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이천(李蕆, 1376∼1451))은 세종시대가 낳은 과학자의 한 사람인데 《조선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주요 실적을 확인해 보자. 세종 3년, 구리판 : 구리판을 다시 잘 주조한 주자소에 술 120병을 내려 주다. (《세종실록》 3/3/24) 세종 10년, 성터 살핌: 공조 참판 이천을 함길도 경원 등지에 보내어 성터를 살펴 정하게 하다. (《세종실록》 10/7/21) 세종 13년, 쇠고리 제작: 근정전 등에 화재시 사용할 쇠고리를 만들게 하다. "근정전(勤政殿)이 높아서 만일 화재가 있다면 쇠고리를 연쇄(連鎖)하여 처마 아래로 늘여 놓았다가, 화재가 있으면 이를 잡고 오르내리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 근정전·경회루·사정전· 인정전 등에 사용할 쇠고리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세종실록》 13/1/2) 세종13년: 이천으로 하여금 노궁(弩弓)의 제도를 살펴보고 만들게 하다. (《세종실록》 13/5//17) 세종 14년: 지중추원사 이천이 선척을 견고하게 만드는 방법을 힘써 진언하다. (《세종실록》 1412/18) 세종 16년: 지중추원사 이천에게 주자(鑄字)를 만들어 책을 박도록 하다. 지중추원사 이천(李 蕆
[우리문화신문=유용우 한의사] 한의대에 입학하고 한의학의 개론을 배울 때 듣는 한의학의 핵심 가운데 큰 개념이 [인체는 소우주]라는 문구였다. 이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 흔히 말하는 ‘견강부회(牽强附會)’와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기술을 활용하여 겨우 이해한 기억이 있다. 한의사로서 세월이 30년이 되다 보니 어느 순간 한의학 개론에 언급되었던 내용들이 하나둘씩 나에게도 체화된 것을 느끼게 된다. 어찌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것, 당연한 것들이 건강을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건강을 위한 기본이 여러 가지 존재하는데 그 핵심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과 외부와 얼마나 원만하게 소통하는가 하는 데에 있다. 소통의 첫째는 ‘호흡’이다. 내 몸에 필요한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고 더불어 자연지기(自然之氣)를 흡입하고 이산화탄소와 탁기(濁氣)를 배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호흡을 원활하게 하여 여유를 갖는 것이 건강의 기초가 된다. 이렇게 심페기능이 뛰어난 사람들은 호흡기 질환에 대해서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소통의 두 번째는 ‘음식물의 섭취’다. 우리 몸은 외부로부터 음식물을 섭취해서 영양을 취해야만 내 몸을 유지하고 활동할 수 있는 에너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강을 오른쪽에 두고 걷다 보니 북쪽으로 멀리 성필립보 생태마을이 보인다. 강가의 아카시아나무에서는 이제 막 아까시 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이 부근의 평창강 경치도 매우 아름다웠다. 도돈리 구역도를 보면 북쪽으로 평창강이 반도 모양의 땅을 휘돌아 흘러간다. 아마도 이 부분이 옥녀봉에서 바라보면 한반도 지형처럼 보일 것이다. 내가 사전 답사할 때 차를 타고 들어가 살펴보니 한반도 지형은 둑길이 중간에 끊겨 있다. 한반도 지형의 중간까지만 들어갔다가 둑길 따라 나오는 코스를 차로 미리 답사해 두었다. 82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오른쪽 숲으로 나 있는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한적한 숲길을 따라 들어가니 외딴집이 나타난다. 저런 집에 살면 외롭지 않을까? 숲길에 이어서 평창강 둑길이 나타난다. 길은 좁고,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봄이 한창이어서 사방이 녹색이다. 소곤소곤 소리 내며 흐르는 강 너머로는 녹색의 산이 가까이 보인다. 이 시기에 이처럼 아름다운 길을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작은 기쁨이자 커다란 축복이다. 흙길 구간이 끝나면서 다시 82번 길로 돌아왔다. 길 따라 내려가자 대상마을 표시석이 왼쪽에 나타
[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이번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채현국 선생의 이력입니다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1961년 한국방송 피디로 입사했으나 권력의 나팔수로 살기 싫다며 입사 3개월 만에 PD를 때려치웠습니다. 그리곤 부친이 운영하던 강원도 삼척 도계로 들어가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광산업자로서 성공했으나 유신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스스로 재산을 정리하여 주변에 나눠주고 말았다고 합니다. 민주화운동을 하며 도피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셋방살이하는 해직 기자들에게는 집을 사 주기도 했던 파격의 행동! 1988년 효암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해서는 무급으로 일을 했습니다. 사업을 접으실 때는 일반적인 퇴직금의 3배를 주었으며 나눠준 게 아니라 돌려준 거라고 하였다네요 10월 유신 이후 이대로 가다간 또 권력과 얽혀 앞잡이가 될 상황이 올까 우려했고, 개인적으론 돈 버는 맛에 중독되어가는 자신을 경계하며 사업을 정리하고 자유인으로 살다가 가셨습니다 오래전 인사동에서 돌아가신 시인 강민 선생님과 걸어가시던 선생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렸지만 그땐 선생을 잘 몰랐습니다. 2021년 4월 2일, 노환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향년 86세.
[우리문화신문=유용우 한의사] 겨울이 되면 추위 때문에 생활이 여러모로 불편해지고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게 된다. 그래서 밖으로는 모세혈관이 수축되면서 추위로 고생을 하고 안으로는 점막 순환이 잘 안돼 호흡기와 소화기 점막 기능이 떨어지고 호흡기 질환과 소화기 질환이 빈발한다. 곧 호흡기의 점막이 위축되면서 감기와 비염, 천식을 비롯한 호흡기 질환과 소화기 점막의 정체가 생기고, 정맥 순환이 느려지면서 식욕저하와 소화불량, 체기와 같은 각종 소화기 질환이 노출되기 쉬운 계절이다. 이러한 겨울을 건강하게 보내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소화기 점막과 호흡기 점막의 순환을 원활하도록 다양한 음식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러한 바탕 속에 겨울이면 생각나는 음식으로 동지의 팥죽, 정월 보름의 부럼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심한 추위 때는 속을 따뜻하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음식이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가볍게 생각나는 음식은 생선묵 국물과 군밤ㆍ군고구마, 얼큰한 생선 매운탕과 짬뽕 정도가 있다. 더불어 식혜와 수정과 같은 전통음료와 생강차ㆍ모과차ㆍ유자차와 같은 차들도 겨울을 따뜻하고 푸근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겨울철 제철 음식으로는 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김삿갓 시비를 떠나 강 따라 조금 더 가자 작은 언덕이 나타났다. 이정표가 보인다. 언덕은 흙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경사가 급했다. 이어서 한적한 숲길이 나타난다. 숲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다. 4박자 울음이 독특한 검은등뻐꾸기 소리였다. 속칭으로는 ‘홀딱새’라고 부른다. 숲속에서 새 소리를 잘 들어보면 ‘홀-딱-벗-고, 홀-딱-벗-고’라고 들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검은등뻐꾸기는 철새다. 중부지방에서는 5월에 잠간 머물다가 날아가 버린다. 아래 인터넷 주소에서 홀딱새의 울음소리를 직접 들어볼 수 있다. 검은등뻐꾸기(홀딱새) 울음소리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GvPjhUqxhXM 산길을 따라 조금 가자 왼편에 쉼터가 나타나고 그 옆에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강 건너편 마을이 마지리다. 안내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지리는 읍의 남부 동남쪽에 위치하며, 본래부터 龍(용)물이에서 말(馬)이 났다고 하여 마지리(馬池里)라 불려졌다고 전하여 온다. 연대는 미상이나 마지마을이 생길 때, 高山골에 나주(羅州) 羅씨가 살았는데 어느 날 어린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지 사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으뜸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까닭은 우수한 과학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사학자들은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났던 과학기술자가 있다고 한다. 누굴까? 과학사학자들은 장영실이 노비 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으뜸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국사학과 교수들은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서울대 문중양교수)를, ‘이순지와 이천’(전북대 김근배교수)을 꼽았다.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은 2003년 1월 과학기술을 존중하는 사회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마련했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과학기술인 15인 가운데 세종 때 △이천 △장영실 △이순지 3명이 들어갔다. 세종대왕의 재위 기간인 1418∼1450년은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서 황금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볼 때 국책사업으로 과학기술을 이끌어 천문학은 물론 활자 인쇄, 도량형, 화약, 농업, 의약, 음악 분야 등 과학기술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세종이 임금이 된 1418년은 아직 새 왕조가 개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산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모시고 한라산을 한번 올라가 보려 했으나, 그건 아무래도 무모한 일이다 싶어, <비자림 숲>으로 모시고 갔다. 그러나 이번 제주도 여행은 첫날부터 가을비가 마치 스토커처럼 따라다녔다. <비자림 숲>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얼른 비옷을 샀다. 아버지에게 비옷을 씌워 드리고, 행여나 추우실까 싶어 큰 우산을 아버지 머리에 씌우며 천천히 걸었다. 나는 제주에 올 때면 자주 비자림 숲길을 찾곤 하지만 그렇게 비를 맞으며 걷기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꽤나 많은 사람이 숲길 어귀부터 붐비고 있었다. 아버지는 칠순이 넘으시면서 통풍을 앓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너무 다니지 않으셔서 그런지 다리근육이 너무 약해져 있으셨다. 숲 길가에 바위라도 보일라치면 자꾸만 앉아 쉬기를 반복하셨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후~ 하며 긴 한숨을 쉬셨고, 그런 당신의 노쇠함을 보며 옆에 있던 나는 그 숲길이 어느 때보다도 더 길고 힘들게만 느껴졌다. 아버지는 내 나이 다섯 살쯤 됐을 때부터 나를 데리고 등산을 자주 다니셨다. 아버지 친구들 몇 분과 함께하는 등산모임이 있었는데, 대구, 경북권 산은 물론이거니와, 전국에 유
[우리문화신문=유용우 한의사] 현대인들은 어느덧 100세 시대를 말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주변을 둘러봐도 70~80살에 건장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은 걸 보면 현재 청소년들은 당연히 ‘100살을 넘어 장수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80살은 기본이 되는 것 같으며 인생을 80으로 보면 그 중간인 40살까지는 기력(氣力)이 절정에 달하고 이를 유지하다가 60살은 넘어서 꺾일 것 같은데, 인간의 생리적 퇴화는 아직도 너무 이른 시점에 오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은 대략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에 폐경이 시작되면서 갱년기가 오는 명확한 지점이 있다. 수명이 환갑을 겨우 넘던 4~50년 전과 현재를 견줘 볼 때, 갱년기의 시작점에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 보통 생리적인 퇴화의 시작을 공통으로 경험하는 시점이 노안(老眼)이다. 이를 시작점으로 해서 오관(五官)의 기능이 감퇴하는 인식을 하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중년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노안(老眼)은 평균적으로 보면 40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50대 무렵이면 대부분 시작된다. 곧 인생의 반고개에서 생리적 퇴화가 진행되는데 이때부터 피로, 수면시간의 감소,
[우리문화신문=유용우 한의사] 중년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라떼”를 들먹이게 된다. ‘나 때는 20대에’, ‘나 때는 30대에’라는 식으로 말을 하다가 어느 순간 “한 해”가 다르다는 표현을 하는 시점이 오게 된다. 이런 느낌을 받게 될 때 본격적으로 중년의 슬픔이 시작된다. 그 시작을 어떤 이는 ‘노안’에서 인식하고, 어떤 이는 귀찮음으로 시작되는 피로에서 인식하고, 어떤 이는 소화력이 떨어진 것에서 인식한다. 중년의 고달픔을 알리는 신호는 각 개개인의 건강상태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지만, 진료 중에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모습과 귀찮음에서 출발하여 몸무게가 늘어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결국은 ‘피로함’을 통해 어느 순간 건강에 대한 빨간신호등을 느끼는 것인데 우리가 느끼는 피로는 삶 속에서 다양하게 우리를 힘들게 한다. 나이를 먹어가는 중에 피로를 느끼면 어느 순간 귀찮음을 느끼고 나도 모르게 “다음에”, “내일”로 미루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기본적인 흐름은 세포의 활동성이 나의 의지를 따르지 못하고 어느 순간 의지마저 게을러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점부터 몸무게가 늘면서 좋게 말해서 중년의 인품이 드러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