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호의 좋은 경치 이 누대에 있으니(西湖形勝在斯樓) 마음대로 올라가서 흥겹게 노닌다네.(隨意登臨作遊遊) 서쪽 언덕 비단옷 입은 이 봄풀과 어울렸고(西岸綺羅春草合) 강물 가득 빛나는 푸른 물빛 석양 속에 흐르네.(一江金碧夕陽流) 구름 드리운 작은 마을엔 배 한 척 숨어 있고(雲垂短巷孤帆隱) 꽃이 진 한가한 낚시터에 멀리 피리소리 구슬퍼라.(花落閑磯遠笛愁) 끝없는 바람과 연기 거두어 모두 사라지니(無限風烟收拾盡) 시 담은 비단 주머니 그림 난간 가에서 빛나네.(錦囊生色畵欄頭) 이 시는 조선시대 여성으로 금강산을 오른 김금원(金錦園, 1817~?)이 지은 〈강사(江舍)〉라는 시입니다. 금강산! 지금은 갈 수 없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숱한 시인 묵객과 화가들이 금강산에 올라 시를 짓고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금강산을 오른 사람 가운데 흔적을 남긴 여성은 어쩌면 김금원이 유일할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사대부 출신이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기생이라 그녀 역시 기생의 삶을 살게 된 여인입니다. 그런 김금원이 열네 살 때 남장하고 금강산을 여행하는데 그때 보고 느낀 것을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라는 책에 남기는 등 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서울만 보더라도 2025년 현재 394개의 버스노선을 운행하고 있는데 간선이 135개, 지선 208개, 광역 10개, 순환 2개 노선 등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울 곳곳을 버스가 누비고 있는데 맨 처음 서울에 버스가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요? 그것은 1928년 4월 22일로 경성부는 일본에서 만든 우즈레라 불리는 버스를 도입했습니다. 이 버스는 정원이 22명이었으며, 요금은 구역별 7전이었다고 하지요. 경성부에서 버스사업을 했기 때문에 부영버스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 전차는 120대였는데 이용객은 11만여 명, 버스는 40대 정도로 버스 이용객은 1만여 명이었는데, 그때 경성 인구가 39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버스가 다니는 노선은 경성역(현재의 서울역)부터 총독부(경복궁 앞부분을 헐고 지음) 앞까지 다닌 제1구와 총독부 앞에서 대화정 1정목(헌병대 사령부 앞, 현 남산골한옥마을 자리)까지 다니던 제2구가 있었습니다. 부영버스는 손님을 끌기 위해 차표를 끊어 주는 아가씨 차장들을 버스에 태워 장안의 큰 이야깃거리가 되었지요. 신식교육을 받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전 참의 윤선도는 심술이 바르지 못하여 감히 음험한 상소문으로 상하의 사이를 너무도 낭자하게 헐뜯고 이간질하였으니, 그 죄 빠져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중한 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겠으나 차마 죄주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 그냥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내쫓으라." 이는 《현종실록》 2권, 현종 1년(1660년) 4월 18일 기록으로 윤선도를 유배하라는 현종의 명입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이라 /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라는 시조 ‘오우가(五友歌)’로 알려진 조선시대 문신이며, 학자입니다. 윤선도는 위 기록처럼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당대의 권력자 송시열이 효종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서인세력과 함께 복제문제로 효종을 서자 취급하는 데 격분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험난한 25년의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숙종 때 송시열이 처벌받은 뒤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지요. 또한 윤선도는 “음식이란 배를 채우는 것으로 족하고, 의복이란 몸을 가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라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진헌색(進獻色, 중국 황제에게 특별한 선물을 할 때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둔 임시 관아)을 설치하여 여자아이)를 모으고, 조정과 민간의 혼인을 금하였다.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남재(南在)ㆍ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함부림(咸傅霖)ㆍ한성윤(漢城尹) 맹사성(孟思誠)으로 제조(提調)를 삼고, 경차관(敬差官,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벼슬)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처녀를 뽑게 하였는데, 천한 백성과 노예를 뺀 양갓집 처녀 13살 이상 25살 이하를 모두 고르게 하였다.“ 위는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1408년) 4월 16일 자 기록으로 중국 황제에게 선물하기 위해 조정과 민간의 혼인을 못 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에 왕비나 세자빈과 공주의 사위를 고를 때 온 나라에 금혼령을 내린 줄 압니다. 그런데 위 기록을 보면 중국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 금혼령도 내려 양갓집 처녀 13살 이상 25살 이하는 모두 혼인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지요. 심지어 고려시대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나라가 고려에 공녀를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특히 충렬왕은 고려 여성들을 공녀로 보내기 위해 금혼령을 내리고 13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최근 뉴스를 보면 “'또 대형 씽크홀'…부산 사상구 횡단보도서 깊이 5m 땅꺼짐”이라는 제목이 보이고, 또 “강동구 싱크홀 예고된 인재…지반침하 안전지도 공개하라”라는 기사 제목이 보입니다. 그런데 한 제목 안에서도 씽크홀ㆍ땅꺼짐ㆍ지반침하가 같이 나오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씽크홀’을 다음백과에서 찾아보면 “지표면이 여러 요인에 의하여 일시에 붕괴되어 국부적으로 수직방향으로 꺼져 내려앉는 현상. '지반침하' 또는 '땅꺼짐'이라고도 한다.”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결국 하나의 같은 현상 ‘땅꺼짐’을 놓고 영어로 싱크홀(sinkhole)이라고 쓰고, 한자말로 지반침하(地盤沈下)라고도 쓰는 것이지요. 누구나 알아듣기가 쉬운 우리말 ‘땅꺼짐’을 놔두고 왜 영어나 어려운 한자말을 쓰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국어사전에 ‘땅꺼짐’이 올림말로 되어 있지도 않은 탓도 있지만, 언론인들이 혹시 영어나 한자말을 쓰면 유식하게 보일까 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예전 고급 식당에 ‘가든’이라고 가게 이름을 쓴 곳이 많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국어학자가 “‘가든’이라고 쓰면 고급식당이고 ‘식당’이라고 쓰면 그저 그런 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06년 전(1919년) 오늘(4월 11일)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어난 날입니다. 1919년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나라 안팎 애국지사들 사이에선 독립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상해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노령임시정부(露領臨時政府) 등이 설립되어 활동했습니다, 그 가운데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 조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한성임시정부와 노령임시정부를 통합하여 명실상부하게 우리 겨레의 임시정부로 발돋움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초창기에 여러 어려움이 많았지만,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일제의 반격으로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고,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1937)으로 상하이[上海, 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綦江, 1939]→충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홍역을 물리치기 위한 제사는 비록 과거의 사례가 없으나, 먼저 해조가 대략 을미년의 규칙을 모방하여 ‘여제(厲祭)’를 지내기 하루 이틀 전에 날을 가려 향(香)을 받게 하라. 비록 차례가 아니라도 먼저 성황(城隍)에 고하는 것은 본래 응당 행해야 할 법이니, 발고제(發告祭, 조상에게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나서 각부(各部)의 중앙에서 여제를 지내되, 지방 고을에도 모두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이는 《정조실록》 21권, 정조 10년(1786년) 4월 10일 기록입니다. 몇 년 전 우리는 코로나 돌림병이 번져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의학이 발달한 지금도 돌림병이 돌면 온 세계가 정신을 못 차리고 난리가 납니다. 하물며 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조선시대는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거나 원통하게 죽은 귀신이 많아지고 이 귀신들의 한이 모이면 세상에 재앙 특히 돌림병이 일어난다고 보고 나라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여제(厲祭)’라 했습니다. 그밖에 재앙을 물리치려고 귀신에게 비는 제사인 ‘양재제(禳災祭)’, 재해가 일어났을 때 지내는 제사 곧 ‘위제(慰祭)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다만, 《세종실록》 56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03년 5월 26일(금)부터 6월 30일(금)까지 아름지기 통의동 사옥에서 국립국악원과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유성기음반을 주제로 한 전시 <유성기집, 우리 소리를 보다>를 에서 열었습니다. 유성기(Gramophone)는 소리가 녹음된 원반(SP, Standard Play)을 재생하는 장치로, 19세기 전후 조선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유성기가 있는 집에 삼삼오오 모여 소리를 듣던 곳을 ‘유성기 처소’ 또는 ‘감상소’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소리를 녹음한 평원반이 처음 발매된 것은 1907년 3월이었는데 경기명창 한인오와 관기(官妓) 최홍매가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서 취입하고, 원반을 배편으로 미국에 싣고 가서 음반으로 찍은 뒤 다시 대한제국으로 들여와 판매하였다고 하지요. 이때 취입한 것은 경기잡가 유산가, 양산도, 가사 황계사 등 모두 30종이었습니다. 미국 콜럼비아나 빅타 레코드에서 발매한 대한제국 시절의 음반은 한쪽 면만 녹음되어 있어서 ‘쪽판’이라고 하며, 녹음기사가 직접 외국의 현지까지 가서 녹음하였기 때문에 이런 것을 ‘출장녹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가장 인기 있었던 음반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다섯 번째 청명(淸明)이고, 내일은 설날ㆍ단오ㆍ한가위와 함께 4대 명절인 한식입니다. 청명과 한식은 하루 차이거나 같은 날이어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날 성묘(省墓)를 합니다. 옛날에는 한 해에 네 번, 그러니까 봄에는 청명, 여름에는 중원(中元, 7월 15일), 가을에는 한가위, 겨울에는 동지에 성묘했습니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청명(淸明) 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칩니다. 임금은 이 불을 정승, 판서, 문무백관 3백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주는데 이를 ‘사화(賜火)’라 했습니다. 수령들은 한식(寒食)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寒食)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온 백성이 한 불을 씀으로써 같은 운명체로서 국가 의식을 다졌습니다. 꺼지기 쉬운 불이어서 습기나 바람에 강한 불씨통(장화통-藏火筒)에 담아 팔도로 불을 보냈는데 그 불씨통은 뱀이나 닭껍질로 만든 주머니로 보온력이 강한 은행이나 목화씨앗 태운 재에 묻어 운반했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삼장수가 만일 호조의 황첩(黃帖, 일정한 세를 물고 발급받은 여행증면서)도 없이 사사로이 매매하면 해당 부사(府使)는 금고(禁錮, 관리가 되는 자격을 박탈하는 벌)의 율로 시행하라."하였다. 호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일본(日本)의 예단(禮單)에 쓰일 삼을 채울 수 없다고 올렸는데, 대체로 인삼장수가 삼을 가지고 왜관(倭館)에 가서 매매하면 이익도 많고 황첩이 없으면 세금도 내지 않기 때문에 몰래 잠입한 자가 많았으므로, 동래 부사가 이들을 금칙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영조실록 76권 영조 28년(1752년) 4월 2일 기록입니다. 또 “중국 배가 와서 시끄럽게 하고, 홍삼을 몰래 사가는 것을 단속하되, 아울러 이러한 내용을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평안도ㆍ함경도 두 도의 관찰사에게 경계하라고 명하였다.”라는 《고종실록》 1권, 1년(1864) 2월 3일 기록도 있습니다. 또 1828년 북경에 다녀온 박사호의 기행문인 《심전고(心田稿)》에는 "연경에 가지고 가는 것이 금지된 물건은 금, 인삼, 담비가죽인데 홍삼은 그중에서도 가장 엄격했다. 연경 사람들이 그 값의 10배를 주고 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