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구니 법명(法明)은 백제 사람이다. 제명왕(齊明天皇) 2년(656)에 대신 가마타리(鎌子)가 병을 앓았는데 온갖 처방에도 낫지 않았다. 이에 법명이 아뢰길, 유마힐경은 아주 좋은 경전이니 이를 독송해보는 게 좋겠다고 하자 왕이 허락하여 독송하였는데 채 독송이 끝나기도 전에 병이 나았다. 왕과 신하들이 아주 기뻐하였다. 찬하여 이르길, 중국에는 도형이라는 비구니가 있어서 유마경을 강설하면 듣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였다고 한다. 법명이 한 번 더 독송하자 다 읽기도 전에 고질병이 다 나았으니 그 효험이 어찌 도형보다 못하겠는가? 그로부터 담해공(淡海公)은 흥복사에서 유마회를 열었고 백제 비구니의 발자취는 참으로 아름답다. 이는 14세기 일본의 불교책인 《원형석서(元亨釋書)》에 나오는 백제 비구니 법명의 이야기다. 법명은 조정의 권력자인 가마타리의 병을 유마경으로 씻은 듯이 낫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백제의 법명에 버금가는 비구니가 있는데 그 이름은 이원(理願)이다. 이원은 714년 11월 11일 김원정(金元靜)등의 신라 사신 20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佛法)을 널리 전하다가 귀국하지 않은 채 일본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가모신사유래기》교토의 3대 마츠리라고 하면 5월 15일 아오이마츠리, 7월17일 기온마츠리, 10월 22일 지다이마츠리를 꼽는다. 초록이 눈부신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葵祭)는 고대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하타씨 일족과 관계가 깊은 가모씨(賀茂氏)와 조정(朝廷)의 행사로 당시 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주류는 귀족들이라 귀족 마츠리라고도 불렸으며 한편으로는 가모신사의 마츠리라해서 가모마츠리(賀茂祭)로도 불렀다. 《가모신사유래기》에 기록된 아오이마츠리 유래를 보면 6세기 무렵 긴메이왕 시절에 일본 전역에 풍수해가 심각하여 점쟁이에게 점을 쳐보니 가모대신(賀茂大神)이 노한 것으로 나왔다. 점괘가 나오면 해결 방법도 나오는 법으로 점쟁이인 우라베(卜部伊吉若日子)의 해결 방법은 튼실한 말을 골라 방울을 잔뜩 달고 기수는 얼굴에 동물 가면을 쓰고 가모신사 주변을 돌면서 성대한 제사(마츠리)의식을 행하면 풍수해를 잠재울 수 있다고 해서 시작되었다. ▲ 교토 아오이마츠리의 이모저모 일본의 마츠리는 대부분이 고대에 기원을 둔 것으로 풍수재해 예방, 전염병 확산 금지, 국태민안, 풍년 등의 기원을 담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천평(天平, 729-749) 조각의 작가는 대개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러나 큰 절에는 반드시 뛰어난 조각가 또는 조각가군(群)이 있었다고 본다. 그것을 담당한 사람들은 어쩜 승려였을지도 모른다. 삼월당(三月堂)의 양변(良弁, 689-774)이 뛰어난 조각가였다는 전설 등은 배척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월당의 건축이라 함은 당내의 조각을 말하며 양변과 관련 있는 것은 대부분이 일류 걸작품이다. 이는 적어도 양변이 뛰어난 예술가이거나 아니면 매우 뛰어난 예술가를 곁에 두었다는 증거이다. 만일 그 양변상(良弁像)이 자작품이라면 양변은 초일류 조각가이다. 하지만 아니라 해도 그의 곁에 있는 조각가 또는 그 제자가 조각을 했다면 양변은 천하제일의 조각가를 양성한 셈이 된다. 이 글은 사찰순례기의 바이블이라는 《고사순례(古寺巡禮)》를 쓴 일본의 철학자이자 문화사가인 와츠지데츠로(和辻哲郎, 1889~1960)가 쓴 백제스님 양변에 관한 글이다. 나라(奈良) 동대사의 첫 주지였던 백제스님 양변이 조각가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어쩌면 생소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 어린 양변을 독수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금당은 동쪽 입구로부터 들어가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곳(벽화)으로 가기 위해 먼저 본존 앞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약사삼존불 앞에 왔을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일렬로 나란히 줄지어져 있는 오래된 불상과 검은 기둥 사이의 서쪽 벽에 아미타불이 밝은 모습으로 합장한 손의 모습까지 확실히 보이는 것이었다. 동쪽 입구에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아미타불이 이렇게 확실히 보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바라다본 벽화의 조각적인 아름다움이 선명하게 눈에 새겨지는 것 또한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벽화에 이르는 길목의 본존불과 좌우 조각에는 눈도 주지 않고 우리는 아미타불쪽으로 내달았다. 이 그림이야말로 동양회화의 절정이다. 꽤 박리된 부분이 있었지만 그 흰 박리(剝離)면조차 벽화의 신선한 생동감으로 느껴졌다. 이 벽화 앞에 서면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보태고 더할 것이 없다. 그저 바라다보고 취할 뿐이다. 이것은 금당벽화로 유명한 나라의 고찰 법륭사 금당(대웅전)에 화재가 나기 전 금당벽화를 본 일본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와츠지데츠로(1889~1960)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뜻하지 않은 지진으로 지금 큐슈지방의 구마모토는 불안의 연속이다. 그걸 반영하듯 뉴스에선 시시각각으로 작은 여진이라도 보도하느라 바쁘다. 하루빨리 여진이 멈춰 불안에 떠는 주민들이 지진복구에 힘쓰길 빌어본다. 구마모토(熊本)라고 하면 일본의 3대성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熊本城)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밖에 나고야성(名古屋城), 오사카성(大阪城)을 합쳐 3대성이라고 할 만큼 구마모토는 성곽도시다. 성곽도시는 성주들이 각각 있게 마련이다. 각 성주들은 성곽 안에서 만큼은 왕과 같은 존재이다. ▲ 아름다운 구마모토성(熊本城)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시대부터 왕권이 아니라 장수들이 각 성을 중심으로 권력을 서로 쥐고자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조선이 중앙집권체제였다면 일본은 일찍부터 지방분권제가 발달한 셈이다. 성주들은 서로의 성을 지키고자 전쟁을 일삼았으며 빼앗았는가 하면 빼앗기는 일이 반복되기를 무신정권 내내 근 700여 년간 크고 작은 전쟁 속에 살아야 했다. 풍신수길의 오사카성이 철통같이 방어 된 것 같아도 결국은 덕천가강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에도성에 그 명성을 넘겨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완연한 봄기운이 도는 요즈음 서울 여의도는 벚꽃잔치(놀이)를 한다고 법석이다.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윤중로 주변은 흐드러진 벚꽃을 배경삼아 사진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의도뿐만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벚꽃잔치가 한창이다. 마치 일본 같다. 벚꽃잔치라고 하면 일본의 하나미(花見)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나라꽃인 벚꽃을 일본말로는 사쿠라라고 하는데 이상한 것은 벚꽃잔치를 ‘사쿠라마츠리’라 하지 않고 ‘하나미’라고 부르는 점이다. 하나미(花見)를 직역하면 ‘꽃을 본다’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달맞이도 ‘츠키미(月見)’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달을 본다’라는 뜻이다. ‘꽃놀이’, ‘달맞이’와 같은 우리말과 견주면 좀 맹숭맹숭한 느낌이지만 어쨌거나 벚꽃잔치는 원래 우리의 오랜 습관은 아니다. ▲ 벚꽃잔치인 하나미[花見] 특집을 알리는 광고 일본인들의 꽃놀이 풍습은 나라시대(710-794)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꽃놀이 행사였는데 당시에는 주로 매화꽃놀이였다. 그러던 것이 헤이안시대(794-1192)로 들어서면 서서히 벚꽃으로 바뀐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의 상징 후지산은 일본인들에게 사랑 받는 산이다. 사계절 그 모습이 아름답지만 아무래도 꽃피는 봄의 후지산은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에 견줄만하다. 후지산의 모습은 하루에도 여러 번 그 모습이 바뀌는 곳으로관광버스로 후지산(중턱까지 버스가 올라감)을 올라가다 보면 실감한다. 산길을 굽이굽이 타고 올라가다 눈앞에 올려다보이던 후지산이 갑자기 구름 속으로 숨어 버린다. 그러다가 나타나는 후지산은 세 번 가서 한번 그 모습을 보면 다행 이라고 할 정도로 정상에 이르도록 일기가 불순하다. 그것은 마치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 모습을 선명하게 보는 운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벚꽃이 핀 후지5호(湖)에서 바라다 본 후지산 ▲ 오와쿠다니에서 바라다본 후지산, 로프웨이 안에서도 선명히 보인다 후지산 아래에는 후지5호(후지고코, 富士五湖)라고 해서 5개의 호수가 후지산을 아름답게 받쳐주고 있다. 후지5호는 에도시대(江戶時代)에는 후지8해(富士八海)로 불렸으며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일반인들이 쉽게 관광버스를 타고 중턱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없었지만 지금은 1,500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혜관스님은 고구려 사람이다. 수나라에 들어가서 가상대사 길장에게서 삼론의 요지를 배워 스이코 33년(625) 을유년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일본에 왔다. 칙명으로 원흥사에 주석하였다. 그해 여름 크게 가물었다. 임금께서 혜관에게 조칙을 내려 비를 빌게 하였다. 혜관이 푸른 옷을 입고 삼론을 강설하니 곧바로 비가 내렸다. 왕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를 발탁하여 승정으로 삼으셨다. 그 뒤 가와치의 정상사(井上寺)에서 삼론종을 널리 폈다. 도녕스님은 백제 사람이다. 하쿠호(684) 가을 8월 천하에 큰 가뭄이 들었다. 도녕에게 명을 내려 불법으로 비가 내리게 하였다. 효과가 있어서 큰비가 쏟아져 내렸다. 왕이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이는 14세기 일본의 승려 코칸시렌이 지은 불교통사 《원형석서, 겐코샤쿠쇼》에 나오는 기록이다. 지금은 멸망한 나라의 스님들이지만 일본의 사서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남아 있다. 백제 성명왕이 서기 552년(538년 설도 있음)에 불교를 전해준 곳을 아스카땅이다. 이어 인접해있는 지역 나라(奈良)로 왕실이 천도하게 되면서 동대사를 비롯한 수많은 절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초기의 절 건축과, 불상, 불탑, 경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 나라의 역사 깊은 큰 절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를 세운 스님은 백제스님 양변(良弁, 로벤)이다. 양변스님을 흔히 매가 키운 스님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데 이에 대한 스님의 재미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오우미국(近江國) 백제씨(百濟氏) 출신인 스님이 어렸을 때 일이다. 양변스님 어머니는 뽕 밭일을 하기 위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밭으로 나갔다. 아들을 뽕밭 한켠에 두고 뽕잎을 열심히 따고 있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매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빙빙 돌더니 어린 아들을 물고 가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나머지 하늘 높이 날아가는 매를 넋 놓고 쫓아갔지만 허사였다. 어린 아들을 물고 간 매는 동대사 이월당 삼나무에 걸어놓고 가버렸다. 한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사람은 당시 승려의 최고 직책을 맡고 있던 았던 백제계의 의연(義淵)승정이었다. 그때부터 양변스님은 의연승정의 제자가 되어 수행을 쌓은 뒤 동대사 건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마침내 초대 주지 직에 오른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본 최초의 불교통사인 《원형석서》를 비롯한 《곤쟈쿠이야기》 등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어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데일리도호쿠신문 3월 8일치에는 아오모리현 하치노헤시(八互市)의 봄소식을 알리는 사진 기사가 1면을 장식하고 있다. 봄소식, 가련한 큰개불알꽃이란 제목에 어린 두 꼬마가 봄꽃 핀 언덕에 앉아 있는 사진이 귀엽다. 봄꽃 핀 동산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자세히 보지 않고는 봄꽃인지 잔디밭인지 구분이 안 갈만큼 큰개불알꽃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아오모리현은 일본의 북쪽 지방이지만 이곳에도 슬슬 봄기운이 돌아 어제 낮 기온은 13도나 올랐다고 한다. 봄꽃들이 바야흐로 기지개를 피는 계절이다. 마부치 언덕에는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큰개불알꽃이 푸른 꽃을 피워 봄소식을 알렸다. 오후 무렵 근처에 놀던 어린이가 여린 꽃을 쥐고는 저녁에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요.라고 한다면서 신문은 짧게 큰개불알꽃이 피었음을 보도하고 있다. 글쓴이는 지난 1월 나라(奈良) 반야사(般若寺)에서 이 큰개불알꽃을 보았다. 이 꽃은 아주 작아서 몸을 땅에 납작 수그리지 않으면 도저히 눈에 띄지 않는 꽃이다. 왜 하필 개불알꽃이런가! 아무리 보아도 꽃 자체는 개불알을 연상하기 어렵다. 다만 이 꽃의 열매가 개의 불알을 닮았다고 해서 일본식물학자 마키노도미타로가 붙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