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옛 그림. ‘옛 그림’이라는 말을 들으면 약간은 어렵고,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 같고, 혼자서는 그다지 찾아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옛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보통은 친절한 안내가 없으면 옛 그림은 다소 어려운 분야다. 이 책, 《옛 그림 읽어주는 아빠》의 지은이 장세현은 옛 그림을 ‘읽는다’. 보통 그림은 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옛 그림은 보는 그림이자 읽는 그림인 까닭이다.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쉽게 말해 상형문자를 읽듯, 그림을 글자처럼 읽는 것이다. 또 하나, 옛사람들에게 그림은 단지 그림이 아니라 마음을 갈고 닦는 하나의 수양 방법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먹을 갈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붓질하며 마음을 괴롭히는 헛된 생각과 욕심을 다스렸다. 이런 마음 수양 그림의 대표적인 분야가 ‘사군자’다. 선비의 기개를 뜻하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선비들에게 두루 사랑받았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대나무였다. 그림을 그리던 관청인 도화서 화원을 뽑는 시험에서도 대나무 그림을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 대나무를 운치 있고 격조 있게 그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대나무 그림에 바위가 더해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 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 施仁發政, 方推渙汗之恩。”(《세종실록》 즉위년 8/11, 1418) 한문의 시대에서 국한문 혼용으로 세종은 한 나라의 임금이다. 임금은 정치적으로 백성을 다스린다. 중세시대 백성들이 뽑는 절차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정치를 통해 백성들의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에 정치는 백성을 다스리며 희망을 주어야 한다. 세종은 백성을 잘살게 하려고 여러 가지 제도의 개선, 기존 사물의 개선, 새로운 제도, 나아가 창제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힘쓰셨다. 이런 세종의 발자취와 그 의미를 하나씩 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왜? 하필 한자(漢字)로 이루어진 사자성어(四字成語)를 통해서일까. 세종이 정치를 하는 동안이나 이후 몇백 년은 한자가 우리의 주 의사교환 수단이고 공식 언어였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조선조 4대 임금 세종 때의 일이었지만 이후로도 오랫동안 주된 글로 사용된 것은 한글이 아닌 한문이었다.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사대주의적 관점에서는 한문이 진정한 글이었고, 한글은 단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천한 글에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김 과장은 술이 약했다. 기껏해야 맥주는 두 잔, 소주는 석 잔이면 얼굴이 빨개지고 졸음이 왔다. 그래서 김 과장은 아내로부터 ‘술새우’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포도주는 한 병까지 마셔도 그저 즐겁게 취할 뿐이어서 김 과장은 스스로 포도주 체질이라고 생각해 왔다. 김 과장은 일요일마다 아내 따라서 형식적으로 교회에 나간다. 어느 날 목사님 설교 가운데 예수가 가나촌 (예수가 처음으로 기적을 행한 동네 이름. 혼인식에 초대받은 예수가 술이 떨어지자, 물을 술로 변하게 하는 기적을 행한 곳) 혼인잔치에서 여섯 항아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여 잔치에 참석한 모든 이를 즐겁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예수를 믿더라도 포도주는 마셔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교회를 나가면서도 마주앙을 마시는 것이 조금도 죄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나가서 노래해요.” “그러자.” 김 과장은 최희준의 ‘하숙생’, 양희은의 ‘내 님의 사랑’ 등 옛날 노래를 불렀고, 아가씨는 김 과장이 잘 모르는 최신의 대중가요를 불렀다. 함께 춤도 췄다. 김 과장은 기분이 좋았다. 아가씨도 기분이 좋아졌다. 둘은 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일본은 정원의 나라다. 일본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모두 1,000여 곳의 정원이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어디일까? 일본연구가 황현탁에 따르면 전통적으로는 가나자와시의 겐로쿠엔(金沢市の兼六園), 오카야마시의 고라쿠엔(岡山市の後楽園), 미토시의 가이라쿠엔(水戸市の偕楽園)을 꼽는다. 이 세 정원을 이름난 정원(名園)으로 꼽는 까닭은 눈, 달, 꽃(雪月花)이 각각 유명하기 때문으로 겐로쿠엔은 눈, 고라쿠엔은 달빛, 가이라쿠엔은 꽃이 유명하다. 이 세 정원은 모두 인공 연못이나 개울을 조성하고, 다리, 섬, 산을 만들거나 돌이나 바위를 옮겨 산책로를 조성하여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 정원으로 일본 각지의 영주들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일본정원학회라는 데서 1999년에 창간해 전 세계에 배포하고 있는 《SUKIYA LIVING MAGAZINE》라는 격월간지는 세계 정원의 순위를 매기면서 2003년부터 20년 넘게 오직 이곳을 1위로 꼽고 있는데, 바로 시마네현 야스기시(安來市)에 있는 아다치미술관(足立美術館)이다. 이 학회는 해마다 일본 내 정원을 규모나 지명도와 관계없이 전 세계 전문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슬슬 거닐다》 ‘숨어있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책길 34곳’이라는 부제처럼, 아름다운 산책길을 걷고 싶을 때 보기 좋은 책이다. 어디론가 바쁘게 가야 하는 일상, 그 일상을 내려놓고 ‘슬슬 거닐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이 책 《슬슬 거닐다》은 번역가이자 작가인 지은이 박여진이 월간지 기자이자 사진가인 백홍기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곳을 두루두루 찾아다닌 기록이다. 이들의 발걸음이 아니었다면 쉬이 몰랐을 주옥같은 명소들이 유려한 문체로 소개되어 있다. 대표적인 곳이 문경 고모산성이다. 산성을 걸어본 이라면 한편으로는 그 촘촘한 짜임새에, 한편으로는 이제 부질없어져 버린 산성의 튼튼한 기능에 알 수 없는 감회를 느꼈을 법하다. 지은이 또한 그랬다. (p.225) 성곽길에는 특유의 결연함이 있다. 촘촘히 올라간 돌 마디마다 조금의 허술함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견고함이 느껴진다. 높은 곳에서 강이나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위엄도 근사하다. 다만 활과 포를 쏴 필사적으로 막아야 할 적이 없는 이 시대의 나른함과 성곽의 결연함이 잘 어울리지 않을 뿐이다. ‘비장할 필요가 없어진’ 고모산성은 이제 슬슬 거닐기 좋은 산책로가 되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우리 겨레의 삶을 구렁으로 몰아넣은 옹이는 바로 중국 글말인 한문이었다. 기원 어름 고구려의 상류층에서 한문을 끌어들였고, 그것은 저절로 백제와 신라의 상류층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말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우리말에 맞추어 보려고 애를 쓰기도 하였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중국 글자(한자)를 우리말에 맞추는 일에 힘을 쏟으면서, 또 한쪽으로는 한문을 그냥 받아들여 쓰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한자로 우리말을 적으려는 일은 적어도 5세기에 비롯하여 7세기 후반에는 웬만큼 이루어졌으니, 삼백 년 세월에 걸쳐 씨름한 셈이었다. 한문을 바로 끌어다 쓰는 일은 이보다 훨씬 빠르게 이루어져, 고구려에서는 초창기에 이미 일백 권에 이르는 역사책 《유기》를 펴냈고, 백제에서는 4세기 후반에 고흥이 《서기》를 펴냈으며, 신라에서는 6세기 중엽에 거칠부가 《국사》를 펴냈다. 상류층이 이처럼 한문에 마음을 쏟으면서, 우리 겨레 동아리에는 갈수록 틈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배워서 익힐 시간을 가진 상류층 사람들은 한문으로 마음을 주고받는 새로운 길로 내달았으며, 배워서 익힐 시간을 갖지 못한 백성들은 언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재담꾼인 박 과장은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잘했다. 군대 가서 고생 안 했다는 사람 없고 모두 자신이 빳다도 제일 많이 맞고 기합도 제일 심하게 받았다고 우기며, 대개는 튀밥 튀기듯이 침소봉대하는 것이 군대 이야기이다. 이윽고 아가씨 두 명이 들어와 각각 옆에 앉았다. 김 과장은 여전히 박 과장의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박 과장은 이제 병장이 되었고, 제대 말년에 졸병들을 종처럼 부리며 왕처럼 편하게 지낸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동안 김 과장은 옆에 앉은 아가씨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기다리기가 지루했던지 아가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스 나에요” “아, 네 안녕하십니까?” 그러고 나서도 박 과장이 제대하기까지는 10분 이상이 지나갔다. 그제야 김 과장은 아가씨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어둑한 실내등에 비친 아가씨를 보니, 토끼처럼 귀엽게 생긴 얼굴이었다. “귀여운 아가씨인데 이름이 뭡니까?” “수련이에요.” “나수련이라, 예쁜 이름인데요.” “고맙습니다.” “우리 이렇게 인연이 되어 만났으니, 술이나 한잔 같이합시다. 아가씨 잔을 가져오라고 해요.” 맑은 포도주를 반쯤 담은 유리잔이 쨍하며 마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꼼장어와 멸치회, 장어구이 등으로 유명한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의 죽성리라는 곳에 가면 일본식 성(城)의 흔적이 남아있다. 죽성리 왜성이라 불리는 이 성은 마을 해안가 가까이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조선ㆍ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남해안에 장기간 머물기 위해 돌로 쌓은, 둘레 약 960m, 성벽 높이는 약 4m의 성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조 중종 때 왜구의 방어를 위해 두모포진(豆毛浦鎭)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던 곳인데 왜군들은 이곳에서 두모포 진성 밖 더 너른 쪽에 왜성을 쌓고 그 옆 포구를 통해 조선 각지에서 잡아 온 도공들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 언덕받이에는 현재 소름요라는 도자기 가마가 있거니와 그 아래쪽에 무명도공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 속에 끌려간 도공들을 추념하기 위함이다. 납치된 도공들은 죽성리 포구에서부터 규슈 일대로 많이 실려 갔지만, 상당수는 바다 맞은 편에 있는 하기(萩)라는 곳으로 갔다. 당시 이곳의 영주인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돈독한 신임을 받아 8개 번(藩)을 이끄는 대장이 되기도 했고, 임진왜란 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26) 나는 몇 달을 더 못 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조국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히지 않을 뿐이다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백정기 열사의 무덤 비문에 적힌 이 시는, 그가 숨을 거두기 전 동지들에게 남긴 말이다. ‘옛 무덤’이라고 하면 흔히 망자가 묻혀 있는 정적인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무덤 하나하나마다 이처럼 심금을 울리는 사연이 배어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고 했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청동말굽이 쓴 책, 《옛 무덤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국사》는 그런 의미에서 더욱 특별하다. 책에 소개된 옛 무덤들은 그 자체로 죽은 이를 대변한다. 몇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책은 크게 ‘나라를 세운 왕들의 무덤’, ‘위기 앞에서 용기를 보여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고 김수업 선생은 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우리말대학원장과 국어심의위원장을 지낸 분이다. 특히 선생은 토박이말 연구에 평생을 바쳤으며, 쉬운 말글생활을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그런 선생은 토박이말사전을 만들다가 지난 2018년 우리 곁을 떠났다. 선생이 생전에 펴낸 책 《우리말은 서럽다》는 우리가 왜 쉬운 토박이말을 써야 하는지 명쾌하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 신문은 지난 2014년 《우리말은 서럽다》 본문을 연재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건만 대한민국은 오히려 토박이말을 더욱 홀대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다시 선생의 《우리말은 서럽다》를 끄집어내 토박이말을 써야하는 까닭을 또렷이 해두고자 한다. <편집자 말> 사람에게 가장 몹쓸 병은 제가 스스로 업신여기는 병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다지만, 제가 스스로 업신여기는 병보다 더 무서운 절망은 없으며, 이는 스스로 손쓸 수 없는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겨레는 지난 이즈믄(천) 년 세월에 걸쳐, 글 읽는 사람들이 앞장서 스스로 업신여기는 병에 갈수록 깊이 빠져 살았다. 그런 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