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저는 올해 65살입니다만 솔직히 일본의 조선침략 역사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지인의 권유에 끌려 이번 강연에 참석했습니다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침략에 굴하지 않고 온몸으로 저항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쓴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 사이타마현, 코바야시 레이코- “어느 정도 침략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일본의 역사교과서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라나는 학생들이지요. 그나마 고려박물관에서 조선침략에 관한 상설전시와 강연을 자주 열어 역사 공부겸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연을 통해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을 상세히 알게되어 기쁩니다. 주변에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 가나카와현, 이토 노리코(61살)- 입추의 여지없이 강연장을 가득메운 청중들은 하나같이 “침략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된 뜻 깊은 강연”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기자는 지난 1월 14일(토)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침략에 저항한 불굴의 조선여성들”에 대한 특강을 했다. 이번이 2차 강연인 항일여성독립운동가 특강은 지난 1차 특강 때인 20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최재형 선생님, 선생님께서 낯선 땅 우수리스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시다 일제의 무자비한 총탄에 세상을 떠나신지 어느덧 97년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아내신 일생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 선생님은 뜨거운 민족애로 한인들의 난로역할을 하셨습니다. 한인 자녀들에게 배움의 기틀을 마련하시어 학교를 세우시고, 후학들의 장래를 위해 일찍이 장학사업도 하셨지요. 낯선 러시아 땅에서 차별받는 한인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신 선생님을, 한인들은 최페치카라고 부르며 존경했습니다. 최재형 선생님, 선생님은 동양의 카네기라 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이루셨습니다. 선생님은 러일전쟁 후,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위기를 직시하시고 많은 재산을 털어 독립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대한의군의 숙식과 무기를 제공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조국독립의 뜻을 둔 애국지사들의 손을 맞잡고 대한의군이 국내진공작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셨습니다. 일본의 방해공작 탓에 위기도 여러 번 넘기셨지요. 하지만 선생님의 인격은 러시아인들도 감동시켜 일본의 모함임이 즉시 밝혀졌습니다. 일제는 드디어 대한의군의 무기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민선 6기 송기섭 진천군수의 역점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보재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이 순항 중이다. 진천군은 오는 4월 이상설 선생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보재 이상설 선생이 우리나라 항일독립운동 역사 속에서 일궜던 위대한 업적과 다양한 학문적 성과들에 대해 재조명할 수 있는 여러가지 기념사업을 추진한다. 진천군에 따르면 19일 새해 첫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 실무협의회'를 열었고 기념관 토목ㆍ건축설계 진행사항, 전시실 유품ㆍ유물 확보계획, 100주년 기념행사 추진상황 등을 집중 점검했다. 실무협의회에는 진천군 관계자 말고도 기념사업회, 국가 및 충북도 사업 관련 공무원, 설계사무소 관계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오는 4월 21일부터 22일까지 이틀간 순국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추진 중이다. 22일 본행사에 5천 명 이상의 내ㆍ외빈을 초청, 선생이 걸어왔던 위대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고귀한 유훈이었던 애국ㆍ애족 정신을 계승발전 시키기 위한 기념식이 개최된다. 21일부터는 ▲이상설 전국학술대회 ▲전국 한시지상 백일장대회 ▲전국 시낭송대회 ▲학생 미술대회 ▲이상설평전 출판기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권병덕(1868. 4. 25 ~ 1943. 7. 13)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충청북도 청주 사람이며, 천도교인이다.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손병희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 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융희 2)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하여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 무렵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한 그는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와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 [1883~1921] 선생은 의사(醫師)로 몽고(蒙古)수도 고륜(庫倫)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중, 1918년 9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키 위해 몽고로 오자 그에게 독립운동자금 2천원을 제공하여 활동을 도왔다. 에태준 선생은 1910년 비밀결사 신민회의 청년학우회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를 2회로 졸업하게 된다. 이후1914년 몽골에 건너가 동의의국을 설립하고몽골 황제의 어의로 눈부신활약을 한다. 1918년 김규식 지사에게파리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자금을 적극 제공하고 1921년에는 의열단에게 폭탄 제조 기술자를 소개하기도 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2017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뽑혔다. <자료: 국가보훈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역사의 수레바퀴로 110년 전으로 되돌려봅니다. 안중근 장군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1907년입니다. 한반도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합니다. 이미 일본이 우리나라와 강제조약을 체결하고 우리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한 뒤 2년이 지났습니다. 고종황제는 2년 전인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 부당하다는 것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고자 몸부림을 쳤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국제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보내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일제는 헤이그로 밀사를 보냈다는 것을 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로 폐위 시킵니다. 그리고 곧바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킵니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해산 되던 날 울분을 참지 못한 대한제국 장교군인이 자결을 하고 이 장면을 목격한 병사들이 긴급하게 무장하고 일본군대와 맞서면서 서울에서는 삽시간에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안중근 장군께서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고 서울에서 우리 군인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진 그 현장을 똑똑하게 목격하고 연해주로 망명을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대한제국 육군부위로 복무하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중국 유하현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자건설 및 독립군양성에 힘썼으며, 1911년 군정부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이후 북로군정서, 대한통의부, 신민부 등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핵심 간부로서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항일투쟁에 일신을 돌보지 않았던 선생은 1932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토비에게 피살 순국하시니 향년 51세였다. 이장녕 선생은1881년 5월 20일 충남 천안군 목단면 서리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결단력이 유달리 강했던 선생은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 3기생으로 졸업하여 1903년 육군부위로 승진하였다.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황실 친위대에 입대하라는 특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가재(家財)를 정리하여 가족과 함께 1907년 11월 20일 중국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하여 을사조약 이후 최초의 국외망명자가 되었다. 그 뒤 뒤따라 온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이회영(李會榮) 형제 등과 독립운동기지건설에 힘스고 신흥강습소를 창설하여 선생은 교관으로서 애국청년들의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선생은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춘천의병장 습재 이소응(李昭應, 1852~1930) 선생을 2017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52년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자는 경기(敬器), 호는 습재(習齋) 또는 사정거사(思靖居士)이며, 후에 의신(宜愼), 직신(直愼)으로 개명하였다. 본관은 전주로,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별자(別子)인 경창군(慶昌君) 주의 후손이다. 선생은 1872년 22세 때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 일생을 화서학파 선배인 의암 유인석과 항일투쟁에 매진하였다. 조선이 1876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자 면암 최익현 등 화서학파 유생들과 반대 상소를 올려 일제의 침략성을 규탄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유인석의 권유로 의병 대열에 동참하여 1896년 춘천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춘천의병진에는 전직 관료와 재야 유생을 비롯하여 군인, 보부상,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선생은 의병진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는 한편,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이란 격문을 지어 의병을 일으킨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몸이 불편해도 촛불집회에는 꼬박 참석했지요." 12월 10일 토요일, 제 7차 광화문 촛불집회가 열리던 날, 낮 1시 서울역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최사묵 선생은 84살의 노구에도 기자와 대담을 마치고 촛불현장으로 가기 좋게 약속장소를 서울역으로 잡았다. 100년만의 무더위를 기록했던 지난 여름, 욕실에서 나오다 삐끗하여 척추를 다친 이래 여러 달째 척추보호대를 차고 있으면서도 촛불집회에 꼬박 참가해왔다는 선생의 눈빛을 보며 구한말 충남 당진의 당당했던 최구현 의병장(1866 ~ 1906.12.23) 후손임을 대번에 알아차리게 했다. “의병장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제 나이 70이 다되도록 그 행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구한말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부참서관(軍部參書官)을 하던 할아버지께서 을사늑약 이후 벼슬을 사임하고 낙향한 것 까지는 알지만 이후 종적을 알 수 없었습니다.” 무과에 급제한 교지(敎旨)까지 있지만 집안 어른 그 누구도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어린 손자 최사묵은 더욱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할아버지 최구현에 대한 평생의 숙제를 풀어준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이종일(李鍾一, 1858. 11. 6~1925. 8. 31)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15세가 되던 해인 1874년에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부모슬하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문과에 급제하였다. 1882년 8월에는 박영효 수신사의 사절단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유신 이후 쇄국에서 깨어나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일본의 개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후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실학과 개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선생은 1896년 [독립신문]에 개화의식에 대한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896년 11월 선생은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민족의식의 진작과 민족사상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1898년 3월 동료들의 추대를 받아 개화사상의 대중기반인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 회장에 취임하였다. 1898년 선생은 중추원 의관에 피임되었으나, 당시 나라의 정세는 세계 열강들의 침략과 국내적 혼란 등으로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를 통한이 여긴 선생은 우선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10개월 만에 의관직을 그만두었다. 선생은 신교육의 하나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