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뒷줄임) - 김구 ‘저의 소원’ -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 강은교 ‘숲’- 어머니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 ‘별 헤는 밤- 이것은 일본의 서예가 다나카 유운(田中佑雲, 1957-2018) 씨가 한글로 쓴 서예작품 가운데 일부다. 그는 말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한글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운명이라고 해야 좋을 이 한편의 시와 만남은 이후 나의 서예작업을 더욱더 풍요로운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다나카 씨는 48살 때부터 한글(조선어)공부를 시작했다. 한글을 익힌 뒤부터 그의 서예작품은 주로 현대 일본에 드리워진 사회문제를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일본의 민족차별문제나 공해문제 더 나아가 한일관계의 역사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윤동주, 송몽규, 안중근, 김구, 한용운 등의 어록이나 시를 서예작품으로 남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300년 전 일본 왕실에는 고대 한반도 출신의 악사들이 즐비했다. 일본의 정사(正史)인 《속일본기(續日本紀)》 731년 7월 29일 기록만 봐도 “아악료(雅樂寮)에 속하는 악생(樂生)의 정원은 대당악(大唐樂) 39명, 백제악(百濟樂) 26명, 고구려악(高麗樂 ) 8명, 신라악(新羅樂) 4명, 탐라악(耽羅樂악) 62명...을 두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런가하면 740년 12월 4일에는 "왕실에서 신라악을 연주하게 했다", 744년 2월 22일에는 "백제악을 연주하게 했다"는 기록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러한 고대 한국 출신이 담당하던 음악은 고마가쿠(高麗樂, 고구려를 뜻함)라는 이름으로 현재 일본 전통음악인 아악에 전승되고 있다. 《속일본기》 보다 앞선 기록으로는 《일본서기》 570년 7월, 상락관(相樂館)에서 고구려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런가 하면 683년, 천무왕 12년(683)조에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음악이 조정에서 연주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일본 왕실과 고대 한국은 잦은 음악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일본후기(日本後紀》에는 809년에 활약했던 고려악사 4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我本靑山鶴(아본청산학) 나는 본래 청산에 노니는 학인데 常遊五色雲(상유오색운) 항상 오색구름을 타고 놀다가 一朝雲霧盡(일조운무진) 하루아침에 오색구름이 사라지는 바람에 誤落野鷄群(오락야계군) 잘못하여 닭 무리 속에 떨어졌노라. 이 시는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 12월부터 1605년 3월까지 교토 흥성사에 머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나눈 시로 알려졌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중근세관 조선1실에서는 ‘일본교토 흥성사(興聖寺, 고쇼지) 소장 사명대사 유묵(遺墨)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오는 11월 17일까지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회는 교토 흥성사에서 소장 중인 사명대사의 유묵을 영상 데이터로 제공 받아 복제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9월 19일치 산케이웨스트(産経WEST)에 따르면 “송운대사(사명대사)는 풍신수길에 의한 조선출병시에 의승병(義僧兵)을 이끌고 일본과 싸웠다. 그 뒤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면회하고 국교회복과 조선인 포로를 귀국 시키키 위해 교섭에 진력을 다했다. 이후 1607년부터 시작한 조선통신사 기반을 구축했다.”고 사명대사를 소개했다. 일본에서는 송운대사(松雲大師)로 더 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22일) 일본 열도는 일왕 즉위식으로 떠들썩했다. 일왕이 살고 있는 도쿄 황거(皇居)에서 거행된 일왕즉위식은 국내외 2,000여명의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외국으로부터 찾아온 손님은 191개 나라에서 423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날 일왕즉위식은 낮 1시 5분, 위엄있는 전통복으로 갈아입은 일왕이 ‘국민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빌며 국민에 가까이 다가서겠다.’는 내용의 선언을 시작으로 약 30여 분 동안 즉위식이 이어졌다. 어제 등극한 나루히토 왕의 고조부는 122대인 메이지왕(明治天皇)이며 메이지는 61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증조부인 제123대 다이쇼왕(大正天皇)으로 단명하여 48살에 숨을 거두었다. 조부인 제124대 쇼와왕(昭和天皇) 시대를 거쳐 아버지 헤이세이왕(平成天皇)은 제125대다. 어제 제126대 일왕 즉위식을 한 나루히토는 원래대로라면 전 왕이 숨을 거두고 난 뒤 새 왕으로 등극해야했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전왕이 생존해 있으면서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일본에 천황제가 성립된 것은 7세기 후반의 일로 대보율령(大宝律令)에서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법제화했다. 그러나 일왕제도는 1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마츠리의 나라다. 그 가운데서도 교토의 3대 마츠리는 이름난 것으로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 7월 17일의 기온마츠리,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를 꼽을 수 있다. 해마다 10월 22일 열리는 지다이마츠리는 헤이안 천도로부터 1,100년째를 기념하여 명치28(1895)년에 환무천황(桓武天皇)을 제신으로 시작한 마츠리로 올해 124회째를 맞는다. 그러나 올해는 레이와 원년(令和元年, 새로 일왕이 된 나루히토의 연호)으로 황거(일왕이 사는 곳)에서 즉위식 행사가 있어서 26일로 날짜 변경이 예정되어 있다. 마츠리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도구, 행렬 시간 등을 따지자면 7월의 기온마츠리(祇園祭)가 가장 성대하지만 5월의 아오이마츠리(葵祭)나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도 꽤 볼만하다. 지다이마츠리 행렬은 교토 어소(御所)를 낮 12시에 출발하여 가라스마도오리 등 시내 4∼5킬로 구간을 행진한 뒤 헤이안신궁(平安神宮)으로 돌아오는 진행이다. 지다이마츠리의 백미는 형형색색의 옛 시대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인데 시내를 행진할 때에는 각 시대별 곧 헤이안-가마쿠라-무로마치-안도모모야마-에도-메이지시대의 옷으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 남자가 있다. 남자의 이름은 칸다타. 이 남자가 불지옥에서 허둥대고 있을 때 지상에서 부처님은 이 남자를 응시하고 있다. 부처님이 연꽃 향이 물씬 풍기는 연못 밑을 우연히 내려다보니 발아래 저 멀리 지옥이 훤히 보였다. 지옥은 아비규환 이었다. 서로 물어 할퀴고 뜯고 난리도 아닌 가운데 어디서 낯이 익은 남자 칸다타를 발견했다. 가만있자 이 남자를 어디서 보았더라. 그렇지 이 남자가 지상에서 거미 한 마리를 밟아 죽일 뻔한 상황에서 이를 살려준 것을 부처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불쌍한 지옥의 칸다타를 위해 부처님은 은실로 된 거미줄 같이 가는 줄을 지옥으로 내려 보냈다. 칸다타는 기쁜 나머지 이 줄을 잡고 지상으로 오를 꿈에 젖어 잠시 행복했다. 있는 힘을 다해 줄을 움켜쥐다가 힘이 빠져 잠시 발아래를 보니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죄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한결같이 칸다타가 움켜쥔 거미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순간 칸다타는 기겁을 했다. 이 많은 인간들이 거미줄에 매달리면 줄은 곧 끊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영영 지옥에서 허덕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하였다. 그리하여 몰려드는 죄인들을 향해 고래고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도쿄 한 복판에 있는 전몰자 묘지인 ‘국립치도리가후치 묘원(國立千鳥ケ淵戦没者墓苑)’은 1959년에 세웠으며 ‘묘지’가 아닌 ‘묘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곳의 총면적은 16.063㎡(4,867평)으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때에 나라밖에서 죽은 일본의 군인, 군속, 민간인 가운데 신원이 불명하여 인수되지 않은 유골을 안치하고 있다.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은 가족에게 인계하여 가족 무덤에 안치) 유골을 안치한 납골당인 육각당(六角堂)에는 35만 8,000주(柱, 일본에서 신을 세는 단위) 이상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으나 전범급(戰犯級) 인물은 안치되어 있지 않다. 이곳에서는 일본 후생성이 해마다 전몰자를 위해 배례식(拝礼式)을 거행하며 황족(皇族)과 내각총리대신이 참석한다. 이 묘지는 1950년 필리핀에서 숨진 전몰자 4,822주가 송환되었을 때 이들의 유골을 안치할 곳을 찾지 못해 일본 후생성이 1952년 5월 1일 ‘전일본무명전몰자합장묘건설위원회(全日本無名戦没者合葬墓建設会)를 발족하여 만든 것이다. 처음에 터를 선정할 때에 묘지 터로 여러 곳이 후보로 올랐으며 그 가운데는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두어야 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야스쿠니 경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유슈칸(遊就館)은 태평양전쟁을 비롯한 침략시기에 사용했던 전리품, 전몰자의 유품, 대포 등의 무기를 전시하고 있는 전쟁박물관이다. 1945년 종전(終戰)과 함께 폐지되었다가 1986년 재개관한 뒤 2002년에 새로 단장한 유슈칸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황국사관을 심어주는 중요한 시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슈칸은 1880년 이전에는 ‘게액및무기진열장(揭額幷武器陳列欌)’으로 불렸다. ‘게액(揭額)’이란 액자를 건다는 뜻으로 전사자들과 관련된 사진 등의 액자를 봉납 받아 전시함으로써 신령을 위로하고 살아생전의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뜻이며 이와 더불어 무기진열을 위해 만든 것이 유슈칸이다. 명치정부는 막부정권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무기를 비롯하여 각 번(藩)이 소장했던 무기를 확보하여 유슈칸에 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청나라 군함 조강호 부속품과 청나라 국기, 청룡도, 삼우창, 러시아군함 바이야크의 군함기 등 전리품을 전시하여 일본의 위력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1910년 4월 1일, 유슈칸은 칙령으로 무기역사박물관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공포된 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 건립 이후 수많은 전사자를 합사(合祀)하는 예대제(例大祭, 레이다이사이: 신사의 신에게 고하는 의식)가 이뤄졌는데 이는 군대가 합사자를 결정하고 일왕의 재가를 받아서 혼을 불러내어 야스쿠니의 제신(諸神)으로 합사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곧 군의 조사와 합사기준에 따라 판정→영새부(寧塞簿, 영혼이름을 적은 명부)작성→일왕보고→재가→초혼→합사의 수순을 밟는 것이다. 전사자는 유골이나 위패가 아닌 영새부(寧塞簿)에 기록되며 이를 신관들이 오하구루마(영새부를 태우는 영혼 가마)에 태워 야스쿠니 본전(本殿)에 자리하는 초혼제를 진행한다. 이후 합사제(合祀祭)를 거행하고 제주(祭主)인 일왕이 그 길을 걸으며 참배한다. 영새부는 사전에 안치되어 신체에 준하는 취급을 받으며 이로써 야스쿠니의 제신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이때 만주, 대만, 조선, 오키나와와 일본 내에 살고 있는 유족들을 국비로 야스쿠니에 초대하여 전사자가 신(神)이 되는 과정 곧 예대제가 진행되는 참도(參道) 양쪽 끝에서 참배하게 한다. 이후 야스쿠니 예대제를 마친 유족들은 신주쿠교엔, 황궁, 우에노동물원 등 도쿄의 명소를 구경하고 귀향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해외 전몰자 240만 명 가운데 현재 116만 명의 주검이 미송환 된 상태로 전사자유골의 약 48%가 여전히 해외에 방치된 상태이다. 이 가운데 바다에서 전사한 경우와 상대국 국민감정으로 수습할 수 없는 주검을 제외한 60만 명은 지금도 수습이 가능하지만 일본 정부는 주검수습에 소극적이다. 이렇게 정부가 적극적으로 주검수습을 미루는 것은 일본 특유의 ‘초혼(招魂)’ 사상과 관련이 깊다. 특히 야스쿠니의 제신(祭神)으로 모셔지는 것은 최고의 예우이기에 주검 수습에 그다지 힘을 들이고 있지 않는 측면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2010년 일본 NHK에서 방송된 ‘의혹의 주검을 좇아, 전몰자주검수집의 어둠’이라는 기획물이다. 일본정부는 1952년부터 1975년까지 3차에 걸친 전사자 주검수습 작업을 해왔으나 필리핀의 경우 거액을 들여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수습된 주검이 일본인 전사자 주검이 아니라 필리핀인 주검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주검수습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후 각 전쟁터에서 전사한 전사자 주검 수습은 거의 방치된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장례식은 반드시 주검이나 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