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이 뜨거운 여름 어제(23일) 내내 일본 열도를 달구는 뉴스가 있었으니 바로 '여름 고시엔'으로 불리는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이야기다. 여기서 최종 우승자는 다름아닌 재일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가 그 우승컵을 높이 치켜들었다. 교토국제고는 23일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제106회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간토다이이치고를 연장 끝에 2:1로 꺾었다. 제대로 된 야구 구장 하나 없는 재일동포 고등학생들이 올린 쾌거는 그야말로 재일동포는 물론 고교 야구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에게도 감동을 주었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 “본교는 1947년에 재일 한국인의 자녀를 위한 중학교로 설립되어 1963년에 고등학교를 증설하여 교토에서 재일 동포의 민족교육의 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2004년에 일본 정부가 인정하는 일조교(日朝校,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의 학교)가 되어, 교명을 교토국제중학교・고등학교로 바꾸었습니다. 건학 이래의 교육목표인 세 가지 정신 '자존', '연마', '공생'은 현재도 변함없이 인권존중과 공생사회의 실현을 짊어질 풍부한 국제성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교육의 기본 목표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이 79돌 광복절을 맞아 민간이 소장했던 자료 속에서 찾은 일제 강점기 뼈아픈 역사를 살펴보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한 지 2~30년이 지난 1930~40년대 학교와 마을에서 당연한 듯 이루어진 신사 참배나 군사 훈련, 조국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동원되며 찍은 사진들은 그래서 더 가혹하게 다가온다. 신사 참배와 군사 훈련 현장 1930년대 중반, 공립 이리농림학교의 학생들이 날마다 일정한 시간 교내에 있는 일본 신사를 참배하고, 경성(서울)에 수학여행 간 학생들이 남산에 있는 신사를 참배한 뒤 찍은 사진이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이루어진 신사 참배나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인 남산 신사 참배는 은연중 일본이 원하는 신민이 되어가는 수순이었다. [사진1, 2] 1930년대 중반 공립 이리농림학교 교내에서 군사 훈련을 하며 모의 전쟁으로 진지를 탈환하는 장면을 연출한 사진, 일본 욱일기가 걸려 있고 멀리 산 위로 신사가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군사 훈련하고 찍은 사진, 1940년대 초 관립 경성법학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이 군사 훈련을 받기 전에 일본 훈련대장의 훈시를 듣는 모습, 1941년 강경상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에 일장기를 달고 나갔으니까 일본 국적이다. 이렇게 쉽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수상식 때 월계관을 썼지만, 일장기를 가리기 위해서 꽃다발로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는 13일, 모 방송국에 출연한 이종찬 광복회장의 대담 가운데 한 토막이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최근 독립기념관장에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관 논란’이 일고 있는 김형석 임명을 철회하거나 김 관장의 자진 사퇴를 요청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내고 있어 뜻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 이러한 때에 ‘광복회(光復會)’ 초대 회장과 2대 회장을 역임한 연당 이갑성(硏堂 李甲成 1886~1981, 1962년 대통령장) 선생의 독립운동을 다룬 《3·1운동과 연당 이갑성 추모 논문집》을 펴냈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14일) 오전, 이 책을 쓴 이태룡 소장(국립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을 만나 책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광복절 79돌을 계기로 국립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 총서 4호(통권 8권)로 펴낸 이 책을 엮은 이태룡 소장은 “지난해 (2023) 8월 22일, 민족대표 연당 이갑성 지사 추모 학술대회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궁은 어렸을 때부터 동경하던 스포츠였습니다만 1970년대만 해도 국궁장에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주로 활터를 차지하고 있어 중고등학생들이 찾아가면 ‘학생들은 가라’고 할 만큼 젊은이들에게 국궁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이제 국궁은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전통 스포츠로 국궁장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이는 서울 강서구 공항정(空港亭)의 윤서현 사두(射頭: 활터를 관리하는 우두머리)의 말이다. 활터에서는 사두라 불리지만 윤서현 사두의 공식 직함은 ‘서울강서구궁도협회장’이다. “전통활터인 공항정은 전통 방식으로 제작된 ‘각궁(角弓)’ 문화가 발달한 활터로도 유명합니다. 각궁이란 참나무, 산뽕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와 소힘줄, 물소뿔 등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재료들을 결합하여 만든 우리 겨레 고유의 전통 활을 말합니다.” 어제 11일(목) 오전, 공항정을 찾은 기자를 보자마자 윤서현 사두는 ‘각궁’ 자랑부터 꺼냈다. 이번 공항정을 찾은 것은 지난 6월 중순에 활터를 찾은 지 한 달이 채 안 되어 다시 방문한 것으로 활터에 들어서니 무더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흘러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탄운이정근의사기념사업회 백두산 답사단‘ 답사 넷째 날, 우리는 아침 일찍 압록강변에 있는 중국명 호산장성(虎山長城, 후산창청)에 도착했다. 호산장성은 원래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이었던 것을 중국이 동북공정의 한 작업으로 ‘만리장성의 기점을 날조’한 대표적인 역사 현장의 한 곳이다. 중국은 2009년, 진장성(진시황 때 축조한 부분)과 명장성(명나라 때 축조한 부분)으로 대표되는 만리장성의 전체 길이와 위치를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이때 단둥시에 있는 호산장성을 집어넣음으로써 만리장성의 길이는 1,000킬로나 늘어났다. 버스가 호산장성을 따라 달리다가 주차장에 서기 전까지 가이드는 우리에게 오른쪽 차창을 보라고 안내했다. “여러분 오른쪽에 보이는 저 산이 호랑이 모양입니까? 중국에서는 저 산의 모습이 호랑이 모습의 산이라고 해서 호산(虎山)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 산성이 호산장성이랍니다.”라고 했다. 가이드가 가리키는 산을 올려다보니 호랑이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형태로 전북 진안의 마이산 모양을 하고 있었다. 호산장성의 입구에 도착하여 검표를 마치고 산성 입구에 들어서니 성인 키 몇 배 크기의 육중한 조형물이 관람객을 압도한
[우리문화신문= 중국 집안 이윤옥 기자] <장수왕릉은 일명 장군총이라고 불린다. 기원 5세기에 세워진 장수왕릉은 기존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석구조 능묘로 고구려 제20대 왕인 장수왕의 능묘이기도 하다. 외각은 뾰족한 방추형으로 되어 있어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미명을 누리고 있다. 능묘는 계단식 돌방무덤이고 평면은 정방형으로 되어있다. 길이는 31.58m이고 높이는 13.1m이다. 묘실은 4단과 5단 사이인 중심 위치에 있고 묘지 위에는 50여 톤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가 있으며 바위 위에는 사당 같은 건축물이 있다. 무덤의 주변에는 10여 톤이나 되는 큰 바위가 11개나 된다. 여러 개의 동반 무덤이 동북 방향으로 되어 있다. 서남 방향으로 200m 떨어진 곳에 제사 유적지가 있는데 부지가 5 헥타르에 달한다. 장수왕릉 능원은 디자인이 완벽하고 석조 공예가 정교하여 고구려 석구조 능묘의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는 절세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중국 길림성(지린성, 吉林省) 집안시(지안시, 集安市)에 있는 장수왕릉 앞, 안내판에 중국이 써놓은 한글 설명이다.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미명을 누리고 있다,"라는 설명 가운데 '미명‘이라는 말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하늘못(천지 - 天池)은 온통 희뿌연 물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면 하늘과 물의 경계가 사라져 버려 카메라에 담는 일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답사단이 천지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희미하게나마 천지는 그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한반도의 조종산(祖宗山), 곧 모든 산맥의 시작점이자 겨레의 영산(靈山)으로 자리매김한 백두산 천지, 답사단은 빗속에서도 어제 그 산을 올랐다. 실은 그제 퉁화(通化)에 도착하여 이튿날 백두산 천지를 오르기로 한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다렌에서 퉁화까지 장장 8시간 이상의 버스 이동으로 답사단원이 지쳐있어 천지에 오르기로 한 어제는 약간 느긋하게 숙소를 출발하기로 했었다. 그러던 일정이 그만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변경되어 새벽 4시 30분에 숙소 출발이 결정되었다. 퉁화에서 백두산 입구까지는 전세버스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그러나 모든 버스는 백두산 입구 주차장에 세워두고 중국 정부에서 운영하는 천지 등정용 셔틀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 그것뿐이 아니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1,442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비로소 천지를 만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백두산 천지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인간이 태어나 갖게 되는 역사의식의 형성에는, 여러 요소가 작용하겠지만 특히 중고등학교의 역사교육이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교육은 교과서라는 도구가 크게 작용한다. 어떠한 의도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할 것인가? 이에 대해 많은 교사들은 고민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교과서 속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니 다른 말로 일본 교과서에 쓰인 조선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이러한 의구심에서 출발한 책이 《교과서에 쓰인 조선(教科書に書かれた朝鮮)》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제목이 《교과서에 쓰인 조선》이지만 ‘일본 교과서에 쓰인 조선’ 이라는 제목이었으면 더욱 좋았을 법하다. 책을 쓴 사람들은 김달수(金達壽,1919-1997), 강재언(姜在彦, 1926-2017), 이진희(李進熙, 1929-2012), 강덕상(姜德相, 1932-2021) 교수 등 4명의 역사학자들이다. “《교과서에 쓰인 조선》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일본) 교과서 서술에 대해서, 계통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책이다. 원래대로라면 이러한 작업은 일본 역사가의 손으로 쓰여져야 할 성질의 것이지만, 우리가 굳이 이 문제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45년 8월, 종전(終戰) 이래 중국 하얼빈의 731부대를 찾아가보지 않았던 시미즈 씨가 93살의 노구로 이곳을 찾으려는 까닭에 대해 “오랜 세월 이곳을 가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전쟁의 무서움을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라고 말했다. 14살의 어린 나이로 세균을 전쟁 무기로 쓰기 위해 생체실험을 일삼던 악명높은 일본 관동군의 731부대에서 일했던 시미즈 히데오(清水英男) 씨는 올해 93살이다. 이곳 구 관동군방역급수부(旧 関東軍防疫給水部)에서 일했던 시미즈 씨는 오는 8월 12~16일, 노구를 이끌고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다. 나가노현 이다시(長野県飯田市)의 미나미신슈 신문(南信州新聞) 6월 14일 치에 따르면, 시미즈 히데오 씨와 함께 하얼빈 731부대를 방문할 사람을 모집 중이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1945년 4월, 14살이었던 시미즈 씨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하얼빈 교외에 있던 731부대의 본거지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종전 뒤 귀국할 때까지 약 4달 동안 인체를 해부한 표본을 관리하거나 ‘마루타’라고 불리던 포로의 감옥을 폭파하기 위한 폭탄 운반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상관으로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402년(태종 13)에 제작된 우리 겨레의 옛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강리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가장 긴 강인 오렌지강이 그려져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이다. 어제 있었던 ‘지도의 날’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에서 본 ‘강리도’가 이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6월 24일(월), 국회의원 김형동 의원실과 지도포럼(공동위원장 김현명ㆍ양보경)은 대한지리학회,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한국고지도연구학회,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 충렬공김방경기념사업회와 함께 ‘지도의 날’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을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었다. ‘지도포럼’은 양보경 전 성신여대 총장과 김현명 전 주이라크대사가 공동위원장을 맡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 3명의 고문, 정성훈 대한지리학회 회장 등 10명이 위원으로 위촉되어 ‘지도의 날’ 제정을 추진해 왔다.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국가기념일로 ‘지도의 날’을 지정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우리 지도 역사상 가장 우수한 ‘강리도’의 문화적 유산 값어치를 재조명하고, 지도와 관련된 교육과 연구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데 그 뜻을 두었으며, 지리 및 지도와 관련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