래가 각별하다. 본래 이곳에는 원효대사가 세운 보광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산이름은 보광산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 고려의 장군으로 왜구들을 물리치고 이곳 보리암에서 1백일 기도를 드린 적이 있는데 그 때 그가 기도하길 만약 훗날 임금이 된다면 산을 전부 비단으로 드리우겠다는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임금이 된 뒤에는 그 큰 산을 비단으로 드리울 방도가 없어 고민하다가, 누군가의 조언으로 산 이름을 바꾸어 금산(錦山)으로 바꾸어 부르게 하였고, 그 이후로 금산이 되었다고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 숙정문에서 한숨을 돌리고 백악봉을 향하여 다시 길을 나선다. 한양성의 북문 숙정문을 끼고 돌아 북쪽으로 오르면, 여기서부터는 신분확인을 한 뒤에야 오를 수 있다. 각자의 신분증을 제시한 뒤 번호명찰을 받아야만한다. ▲ 성벽 밖을 따라가다가 다시 성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구름다리를 넘어야 한다. 이곳은 성곽의 가장 험한 부분으로, 성안 남쪽으로는 경복궁과 한국의 심장부가 있는 곳이기에 삼엄한 경비와 외곽으로는 철책이 설치되어있는 것이다. 침투와 방어를 위하여 설치한 성곽의 밖으로 철책선까지 드리우고 보니 철옹성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그래서 아무나 무단으로 갈 수 없게 통제하고 있다. ▲ 무너진 성벽을 보강하여 쌓은 성벽과 여장 백악을 주봉으로 한 한양성의 가장 가파른 길이 바로 이곳이다. 처음에는 성을 쌓기도 힘들었을 것이나, 그 쌓았던 성벽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다시금 쌓았다. 처음 성벽과 다시 개보수한 성벽의 돌들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성을 쌓는 기법만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 가파른 성벽 가파른 성곽을 지나서 내려다본 성벽 ▲ 1.21사태 때 입은 상처, 총알맞은 소나무 196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우리 나라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불보살로 알려진 보살상이 금동미륵보살 반가상사유상이다.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2점이 국보로지정되어있다. 2점 가운데가장 널리 알려진 보살상은 국보83호로지금은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으로 출타 중이시다. 지금 그곳 한국미술전에 출전하여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 소개하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이 작품은 국보78호다. 국보 83호와 국보 78호는 미륵보살이고 만든 재료도 동으로 만든 조각상에 금을 도금한 것이며, 앉아있는 자세와 크기도 비슷하나,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가 다르고, 몸에걸치고 있는옷이 차이가 난다. 그러나 둘 다 아름답고 세밀한 주조기법이 매우 우수하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과연 인간의 모습을 초탈한 듯 하여 보는 이를 감동시키는데는 차이가 없다. 미륵보살은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지금은 하늘나라 도솔천에서중생들을 보살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머나먼 훗날 바로 이곳 지상으로 나투시어 미륵불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천상에 있는 미륵보살의 지상에 구현한 모습이라 생각하고 음미하면서 감상하길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두물머리 양선자 아직 아침 햇살 비치기 전 어둠 저 편에서 부지런한 채비 채리는 자네 스며 들 것인가 함께 흘러 들 것인가 묻지 말게 다만 함께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향하여 가볼거나. 두물머리의해돋이를 보기 위해 오는 이들이 많다. 여명에서 해돋이 시간까지 카메라 렌즈를 맞추고 기다리는 시간은 강태공이 낚시대를 드리우고 무심한 강물의 흐름을 응시하는 기분과 견줄 수 있을까? 지난 4월, 진도 앞바다 물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물머리 해는 오늘도떠오른다. 무엇을 비추자는 것인지...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기자] ▲ 해체이전의 미륵사지 서탑 ▲ 미륵사지의 조감도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무왕이 선화공주와 사자사로 가는 도중 이곳 용화산 밑을 큰 연못을 지나다. 갑자기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행차를 멈추고미륵불에 예불을 드린 후선화공주가 미륵불을 모실 사찰을 짓도록무왕에게 건의하여 이곳에 절을 짓게되었다고 한다. 미륵사는 익산시 금마면 용화산(미륵산)아래 자리한 백제시대 사찰로 역사적으로 볼 때,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의 그 어느 절 보다도 그 권역이 넓고 컷던 절로 발굴조사 결과 판명되었다. 미륵사는 3원가람(중원, 동원, 서원)으로 절의 권역을 3구역으로 나누어 각 권역마다 금당과 탑으로 구성하고, 각각의 권역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근정전 처럼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 서 석탑의 해체후 모습(현재) ▲ 해체한 석탑의 돌들 ▲ 미륵사 주변에 흩어져 있던 동탑의 돌들 미륵사가 3개 권역으로 나누어진 연유는 불교의미륵신앙에 근거하는데 미륵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였으나 석가모니 부처님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미륵이 세상을 뜨기 전에 미륵에게 수기하기를 미륵은 다음생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