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마츠리의 나라다. 그 가운데서도 교토의 3대 마츠리는 이름난 것으로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 7월 17일의 기온마츠리,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를 꼽을 수 있다. 해마다 10월 22일 열리는 지다이마츠리는 헤이안 천도로부터 1,100년째를 기념하여 명치28(1895)년에 환무천황(桓武天皇)을 제신으로 시작한 마츠리로 올해 124회째를 맞는다. 그러나 올해는 레이와 원년(令和元年, 새로 일왕이 된 나루히토의 연호)으로 황거(일왕이 사는 곳)에서 즉위식 행사가 있어서 26일로 날짜 변경이 예정되어 있다. 마츠리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도구, 행렬 시간 등을 따지자면 7월의 기온마츠리(祇園祭)가 가장 성대하지만 5월의 아오이마츠리(葵祭)나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도 꽤 볼만하다. 지다이마츠리 행렬은 교토 어소(御所)를 낮 12시에 출발하여 가라스마도오리 등 시내 4∼5킬로 구간을 행진한 뒤 헤이안신궁(平安神宮)으로 돌아오는 진행이다. 지다이마츠리의 백미는 형형색색의 옛 시대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인데 시내를 행진할 때에는 각 시대별 곧 헤이안-가마쿠라-무로마치-안도모모야마-에도-메이지시대의 옷으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 남자가 있다. 남자의 이름은 칸다타. 이 남자가 불지옥에서 허둥대고 있을 때 지상에서 부처님은 이 남자를 응시하고 있다. 부처님이 연꽃 향이 물씬 풍기는 연못 밑을 우연히 내려다보니 발아래 저 멀리 지옥이 훤히 보였다. 지옥은 아비규환 이었다. 서로 물어 할퀴고 뜯고 난리도 아닌 가운데 어디서 낯이 익은 남자 칸다타를 발견했다. 가만있자 이 남자를 어디서 보았더라. 그렇지 이 남자가 지상에서 거미 한 마리를 밟아 죽일 뻔한 상황에서 이를 살려준 것을 부처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불쌍한 지옥의 칸다타를 위해 부처님은 은실로 된 거미줄 같이 가는 줄을 지옥으로 내려 보냈다. 칸다타는 기쁜 나머지 이 줄을 잡고 지상으로 오를 꿈에 젖어 잠시 행복했다. 있는 힘을 다해 줄을 움켜쥐다가 힘이 빠져 잠시 발아래를 보니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죄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한결같이 칸다타가 움켜쥔 거미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순간 칸다타는 기겁을 했다. 이 많은 인간들이 거미줄에 매달리면 줄은 곧 끊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영영 지옥에서 허덕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하였다. 그리하여 몰려드는 죄인들을 향해 고래고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도쿄 한 복판에 있는 전몰자 묘지인 ‘국립치도리가후치 묘원(國立千鳥ケ淵戦没者墓苑)’은 1959년에 세웠으며 ‘묘지’가 아닌 ‘묘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곳의 총면적은 16.063㎡(4,867평)으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때에 나라밖에서 죽은 일본의 군인, 군속, 민간인 가운데 신원이 불명하여 인수되지 않은 유골을 안치하고 있다.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은 가족에게 인계하여 가족 무덤에 안치) 유골을 안치한 납골당인 육각당(六角堂)에는 35만 8,000주(柱, 일본에서 신을 세는 단위) 이상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으나 전범급(戰犯級) 인물은 안치되어 있지 않다. 이곳에서는 일본 후생성이 해마다 전몰자를 위해 배례식(拝礼式)을 거행하며 황족(皇族)과 내각총리대신이 참석한다. 이 묘지는 1950년 필리핀에서 숨진 전몰자 4,822주가 송환되었을 때 이들의 유골을 안치할 곳을 찾지 못해 일본 후생성이 1952년 5월 1일 ‘전일본무명전몰자합장묘건설위원회(全日本無名戦没者合葬墓建設会)를 발족하여 만든 것이다. 처음에 터를 선정할 때에 묘지 터로 여러 곳이 후보로 올랐으며 그 가운데는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두어야 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야스쿠니 경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유슈칸(遊就館)은 태평양전쟁을 비롯한 침략시기에 사용했던 전리품, 전몰자의 유품, 대포 등의 무기를 전시하고 있는 전쟁박물관이다. 1945년 종전(終戰)과 함께 폐지되었다가 1986년 재개관한 뒤 2002년에 새로 단장한 유슈칸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황국사관을 심어주는 중요한 시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슈칸은 1880년 이전에는 ‘게액및무기진열장(揭額幷武器陳列欌)’으로 불렸다. ‘게액(揭額)’이란 액자를 건다는 뜻으로 전사자들과 관련된 사진 등의 액자를 봉납 받아 전시함으로써 신령을 위로하고 살아생전의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뜻이며 이와 더불어 무기진열을 위해 만든 것이 유슈칸이다. 명치정부는 막부정권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무기를 비롯하여 각 번(藩)이 소장했던 무기를 확보하여 유슈칸에 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청나라 군함 조강호 부속품과 청나라 국기, 청룡도, 삼우창, 러시아군함 바이야크의 군함기 등 전리품을 전시하여 일본의 위력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1910년 4월 1일, 유슈칸은 칙령으로 무기역사박물관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공포된 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 건립 이후 수많은 전사자를 합사(合祀)하는 예대제(例大祭, 레이다이사이: 신사의 신에게 고하는 의식)가 이뤄졌는데 이는 군대가 합사자를 결정하고 일왕의 재가를 받아서 혼을 불러내어 야스쿠니의 제신(諸神)으로 합사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곧 군의 조사와 합사기준에 따라 판정→영새부(寧塞簿, 영혼이름을 적은 명부)작성→일왕보고→재가→초혼→합사의 수순을 밟는 것이다. 전사자는 유골이나 위패가 아닌 영새부(寧塞簿)에 기록되며 이를 신관들이 오하구루마(영새부를 태우는 영혼 가마)에 태워 야스쿠니 본전(本殿)에 자리하는 초혼제를 진행한다. 이후 합사제(合祀祭)를 거행하고 제주(祭主)인 일왕이 그 길을 걸으며 참배한다. 영새부는 사전에 안치되어 신체에 준하는 취급을 받으며 이로써 야스쿠니의 제신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이때 만주, 대만, 조선, 오키나와와 일본 내에 살고 있는 유족들을 국비로 야스쿠니에 초대하여 전사자가 신(神)이 되는 과정 곧 예대제가 진행되는 참도(參道) 양쪽 끝에서 참배하게 한다. 이후 야스쿠니 예대제를 마친 유족들은 신주쿠교엔, 황궁, 우에노동물원 등 도쿄의 명소를 구경하고 귀향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해외 전몰자 240만 명 가운데 현재 116만 명의 주검이 미송환 된 상태로 전사자유골의 약 48%가 여전히 해외에 방치된 상태이다. 이 가운데 바다에서 전사한 경우와 상대국 국민감정으로 수습할 수 없는 주검을 제외한 60만 명은 지금도 수습이 가능하지만 일본 정부는 주검수습에 소극적이다. 이렇게 정부가 적극적으로 주검수습을 미루는 것은 일본 특유의 ‘초혼(招魂)’ 사상과 관련이 깊다. 특히 야스쿠니의 제신(祭神)으로 모셔지는 것은 최고의 예우이기에 주검 수습에 그다지 힘을 들이고 있지 않는 측면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2010년 일본 NHK에서 방송된 ‘의혹의 주검을 좇아, 전몰자주검수집의 어둠’이라는 기획물이다. 일본정부는 1952년부터 1975년까지 3차에 걸친 전사자 주검수습 작업을 해왔으나 필리핀의 경우 거액을 들여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수습된 주검이 일본인 전사자 주검이 아니라 필리핀인 주검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주검수습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후 각 전쟁터에서 전사한 전사자 주검 수습은 거의 방치된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장례식은 반드시 주검이나 죽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벚꽃의 명소로 도쿄 한 복판에 자리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이하 ‘야스쿠니’)는 일본 군국주의 상징의 현충시설이다. 이곳에서는 A급 전범(戰犯)뿐 아니라 우익의 원조이자 정한론자(征韓論者)인 요시다쇼인과 이토히로부미를 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1910년 9월 15일 한국인에게 치욕스런 한국병합 봉고제(奉告祭)를 올린 곳이다. 야스쿠니에는 일제침략기 징용으로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 나가 숨진 한국인 21,000여명과 대만인 등이 합사(合祀)되어 있어 한국을 비롯한 전쟁 피해 당사국으로부터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받고 있는 영령 추도시설이기도 하다. 야스쿠니는 총면적 93,356㎡(28,289평)로 일본에 있는 수많은 신사(神社)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1869년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로 시작하여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은 1879년이다. 이곳에서는 에도막부 말기(1853)부터 명치유신(1868)을 거쳐,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일본이 저지른 국내외 전쟁에서 숨진 군인, 군속 등 전사자의 영령을 제사한다. 야스쿠니에는 태평양전쟁 사망자 213만 3,915명, 중일전쟁 19만 1,250명, 러일전쟁 8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차별과 빈곤에 맞서온 인권 변호사 우츠노미야 겐지(宇都宮健兒, 73살) 씨는 요즘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의 피해회복이 문제의 핵심인데 당사자 없이 국가 간에 전부 결정을 내려 버렸습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진지하게 반성하며 행동으로 나타내는 일이 필요하고 그것을 정부와 국민이 함께 해야합니다.” 후덕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는 지난 8월 24일 YTN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베정권이 우리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반발해 수출규제와 백색 국가 제외 조치를 단행한 이후 이른바 양심적인 일본의 지식인 들은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처럼 저마다 ‘아베정권의 철딱서니 없는 처사’에 강한 불만과 질책을 쏟아내고 있다. 에히메현(愛媛県)의 남서부에 있는 세이요시(西予市)에서 태어난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는 1946년생으로 그가 태어난 시기는 패전으로 일본 전역이 폐허 더미였을 시기였다. 그가 태어난 고향 아케하마쵸(明浜町)는 반농반어(半農半漁) 지역으로 그는 9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오이타현(大分県)으로 이사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친일단체 가운데 ‘조선신궁봉찬회(朝鮮神宮奉贊會)’라는 것이 있다. 이 단체는 도쿄에 메이지신궁(明治神宮) 건립계획(1915)이 확정되면서 건축비 모금을 위해서 일본에 명치신궁봉찬회가 결성되자 조선지부로 1933년에 설립되었다. 이 보다 앞서 《순종실록부록》 8권, 순종 10년 1월 10일(1917) 기록에는 “양궁(兩宮)에서 명치신궁(明治神宮)의 봉찬회(奉贊會)에 일금 1만 2,000원을 기부하였다.(창덕궁(昌德宮) 7,000원, 덕수궁(德壽宮) 3,000원, 왕세자 2,000원이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메이지신궁 건립에 조선의 돈이 일찍부터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궁봉찬(神宮奉贊)은 메이지신궁이 완성된 이래 곧 100년을 앞둔 지금도 유효하여 메이지신궁 누리집에는 “메이지신궁은 1921년 메이지왕과 부인소헌왕후를 모시는 사당으로 이제 곧 100년을 맞이합니다. 많은 봉찬(기부)을 바랍니다.”라고 써 놓았다. 기부금을 모으는 목적은 메이지신궁진좌100주년기념사업자금(明治神宮鎮座百年祭記念事業資金)이라고만 써 놓았을 뿐 구체적인 사업 내용은 밝혀 놓고 있지 않다. 금액은 불문하며 5천 엔(우리돈 5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패전 뒤 일본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가 12만 명에 달했다고 현대비지니스 신문은 지난 8월 13일자 기사에서 밝혔다. 이 가운데 부모를 잃고 길거리에서 부랑아로 떠돈 어린이는 35,000명으로 추정된다고 《아사히연감(朝日年鑑, 1947년)》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 부랑아의 말을 빌려 “일본의 종전기념일(終戦記念日)은 1945년 8월 15일이다. 하지만 부랑아들에게는 그날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전쟁 말이다.”고 했다. 부랑아 대부분은 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 겨울부터 여름에 걸쳐 생겼는데 도쿄, 센다이, 오사카, 아이치, 후쿠오카 등 미군의 공습으로 부모를 잃게 되어 생겼다고 했다. 특히 1945년 3월 10일, 도쿄대공습 때 도쿄가 불바다로 변했으나 아직 날씨가 쌀쌀하여 한기를 피하고자 수많은 부랑아들이 도쿄 우에노역 지하도로 몰려들었다고 했다. 지금도 우에노역에는 노숙자들이 몰려있지만 당시에 이곳에는 7,000명 정도가 지내고 있었다고한다. 부랑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우에노역에는 너무나 사람이 많아 눕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그 비좁은 공간에서 해결해야했다고 하니 패전 후 일본 도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