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묘조에 여러 신하들을 추복(追復, 빼앗았던 벼슬을 죽은 뒤 회복시킴)시켰을 때와 선묘조에 군흉(群凶, 흉악한 무리)을 추삭(追削, 죽은 사람의 벼슬을 깎아 없앰)하였을 때를 참고하여 옛글과 교문(敎文, 죄인을 사면하기 위해 임금이 내리는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 이와 같이 처분한 후에도 이 일을 다시 제기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마땅히 멀리 유배라도록 하는 법을 시행할 것이다. 아! 가까운 신하들은 나의 이 분부를 조정과 민간으로 하여금 모두 분명히 알게 하여야 할 것이다.“ 위는 《영조실록》 5권, 영조 1년(1725년) 4월 10일 기록으로 영조 임금이 즉위하고 반년이 지난 뒤 탕평책을 대내외에 밝힌 것입니다. 노론ㆍ소론ㆍ남인ㆍ북인 등이 휩쓴 붕당정치의 폐해를 겪었던 영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붕당 타파를 위한 탕평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또 영조에 이은 정조는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깨끗한 신하를 등용했으며, 규장각을 개편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자신의 측근으로 삼아 왕권 강화를 꾀했지요. 탕평정치는 필연적으로 왕권의 신장과 임금을 중심으로한 정국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목련, 봄의 문을 두드리다 - 이정호 (앞줄임) 목련, 겨울의 침묵을 뚫고 첫봄의 언어를 피워낸다. 그 고요한 피어남은 누군가에게는 인사, 누군가에게는 위로, 그리고 나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다. (뒷줄임) “운조루 고택은 봄이 되면 장독대 옆에 피어나는 하얀 목련으로 더욱 빛이 납니다. 청아한 자태를 뽐내는 목련은 고택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 목련은 단순한 꽃 그 이상으로, 운조루 고택의 며느리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겪었던 고된 시집살이 속에서 하얀 목련은 그녀들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었습니다.” 이는 지난 3월 26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임세웅 기자의 기사 일부다. 나는 지난 2013년 운조루를 방문하고 <굴뚝을 섬돌 밑에 내어라 200년 이어온 '나눔의 정신'>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기사 가운데는 “운조루에는 아주 희귀한 쌀뒤주가 있는데 “他人能解(타인능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뒤주가 그것이다. 이 뒤주는 말 그대로 양식이 떨어진 이들을 위한 것으로 누구든 쌀을 퍼가라고 조그마한 쌀 구멍이 뒤주에 뚫려있다. 이것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器具)를 만들어 이름을 ‘측우기(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尺, 33.33cm) 5촌(寸, 1치의 1/10)이고 직경(直徑)이 7촌입니다. 주척(周尺, 자)을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 천문ㆍ역일(曆日)ㆍ측후(測候) 등을 맡아보던 관청)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고 매양 비가 온 뒤에는 서운관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 오고 갠 때와 물 깊이의 척ㆍ촌ㆍ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임금에게 아뢰고 기록해 둘 것이며,“ 위는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1442년) 5월 8일 기록입니다. 583년 전인 1442년 조선에서 강수량 측정을 위해 세계 처음 측우기와 측우대를 만들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영국의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에 의해 1662년 처음 서양식 우량계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우리나라보다 220년이 늦은 때입니다. 지난 2020년 국가유산청은 근대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금영 측우기‘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십이가사 가운데 하나로인 궁중음악 ‘춘면곡(春眠曲)’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춘면(春眠)을 느즛 깨야 죽창(竹窓)을 반개(半開)하니” 곧 “봄잠을 늦게 깨어 죽창(대로 살을 만든 창문)을 반쯤 여니”로 시작하는 춘면곡은 임을 여의고 괴로워하는 한 사내가 기생집에 들러 봄의 운치에 빠져서 모든 괴로움을 잊어버리려는 심리를 표현한 작품으로, 육감적이고 퇴폐적인 내용입니다. 《청구영언》을 비롯하여 《고금가곡(古今歌曲)》ㆍ《해동악부(海東樂府)》ㆍ《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ㆍ《고금기가(古今奇歌)》ㆍ《가곡원류(歌曲原流)〉 등의 가집류에 실려 전하기 때문에 이로 미루어 300년 전부터 부른 노래로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춘면곡>은 그동안 지은이를 모른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지양 교수의 책 《홀로 앉아 금(琴)을 타고》에 보면 18세기 초의 문인 이하곤(李夏坤)의 문집 《두타초(頭陀草)》에서 '<춘면곡>은 진사 이희징(李喜徵)이 지은 것인데, 소리가 매우 슬프고도 청초하여 듣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라고 나온다며, <춘면곡>의 지은이는 이희정임을 맑혔습니다. <춘면곡&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명하여 단오의 영상시(迎祥詩, 나라에 기쁜 일이 있을 때 짓는 시)를 그치도록 하였다. 그때 단오가 가까워졌으므로 승정원에서 세규(歲規)에 의하여 제술관(製述官)을 뽑아서 아뢰고 대제학 주문신(主文臣)을 불러 운자(韻字)을 내어 과거에 문제 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가뭄 피해가 이러하니, 이번에는 시문을 지어 올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위는 《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1718년) 5월 1일 기록으로 숙종은 가뭄이 심하므로 과거를 열어 시문을 지어 올리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조선시대 임금은 이렇게 가뭄뿐만이 아니라 물난리가 나고 벼락이 치고, 돌림병이 도는 등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임금이 부덕하여 이런 재난이 생긴다고 하여 과거에서 시문을 짓는 것도 못 하게 하는 것은 물론 감선(임금이 근신하는 뜻에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일) 하거나 초가에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벼락”으로 검색하면 무려 1,239건이 나오는데 거의가 “아무 데서 아무개가 벼락을 맞았다.”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년) 3월 13일에 보면 “삼각산의 소나무와 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완성되었다. 무예에 관한 여러 가지 책에 실린 곤봉(棍棒), 등패(藤牌, 둥근 방패), 낭선(狼筅, 낭선창으로 하는 무예), 장창(長槍, 긴창으로 하는 무예), 당파(鎲鈀,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당파창으로 하던 무예), 쌍수도(雙手刀, 양손에 칼을 쥐고 하는 무예) 등 여섯 가지 기예는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왔는데“ 《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1790년) 4월 29일 기록에 위처럼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정조 14년 임금의 명에 따라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이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하여 펴낸 무예서입니다. 4권 4책 목판본으로 《무예통지》ㆍ《무예도보》ㆍ《무예보》라고도 합니다. 서문에서는 정조가 이 책을 펴내게 된 동기를 밝혔습니다. 이를 보면 당시 우리나라에는 창이나 검의 병기는 없이 궁술(弓術, 활을 쏘는 무예)만 있었지요. 그런데, 임진왜란 뒤 선조 때 곤봉(棍棒)ㆍ장창(長槍) 등 여섯 가지 기예를 다룬 《무예제보》를 펴냈으며, 영조 때에는 여기에 죽장창(竹長槍, 대로 만든 긴창으로 하는 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호의 좋은 경치 이 누대에 있으니(西湖形勝在斯樓) 마음대로 올라가서 흥겹게 노닌다네.(隨意登臨作遊遊) 서쪽 언덕 비단옷 입은 이 봄풀과 어울렸고(西岸綺羅春草合) 강물 가득 빛나는 푸른 물빛 석양 속에 흐르네.(一江金碧夕陽流) 구름 드리운 작은 마을엔 배 한 척 숨어 있고(雲垂短巷孤帆隱) 꽃이 진 한가한 낚시터에 멀리 피리소리 구슬퍼라.(花落閑磯遠笛愁) 끝없는 바람과 연기 거두어 모두 사라지니(無限風烟收拾盡) 시 담은 비단 주머니 그림 난간 가에서 빛나네.(錦囊生色畵欄頭) 이 시는 조선시대 여성으로 금강산을 오른 김금원(金錦園, 1817~?)이 지은 〈강사(江舍)〉라는 시입니다. 금강산! 지금은 갈 수 없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숱한 시인 묵객과 화가들이 금강산에 올라 시를 짓고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금강산을 오른 사람 가운데 흔적을 남긴 여성은 어쩌면 김금원이 유일할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사대부 출신이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기생이라 그녀 역시 기생의 삶을 살게 된 여인입니다. 그런 김금원이 열네 살 때 남장하고 금강산을 여행하는데 그때 보고 느낀 것을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라는 책에 남기는 등 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서울만 보더라도 2025년 현재 394개의 버스노선을 운행하고 있는데 간선이 135개, 지선 208개, 광역 10개, 순환 2개 노선 등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울 곳곳을 버스가 누비고 있는데 맨 처음 서울에 버스가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요? 그것은 1928년 4월 22일로 경성부는 일본에서 만든 우즈레라 불리는 버스를 도입했습니다. 이 버스는 정원이 22명이었으며, 요금은 구역별 7전이었다고 하지요. 경성부에서 버스사업을 했기 때문에 부영버스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 전차는 120대였는데 이용객은 11만여 명, 버스는 40대 정도로 버스 이용객은 1만여 명이었는데, 그때 경성 인구가 39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버스가 다니는 노선은 경성역(현재의 서울역)부터 총독부(경복궁 앞부분을 헐고 지음) 앞까지 다닌 제1구와 총독부 앞에서 대화정 1정목(헌병대 사령부 앞, 현 남산골한옥마을 자리)까지 다니던 제2구가 있었습니다. 부영버스는 손님을 끌기 위해 차표를 끊어 주는 아가씨 차장들을 버스에 태워 장안의 큰 이야깃거리가 되었지요. 신식교육을 받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전 참의 윤선도는 심술이 바르지 못하여 감히 음험한 상소문으로 상하의 사이를 너무도 낭자하게 헐뜯고 이간질하였으니, 그 죄 빠져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중한 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겠으나 차마 죄주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 그냥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내쫓으라." 이는 《현종실록》 2권, 현종 1년(1660년) 4월 18일 기록으로 윤선도를 유배하라는 현종의 명입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이라 /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라는 시조 ‘오우가(五友歌)’로 알려진 조선시대 문신이며, 학자입니다. 윤선도는 위 기록처럼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당대의 권력자 송시열이 효종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서인세력과 함께 복제문제로 효종을 서자 취급하는 데 격분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험난한 25년의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숙종 때 송시열이 처벌받은 뒤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지요. 또한 윤선도는 “음식이란 배를 채우는 것으로 족하고, 의복이란 몸을 가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라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진헌색(進獻色, 중국 황제에게 특별한 선물을 할 때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둔 임시 관아)을 설치하여 여자아이)를 모으고, 조정과 민간의 혼인을 금하였다.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남재(南在)ㆍ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함부림(咸傅霖)ㆍ한성윤(漢城尹) 맹사성(孟思誠)으로 제조(提調)를 삼고, 경차관(敬差官,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벼슬)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처녀를 뽑게 하였는데, 천한 백성과 노예를 뺀 양갓집 처녀 13살 이상 25살 이하를 모두 고르게 하였다.“ 위는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1408년) 4월 16일 자 기록으로 중국 황제에게 선물하기 위해 조정과 민간의 혼인을 못 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에 왕비나 세자빈과 공주의 사위를 고를 때 온 나라에 금혼령을 내린 줄 압니다. 그런데 위 기록을 보면 중국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 금혼령도 내려 양갓집 처녀 13살 이상 25살 이하는 모두 혼인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지요. 심지어 고려시대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나라가 고려에 공녀를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특히 충렬왕은 고려 여성들을 공녀로 보내기 위해 금혼령을 내리고 13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