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내가 일찍이 감히 의병장으로 삼일정신으로 움직이는 유일무이한 우리 민족주의를 고수하고 우리민족 사이에는 다시싸움 없이 평화스러운 조국을 세우고 세계열강과 더불어 공존 공영함을 바라고 비나이다. -이동하 유서 가운데서- *이동하(1875.4.18~1959.3.18 )선생은 누구인가? 경북 안동(安東) 사람으로 일찍이 서울 계산학교(桂山學校) 교원, 대구 협성학교(協成學校) 교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보문의숙(寶文義塾)을 창립하여 수백명의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당하자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11년에는 박은식(朴殷植)윤세용(尹世茸)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외 40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한 뒤에는 윤세복과 함께 환인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그린경제=이나미 기자] 경북은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며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사람이 한국에서 가장 많은 곳이다. 또 한일강제병합 직후 자정순국자가 가장 많은 곳으로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핵심이 경북지역이다. 그럼에도 여성독립운동가로 포상 받은 230여 명 가운데 경북지역 여성은 11명에 불과하다. 물론 여기에는 김락, 남자현 애국지사처럼 알려진 분들도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 대부분이다. 왜 그렇게 여성독립운동가가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 경북여성, 독립운동을 말하다 심포지엄 모습 이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는 경북여성, 독립운동을 말하다 2013 경북 여성인물 재조명심포지엄이 10월 8일 오전 10시 30분 안동대학교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먼저 개회식은 최태환 안동시 부시장이 권영세 안동시장의 환영사를 대신 읽었고, 김윤순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의 개회사, 이순옥 경상북도 여성정책관의 격려사, 경상북도의회 한혜련 부의장의 축사가 있었다. 또 개회식 마지막 순서로 여성독립운동가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를 펴낸 이윤옥 시인이 무명지 잘라 혈서 쓴 항일의 화신 남자현을 낭송하여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 무명지 잘라 혈서 쓴 항일의 화신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항공학교에 다니던 그는 매우 영특했는데 훈련비행 9시간 만에 단독비행이 허가될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1925년 2월 28일 드디어 권기옥은 운남항공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하여 여성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비행사가 되었다. 그 뒤 유시천 교장의 부탁으로 후배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하며 견습비행을 한다. 그러나 막상 권기옥을 비롯한 비행사들이 활동할 무대가 없었다. 1925년 5월 상해로 돌아온 권기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서 조선총독부를 폭파할 테니 비행기를 사달라고 말했지만 임시정부의 재정 사정이 좋지 않음을 알고 그해 1925년 가을 광동의 국민혁명정부에서 가담했다. 그 뒤 1926년 봄 의열단의 배후 실력자인 손두환의 소개로 북경에 있는 개혁성향 군벌 풍옥상군(馮玉祥軍)의 항공대에 들어갔다. 1926년 4월 권기옥은 동로군 항공대의 부비항원으로 임명된다. 그 무렵 남원항공학교 교장 겸 동로군 항공대 대장인 서왈보의 소개로 독립운동가인 이상정(시인 이상화의 형)을 만나게 되고 훗날 그와 결혼하여 함께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1927년 장개석총통이 북벌(北伐)할 때, 동로 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에 최용덕(崔用德)과 함께 가담
[그린경제=최미현 기자] 친일미화와 독재찬양이 그 바탕에 너무 진하게 깔려있었다. 그것을 위한 사실의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해서 버려지는 많은 사실. 예컨대 이승만은 거의 위인전처럼 묘사되어 있고, 안창호는 본문에 한 군데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자료와 기타 내용에만 언급) 단재 신채호는 이승만과 트러블을 많이 일으켰으니까 이 사람의 주장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냐며 혐오감을 조장하더라. 한국역사연구학회 회장 하일식 연세대 교수는 이렇게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해 일갈했다. 그리고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가 지난 9월 12일 출범하고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폐기를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 폐기된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 출범 기자회견 그래서 (사)민족문제연구소는 뉴라이트 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가을 시민강좌를 시작한다. 강좌는 10월 14일부터 10월 30일까지 매주 월∙수요일 늦은 7시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지하철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에서 진행되며, 수강료 5만원(회원 4만원)으로 선착순 50명 마감한다. 강좌 내용은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내가 일찍이 감히 의병장에 임명되어 나라의 원수를 통설(痛雪)하지 못했으니 부끄럽다 내가 죽더라도 명(銘을)쓸 경우 진실로 창의한 일에 대해 떠벌려서 확대시키지 말라 -아들 상규에세 남긴 유언- ▲ 권세연 의병장 어록 ▲ 어록전시장 모습 *권세연(1836~1899) 의병장은 누구인가? 본관은안동(安東). 호는 성대(星臺).경상북도 봉화 출신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안동 병진의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안동지역 의병들은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유지호(柳止浩)김흥락(金興洛) 등 참모진은 그를 안동의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이에 그는 격문을 발표하여, 각지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민심을 크게 격려, 고무시켰다. 이 격문에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자에 대한 증오심이 설득력 있게 표현되어 있어, 의병규합에 큰 몫을 하였다.또한,
▲ 대종교 총본사 개천절 경축행사 ▲ 개천절 선의식 장면 ▲ 경건한 마음으로 애국가를 부르는 주요인사들 [그린경제=李白 기자] 2013년 단기 4470년 10월 3일 상달 상날을 맞이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천절경축행사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시조 단군을 기리며 개천의 의미를 되새기고 경축하는 뜻깊은 날이었다. 또한 홍은동 대종교 총본사에서도 11시부터 경축행사를 시작하였다. 행사를 주관하신 종무원장님의 주유문을 대신 기사로 올린다. 주 유 문 개천 4470년 양력 상달 상날 하늘이 열린 날을 맞아 대종교 총전교 원영진은 8천만 배달겨레 동포와 검무리들을 대표하여 교우 형제자매들과 함께 삼가 한배검 전에 아뢰옵나니 소소영영 굽어 살피옵소서. 오늘은 거룩하시고 자애로우신 삼신 하느님의 홍은으로, 동방에 하늘이 열리어 배달나라가 세워진 성스러운 날이옵니다. 한배검께옵서는, 팽우에게 명하여 우관이 되어 토지를 맡으라 하시고, 신지는 사관이 되어 글을 맡으라 하시고, 고시는 농관이 되어 농사를 맡으라 하시고, 지제는 풍백이 되어 명령을 맡으라 하시고, 옥저는 우사가 되어 병을 맡으라 하시고, 숙신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제주신사가 들어서 있던 곳을 말하려면 먼저 제주측후소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1923년 일제는 옛 제주읍성의 쾌승정을 헐어버리고 그 터에 제주측후소(현 제주기상청)를 지었다. 제주읍성은 석성(石城)으로 1105년(고려 숙종 10년)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처음으로 축성되었는데 1599년 성유문 등 여러 제주 목사들이 증개축을 하여 구한말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1910년 총독부의 읍성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점차 훼손되었다. ▲ 제주측후소 바로 옆 제주읍성 자리에 제주신사를 지었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에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공사를 벌였는데 당시 바다 매립을 위한 용도로 역사적인 제주읍성을 헐어냈다. 제주읍성이란 요즘으로 치자면 제주시청과 같은 구실을 하는 곳으로 제주시의 핵심 행정관청인 것이다. 이러한 행정관청을 조선총독부는 마구잡이로 헐어 버리고 난데없는 기상관측 시설을 지어 버린 것이다. ▲ 제주지방기상청 앞에서 바라본 제주신사 터(제주중앙감리교회 자리) 뿐만 아니라 일제는 현재 제주기지방상청과 제주중앙감리교회 사이에 내선일체의 동화정책을 펴기 위해 1928년 제주신사(濟州神社)를 지었다. 2009년 1월 5일치 한라일보에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우습고도 분통하다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단 말인가 우습고도 분통하다 부모를 떠나고 나라를 떠났단 말인가 금옥 같은 우리민족이 저들의 노예 된단 말인가 용봉(龍鳳)같은 당당한 사대부가 저들에게 압제를 받는단 말인가 -김대락 분통가 중에서- ▲ 김대락 독립투사 어록 ▲ 어록 전시장 *김대락 선생은 누구인가? '분통가'를 지은 백하 김대락은 1845년 안동부 임하면 천전리에서 도사(都事)를 지낸 우파 김진린(愚坡 金鎭鱗)1)과 함양 박씨 사이에서 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요, 자는 중언(中彦)이며 호는 비서(賁西)라 하였는데 후일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아래 산다는 듯으로 백하(白下)라 하였고 더러는 둔옹(遯翁)이라고도 하였다. 그 당시 도사댁은 사람 천석, 글 천석, 밥 천석으로 삼천석댁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경과가 좋은 집안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그는 두 아우 김효락 (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일본 교토에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전북 남원 일대에서 무고한 백성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을 현재 일본인들은 귀무덤이라 부른다. 에도시대의 학자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이라는 말이 잔인해서 귀무덤이라 부르자 했다는데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덤 이름부터 왜곡되어 있는 잔인한 역사의 현장! 더 부끄러운 것은 한국인들도 일본인이 부르는 이름 그대로 여전히 ‘귀무덤’으로 부르고 있는 점이다. 그러한 현실은 경남 사천에 가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곳에는 교토 코무덤의 흙 한 줌을 덜어다 이총(耳塚)이라는 비석 하나 달랑 만들어 놓았다. 선량한 사람들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건만 역사는 왜곡상태에서 한 발자국도 진전되지 않고 있다. 9월 26일은 남원 만인의총에서 호국정신의 위업을 기리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향을 올리는 날이다. 이 날을 맞아 교토 코무덤의 진실을 파헤친다. -편집자주- 귀면 어떻고 코면 어떠냐는 식의 태도를 우리가 여기서 불식시켜야 하는 까닭은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코를 묻었는데 귀를 묻었다고 왜곡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잔학성의 상징인 코베기를 완화된 표현으로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내 이상은강압을 절대 배격하고전 민족이전 인류가최대의 민주 밑에서다 같이 밥 먹고다 같이 생각하고다 같이 일하는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환국 직후 기자회견 중에서(조선일보 1945.12.5)- ▲ 류림 독립투사 *류림91894-1961) 선생은 누구인가? 본관은 전주. 초명은 화종(花宗), 호는 단주(旦州)와 월파(月坡)이다. 1894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계곡리에서 류이흠(柳頤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류림은 안동의 내앞마을에 설립된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다녔다. 졸업 후 1915년 정진탁과 함께 대구에서 부흥회(復興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17년에는 김용하(金容河)와 함께 자강회(自彊會自强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류림은 안동 지역의 임동면편항시장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류림은 가족들과 함께 봉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