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뜻하지 않은 지진으로 지금 큐슈지방의 구마모토는 불안의 연속이다. 그걸 반영하듯 뉴스에선 시시각각으로 작은 여진이라도 보도하느라 바쁘다. 하루빨리 여진이 멈춰 불안에 떠는 주민들이 지진복구에 힘쓰길 빌어본다. 구마모토(熊本)라고 하면 일본의 3대성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熊本城)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밖에 나고야성(名古屋城), 오사카성(大阪城)을 합쳐 3대성이라고 할 만큼 구마모토는 성곽도시다. 성곽도시는 성주들이 각각 있게 마련이다. 각 성주들은 성곽 안에서 만큼은 왕과 같은 존재이다. ▲ 아름다운 구마모토성(熊本城)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시대부터 왕권이 아니라 장수들이 각 성을 중심으로 권력을 서로 쥐고자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조선이 중앙집권체제였다면 일본은 일찍부터 지방분권제가 발달한 셈이다. 성주들은 서로의 성을 지키고자 전쟁을 일삼았으며 빼앗았는가 하면 빼앗기는 일이 반복되기를 무신정권 내내 근 700여 년간 크고 작은 전쟁 속에 살아야 했다. 풍신수길의 오사카성이 철통같이 방어 된 것 같아도 결국은 덕천가강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에도성에 그 명성을 넘겨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완연한 봄기운이 도는 요즈음 서울 여의도는 벚꽃잔치(놀이)를 한다고 법석이다.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윤중로 주변은 흐드러진 벚꽃을 배경삼아 사진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의도뿐만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벚꽃잔치가 한창이다. 마치 일본 같다. 벚꽃잔치라고 하면 일본의 하나미(花見)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나라꽃인 벚꽃을 일본말로는 사쿠라라고 하는데 이상한 것은 벚꽃잔치를 ‘사쿠라마츠리’라 하지 않고 ‘하나미’라고 부르는 점이다. 하나미(花見)를 직역하면 ‘꽃을 본다’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달맞이도 ‘츠키미(月見)’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달을 본다’라는 뜻이다. ‘꽃놀이’, ‘달맞이’와 같은 우리말과 견주면 좀 맹숭맹숭한 느낌이지만 어쨌거나 벚꽃잔치는 원래 우리의 오랜 습관은 아니다. ▲ 벚꽃잔치인 하나미[花見] 특집을 알리는 광고 일본인들의 꽃놀이 풍습은 나라시대(710-794)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꽃놀이 행사였는데 당시에는 주로 매화꽃놀이였다. 그러던 것이 헤이안시대(794-1192)로 들어서면 서서히 벚꽃으로 바뀐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의 상징 후지산은 일본인들에게 사랑 받는 산이다. 사계절 그 모습이 아름답지만 아무래도 꽃피는 봄의 후지산은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에 견줄만하다. 후지산의 모습은 하루에도 여러 번 그 모습이 바뀌는 곳으로관광버스로 후지산(중턱까지 버스가 올라감)을 올라가다 보면 실감한다. 산길을 굽이굽이 타고 올라가다 눈앞에 올려다보이던 후지산이 갑자기 구름 속으로 숨어 버린다. 그러다가 나타나는 후지산은 세 번 가서 한번 그 모습을 보면 다행 이라고 할 정도로 정상에 이르도록 일기가 불순하다. 그것은 마치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 모습을 선명하게 보는 운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벚꽃이 핀 후지5호(湖)에서 바라다 본 후지산 ▲ 오와쿠다니에서 바라다본 후지산, 로프웨이 안에서도 선명히 보인다 후지산 아래에는 후지5호(후지고코, 富士五湖)라고 해서 5개의 호수가 후지산을 아름답게 받쳐주고 있다. 후지5호는 에도시대(江戶時代)에는 후지8해(富士八海)로 불렸으며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일반인들이 쉽게 관광버스를 타고 중턱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없었지만 지금은 1,500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혜관스님은 고구려 사람이다. 수나라에 들어가서 가상대사 길장에게서 삼론의 요지를 배워 스이코 33년(625) 을유년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일본에 왔다. 칙명으로 원흥사에 주석하였다. 그해 여름 크게 가물었다. 임금께서 혜관에게 조칙을 내려 비를 빌게 하였다. 혜관이 푸른 옷을 입고 삼론을 강설하니 곧바로 비가 내렸다. 왕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를 발탁하여 승정으로 삼으셨다. 그 뒤 가와치의 정상사(井上寺)에서 삼론종을 널리 폈다. 도녕스님은 백제 사람이다. 하쿠호(684) 가을 8월 천하에 큰 가뭄이 들었다. 도녕에게 명을 내려 불법으로 비가 내리게 하였다. 효과가 있어서 큰비가 쏟아져 내렸다. 왕이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이는 14세기 일본의 승려 코칸시렌이 지은 불교통사 《원형석서, 겐코샤쿠쇼》에 나오는 기록이다. 지금은 멸망한 나라의 스님들이지만 일본의 사서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남아 있다. 백제 성명왕이 서기 552년(538년 설도 있음)에 불교를 전해준 곳을 아스카땅이다. 이어 인접해있는 지역 나라(奈良)로 왕실이 천도하게 되면서 동대사를 비롯한 수많은 절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초기의 절 건축과, 불상, 불탑, 경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 나라의 역사 깊은 큰 절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를 세운 스님은 백제스님 양변(良弁, 로벤)이다. 양변스님을 흔히 매가 키운 스님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데 이에 대한 스님의 재미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오우미국(近江國) 백제씨(百濟氏) 출신인 스님이 어렸을 때 일이다. 양변스님 어머니는 뽕 밭일을 하기 위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밭으로 나갔다. 아들을 뽕밭 한켠에 두고 뽕잎을 열심히 따고 있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매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빙빙 돌더니 어린 아들을 물고 가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나머지 하늘 높이 날아가는 매를 넋 놓고 쫓아갔지만 허사였다. 어린 아들을 물고 간 매는 동대사 이월당 삼나무에 걸어놓고 가버렸다. 한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사람은 당시 승려의 최고 직책을 맡고 있던 았던 백제계의 의연(義淵)승정이었다. 그때부터 양변스님은 의연승정의 제자가 되어 수행을 쌓은 뒤 동대사 건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마침내 초대 주지 직에 오른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본 최초의 불교통사인 《원형석서》를 비롯한 《곤쟈쿠이야기》 등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어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데일리도호쿠신문 3월 8일치에는 아오모리현 하치노헤시(八互市)의 봄소식을 알리는 사진 기사가 1면을 장식하고 있다. 봄소식, 가련한 큰개불알꽃이란 제목에 어린 두 꼬마가 봄꽃 핀 언덕에 앉아 있는 사진이 귀엽다. 봄꽃 핀 동산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자세히 보지 않고는 봄꽃인지 잔디밭인지 구분이 안 갈만큼 큰개불알꽃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아오모리현은 일본의 북쪽 지방이지만 이곳에도 슬슬 봄기운이 돌아 어제 낮 기온은 13도나 올랐다고 한다. 봄꽃들이 바야흐로 기지개를 피는 계절이다. 마부치 언덕에는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큰개불알꽃이 푸른 꽃을 피워 봄소식을 알렸다. 오후 무렵 근처에 놀던 어린이가 여린 꽃을 쥐고는 저녁에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요.라고 한다면서 신문은 짧게 큰개불알꽃이 피었음을 보도하고 있다. 글쓴이는 지난 1월 나라(奈良) 반야사(般若寺)에서 이 큰개불알꽃을 보았다. 이 꽃은 아주 작아서 몸을 땅에 납작 수그리지 않으면 도저히 눈에 띄지 않는 꽃이다. 왜 하필 개불알꽃이런가! 아무리 보아도 꽃 자체는 개불알을 연상하기 어렵다. 다만 이 꽃의 열매가 개의 불알을 닮았다고 해서 일본식물학자 마키노도미타로가 붙인 이름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래된 일본 과자점 관영당본점(寬永堂本店)은 긴테츠나라역(近鐵奈良驛) 바로 앞에 있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생긴 유서 깊은 과자점이다. 전국에 여러 지점이 있는 관영당 과자점은 간판에 창업 시기를 관영(寬永)이라고 써 두었는데 관영(寬永, 칸에이)이란 일본의 연호로 1624년에서 1645년 기간을 말하며 에도시대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과자점 안을 기웃거리자 단정한 옷을 입은 종업원이 상냥한 인사를 건넨다. 보기에도 군침이 도는 노릇노릇하게 구운 도라야키(どら燒き)가 눈과 코를 자극한다. 도라야키는 밀가루, 달걀, 설탕을 넣어 반죽을 한 뒤 둥글납작하게 구워 두 쪽을 맞붙인 사이에 팥소를 넣은 일본과자를 말한다. 이 도라야키를 오사카와 나라(奈良)지방에서는 미카사(三笠)라고도 한다. 미카사란 과자 모양이 나라현의 미카사산(三笠山)과 닮은 데서 그렇게 부른다. 서양 과자점을 양과자(洋菓子)라고 한다면 일본 과자는 화과자(和菓子)이다. 그러고 보면 일본에는 관영당 같은 화과자점이 많다. 이곳에서는 카스텔라나 케이크 같은 양과자는 팔지 않고 대대로 화과자점 만의 독특한 전통 과자를 판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딸 가진 엄마들의 소원은 무엇일까? 전통사회에서는 곱게 키워 출가 시키는 것이겠지만 현대 사회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만큼 딸에게 거는 기대와 소원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것은 딸아이의 건강과 올바른 성장'임은 틀림없다. 일본에서는 딸아이가 태어나면 할머니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크라는 뜻에서 히나 인형을 선물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부터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이 풍습을 히나마츠리(ひな祭り) 라고 한다. 히나마츠리는 혹시 모를 미래에 딸에게 닥칠 나쁜 액운을 덜기 위해 시작한 인형 장식 풍습인데 이때 쓰는 인형이 히나인형(ひな人形)이다. 히나마츠리를 다른 말로 모모노셋쿠(桃の節句) 곧 복숭아꽃 잔치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복숭아꽃이 필 무렵의 행사를 뜻하는 것으로 예전에는 히나마츠리를 음력 3월 3일에 치렀다. 히나인형은 원래 3월 3일 이전에 집안에 장식해 두었다가 3월 3일을 넘기지 않고 치우는 게 보통이다. 3월 3일이 지나서 인형을 치우면 딸이 시집을 늦게 간다는 말도 있어서 그런지 인형 장식은 이 날을 넘기지 않고 상자에 잘 포장했다가 이듬해 꺼내서 장식하는 집도 꽤 있다. 그러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 사회도 나이가 들고 병이 생기면 아들딸과 함께 살기 보다는 노인요양 시설로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돈의 힘이 작용하게 마련이라 좀 더 안락하고 쾌적한 시설로 들어가려면 든든한 노후 자금이 필요하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꽤나 값나가는 시설에 들어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느냐하면 그렇지도 못하다는 게 문제다. 2월 16일 마이니치신문 보도에 따르면 도쿄 인근 가와사키시 사이와쿠(川崎市幸)에 있는 고급 유료 노인홈 S 아뮤 가와사키 사이와이쵸에서 잇단 노인 추락사를 일으킨 사람이 직원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고 있다. ▲ 일본의 한 요양원 직원, 입원한 노인을 추락사시키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름하여 입소자 연속 추락 살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다름 아닌 이곳에 근무했던 젊은 남자 직원으로 그는 새벽 시간을 틈타 베란다에 나와 있는 노인들을 밀어서 추락사 시켰던 것이다. 범인은 태연하게 추락사한 노인을 처음 발견한양 쇼를 부렸지만 결국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범인은 노인학대도 서슴지 않았는데 비상시 누르게 되어 있는 빨간 버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19년 3ㆍ1만세운동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2ㆍ8동경독립선언을 이야기 한다. 엊그제 설날이 바로 97년 전 동경 YMCA에서 유학생들이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국 일본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날이지만 그만 설날에 묻혀버려 아무도 이 날을 기억하지 않아 씁쓸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유학생들은 유학생 학우회 총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4백여 명의 학생들이 재일본도쿄조선YMCA (현재의 재일본한국YMCA) 강당에 모였다. 동경 경시청에서도 이미 눈치를 채고 오전부터 수십 명의 정사복 경찰을 파견하여 삼엄한 감시를 했다. 그런 가운데 식은 진행되어 회장인 백남규의 개회선언, 최팔용의 조선청년 독립단의 발족 동의, 백관수의 독립선언서 낭독, 김도연의 결의문 낭독에 이어 서 춘이 연설하려 하자, 일본 경찰이 무력으로 개입하여 학생 대표들을 모조리 검거하였다. 송계백 선생도 이날 함께한 유학생이었다. 선생은 평안남도 평원(平原) 사람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재학 중, 2ㆍ8 독립선언에 참가한 11명 대표 가운데 한 분이다. 선생을 포함한 재일 유학생들은 자나 깨나 조국광복의 꿈을 키워 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