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최석순(?~1925)1919은 만주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조직되었을 때 집서지단장(輯西支團長)으로 활동하였다. 최석순이 활동했던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의병장들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 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한독립단에서는 창립총회에서 창립선언문과 함께 전문 22조의 규칙을 통과시키고 다음과 같은 임원을 선정하였다.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白三圭),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참모 송상규(宋尙奎)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부총무부장
[한국문화신문 = 양인선 기자] 열아홉 나이로 순국한 김용창 선열을 추모하며 이윤옥 나라가 제대로 돌아갔으면 아홉 형제 맏이로 줄줄이 동생들 챙기며 부모님께 효도했을 청년 김용창 식민지 땅에서 태어나 우편국 사환으로 뛰었지만 어찌 푸른 꿈까지 버렸을까? 조선은 독립의 때가 곧 온다고 힘을 모으자 동포에게 외치던 몸 왜놈에 잡혀 모진 고문으로 옥중 순국하던 날 산천초목도 울고 하늘도 울었어라 금쪽같은 아들 앞세운 아버지 피 토하며 뒤따르고 홀몸으로 아홉 형제 거둔 어머니 휘어 틀린 허리 사이로 무심한 세월만 흘러 모두가 떠난 상두리 고향 마을엔 오뉴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저 혼자 맴도네. ▲ 열아홉의 나이로 순국의 길을 걸은 김용창 지사의 앳된 모습 열아홉 청년 김용창(金容昶, 1926.8.3~1945.4.3)은 경기도 향남면 출신으로 푸른 꿈을 안고 열다섯의 나이로 상경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열다섯 소년의 할 일이란 사환 뿐이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환을 거쳐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 직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야간에는 덕수공립상업학교(德壽公立商業學校)에서 미래를 꿈꾸며 학업에 정진했다. ▲ 향남면 상두리 선영에 있는 김용창 지사 흉상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애라[18941921] 선생은 1894년 1월 서울에서 완사후인 시중 이춘식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애일라(李愛日羅), 이심숙으로도 불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이화학당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독립운동가인 이규갑(李奎甲) 선생을 만나 20세에 결혼을 했다. 이규갑 선생은 충남 아산 출신으로서 한성사범학교와 신학교를 졸업, 종교와 육영사업에 헌신하고 독립운동가로서 일생을 보낸 인물이다. 이애라 선생은 결혼 후에도 남편 이규갑 선생과 함께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편생활을 계속했다. 그 후 1917년 이규갑 선생이 평양기독병원의 전도사로 일하게 되면서 선생도 평양의 정의여학교로 전근하게 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 동지들의 연락이 있자, 이규갑 선생은 직장을 그만두고 상경했고, 선생도 그 뒤를 따라 1남 2녀 중 젖먹이인 막내딸만 안고 서울에 올라와 운동을 뒷바라지 했다. 또한 3 .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평양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석방이 되자 곧 바로 동지들과 합류하여 독립지사 후원 모금운동을 하는 등 활동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애라 선생은 어린 딸아이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류인식(柳寅植, 1865. 5. 3. - 1928. 4. 29) 선생은 경북 안동 예안 출신으로 퇴계 선생의 정통을 이은 정재학파로 철저한 위정척사사상을 지닌 가문에서 자랐다. 그러나 1895년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오백 년 종사가 망하려는데 삼천리 강역에 한 명의 의사도 없단 말인가?라며 비분강개하여, 청량산에서 의병항쟁을 펼쳤다. 1903년 신채호 선생과의 만남 이후 교육구국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1907년 김동삼, 이상룡 선생 등과 근대적 중등교육과정인 협동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이 학교 졸업생 대부분은 만주로 망명하거나 3.1운동과 신간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개벽에서 한 사람의 힘으로 지방을 일으켰다라고 평할 정도로 선생의 협동학교 운영은 신교육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1911년 유하현 삼원포로 이주하여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등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협동학교의 운영 경험을 인정받아 경학사 교무부장으로 재직하였다. 1912년 독립운동 자금 모집 등을 위해 일시 귀국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된 후 국내에 머물며 다방면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1
[한국문화신문 = 전수희 기자] 김병로 선생(1887-1964)은 1887년 12월 15일(음력) 전라북도 순창 복흥면 하리에서 사간원 정언을 지낸 아버지 김상희와 어머니 장흥 고씨 사이에서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 호는 가인(街人)이다. 고향 인근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 할아버지 김학수가 세상을 뜨자 슬픔에 잠긴 선생은 이듬해에는 아버지까지 여의는 슬픔을 맛보았다. 외아들인 선생은 10살이 채 못되어 가장이 된 것이다. 할머니 박씨는 선생을 위해 집안에 독서당을 만들어 한문공부를 하도록 하였고, 이후 선생은 다방면에 걸친 독서에 전념하였는데, 심지어 의서(醫書)와 산서(山書)까지 섭렵할 정도였다. 1899년, 선생은 4살 연상인 연일 정씨 정교원의 딸과 결혼하였다. 선생과 아버지 모두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결혼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듬해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니 이제 선생은 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을 책임져야 하였다. 한학 공부를 하며 사서삼경 중에서도 [중용]과 [대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선생은 1902년 당대의 거유(巨儒)인 간재 전우의 문하가 되었다가 1904년 무렵 신학문을 동경하게 되었다. 우연한 기
[한국문화신문 = 전수희 기자] 왕산 허위(許蔿, 1854. 4. 1~1908. 9. 27)선생은 1854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진사인 허조이며 모친은 진성 이씨로, 선생의 위로 세 분의 형님이 있었으니 요절한 둘째 형을 제외하고 맏형 허훈은 한말의 거유로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대학자이자 의병운동가였으며, 셋째 형 허겸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였기에 선생의 가문은 독립운동계에서는 당당한 명문대가라 할 수 있다. 또한 선생의 가문 일족이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 러시아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고통과 시련의 세월을 지내야 했기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였던 우리의 민족적 고통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이름 높은 학자 집안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니, 특히 작은아버지와 20세 위인 맏형 허훈으로부터 학문을 수학하였다. 1894년에 들어와 동학농민전쟁이 전국을 휩쓸게 되자, 선생의 일가는 진보로 일시 피난하였는데, 경상도 가운데서도 선산과 상주는 동학세력이 특히 강성하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학자 집안이었던 선생의 일가는 화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채응언(1879 ~ 1915)의병장은 평남 성천(成川)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육군보병부교(陸軍步兵副校)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해산령이 내리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의병에 투신했다. 그 뒤 이진룡 의병장 휘하 부장으로 평남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일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에는 황해도 안평(安平)의 순사주재소와 수안(遂安)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 헌병을 사살하였고 또한 함남의 마전도 순사주재소를 급습하여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1911년 김진묵(金溱默)의병장의 부장으로 각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계속하여 다대한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이후로는 부하 3400여 명을 휘하에 두고 의병장이 되어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 각도를 신왕귀래(神往鬼來)하면서 항일전을 전개한 바 있다. 1913년 6월 3일 밤에는 황해도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고 일본수비대를 불질러 일본군 수명을 부상케 하였다. 한편 오승태(吳承泰)와 합세하여 선암(仙岩)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915년에는 평남 성천군 옥정리(玉井里) 산기슭에 근거지를 두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동삼(金東三, 1878. 6. 23 ~ 1937. 4. 13) 선생은 1878년 6월 23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 278번지에서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긍식(肯植)이고, 종식(宗植)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자는 한경(漢卿)이며, 호는 일송(一松)이다. 김동삼이라는 이름은 선생이 만주로 망명한 뒤에 사용한 것이다. 안동에 많은 명문거족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의성 김씨 문중은 퇴계의 정맥을 계승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이후로 명성을 드날렸다. 천전(川前), 곧 내앞마을은 김성일의 부친 청계(淸溪) 김진(金璡)이 들어와 정착한 이래 5백 년을 이어오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다. 특히 일제 침략기에 독립운동사에 걸출한 인재를 쏟아낸 마을이다. 한 마을에서 20명이 넘는 인물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고, 1910년대 만주 망명자가 150명을 넘을 정도이다. 선생은 안동의병의 최고지도자였던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다. ▲ 김동삼 선생 김흥락은 김성일의 종손이자 퇴계학맥의 중심축을 계승한 인물인데, 1895년 12월 을미의병 당시 안동의병을 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이동휘 선생[1873~1935] 은 아전 이승교의 아들로 1891년경 18세 때 군수의 시중을 드는 통인(通人)으로 있다가 상경하여 1895년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에 입학수학한 뒤 육군 참령(參領)까지 진급하였으며, 1902년부터는 강화도(江華島) 진위대장(鎭衛隊長)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 계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군직(軍職)을 사임한 뒤, 강화도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결성에도 관여하는 등 민족주의 교육과 구국계몽운동에 적극 노력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의 해산으로 대한제국이 준식민지화하자, 군동지였던 연기우(延基羽)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투쟁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광무황제의 해아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에 관련된 혐의로 일경에 피체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주선으로 그 해 10월 석방되었다. 석방 후 1908년 1월경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창립하는데 참여하는 한편,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갑(李甲)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한성수 선생은 1920년 8월 18일 평북 신의주 고진면(古津面) 낙청동(樂淸洞) 102번지에서 한일현(韓一賢)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한정규(韓正奎)는 신의주 일대의 부호로 어릴 적 선생의 집안 형편은 꽤 부유하였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4년 3월 평북 정주(定州)의 명문 민족사립학교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하였다. 당시 오산학교는 수많은 애국청년들과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한 민족학교였다. 이곳에서 받은 민족교육은 훗날 선생이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운동진영에 투신하고 일제에 온 몸으로 저항하다 순국하게 되는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다. 1939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선생은 1941년 일본 전수대학(專修大學) 경제학과에 유학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초 선생은 학도병(學徒兵)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1943년 조선인학도특별지원병령(朝鮮人學徒特別志願兵令)을 발표하여 한국의 청년학생들을 전선으로 내몰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 후방에서 민족지성의 저항력을 말살하기 위한 일석이조의 조치였다. 외형상으로 지원(志願) 형식을 취하였지만 실제로는 강제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학교를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