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03년 5월 26일(금)부터 6월 30일(금)까지 아름지기 통의동 사옥에서 국립국악원과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유성기음반을 주제로 한 전시 <유성기집, 우리 소리를 보다>를 에서 열었습니다. 유성기(Gramophone)는 소리가 녹음된 원반(SP, Standard Play)을 재생하는 장치로, 19세기 전후 조선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유성기가 있는 집에 삼삼오오 모여 소리를 듣던 곳을 ‘유성기 처소’ 또는 ‘감상소’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소리를 녹음한 평원반이 처음 발매된 것은 1907년 3월이었는데 경기명창 한인오와 관기(官妓) 최홍매가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서 취입하고, 원반을 배편으로 미국에 싣고 가서 음반으로 찍은 뒤 다시 대한제국으로 들여와 판매하였다고 하지요. 이때 취입한 것은 경기잡가 유산가, 양산도, 가사 황계사 등 모두 30종이었습니다. 미국 콜럼비아나 빅타 레코드에서 발매한 대한제국 시절의 음반은 한쪽 면만 녹음되어 있어서 ‘쪽판’이라고 하며, 녹음기사가 직접 외국의 현지까지 가서 녹음하였기 때문에 이런 것을 ‘출장녹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가장 인기 있었던 음반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다섯 번째 청명(淸明)이고, 내일은 설날ㆍ단오ㆍ한가위와 함께 4대 명절인 한식입니다. 청명과 한식은 하루 차이거나 같은 날이어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날 성묘(省墓)를 합니다. 옛날에는 한 해에 네 번, 그러니까 봄에는 청명, 여름에는 중원(中元, 7월 15일), 가을에는 한가위, 겨울에는 동지에 성묘했습니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청명(淸明) 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칩니다. 임금은 이 불을 정승, 판서, 문무백관 3백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주는데 이를 ‘사화(賜火)’라 했습니다. 수령들은 한식(寒食)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寒食)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온 백성이 한 불을 씀으로써 같은 운명체로서 국가 의식을 다졌습니다. 꺼지기 쉬운 불이어서 습기나 바람에 강한 불씨통(장화통-藏火筒)에 담아 팔도로 불을 보냈는데 그 불씨통은 뱀이나 닭껍질로 만든 주머니로 보온력이 강한 은행이나 목화씨앗 태운 재에 묻어 운반했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삼장수가 만일 호조의 황첩(黃帖, 일정한 세를 물고 발급받은 여행증면서)도 없이 사사로이 매매하면 해당 부사(府使)는 금고(禁錮, 관리가 되는 자격을 박탈하는 벌)의 율로 시행하라."하였다. 호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일본(日本)의 예단(禮單)에 쓰일 삼을 채울 수 없다고 올렸는데, 대체로 인삼장수가 삼을 가지고 왜관(倭館)에 가서 매매하면 이익도 많고 황첩이 없으면 세금도 내지 않기 때문에 몰래 잠입한 자가 많았으므로, 동래 부사가 이들을 금칙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영조실록 76권 영조 28년(1752년) 4월 2일 기록입니다. 또 “중국 배가 와서 시끄럽게 하고, 홍삼을 몰래 사가는 것을 단속하되, 아울러 이러한 내용을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평안도ㆍ함경도 두 도의 관찰사에게 경계하라고 명하였다.”라는 《고종실록》 1권, 1년(1864) 2월 3일 기록도 있습니다. 또 1828년 북경에 다녀온 박사호의 기행문인 《심전고(心田稿)》에는 "연경에 가지고 가는 것이 금지된 물건은 금, 인삼, 담비가죽인데 홍삼은 그중에서도 가장 엄격했다. 연경 사람들이 그 값의 10배를 주고 사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살아생전 나라위해 독립운동 실천하신 삼각산아 대각사 창건주 용성대선사 85주기 추모다례제 음성공양을 올립니다” 지난 3월 23일 낮 11시 서울 종로3가 대한불교조계종 대각사 ‘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 열반 제85주기 추모음악회’에서 노은주 명창이 용성스님에게 맞게 개사한 회심곡이 울렸습니다. 원래 ‘회심곡(悔心曲)’이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었다는 불교음악의 하나로 불교의 대중적인 포교를 위해 알아듣기 쉬운 한글 사설을 민요 선율에 얹어 부르는 것으로, 본격적인 불교음악인 범패에 비하여 음악형식과 사설이 쉽게 짜여 있지요. 그 내용을 보면 “모든 사람은 석가여래의 공덕으로 부모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이생에서 부처를 믿고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극락세계로 가고 악업을 지으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경기 명창들이 부르는 <회심곡>은 이날 노은주 명창이 부른 사설과는 달리, “우리부모 날비실제 백일정성이며 산천기도라 명산대찰을 다니시며 온갖 정성을 다 들이시니.”와 같은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노래합니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부모님 생각이 나서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는 사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 문화일보에는 “강풍타고 번지는 ‘괴물산불’ … 안동 거쳐 청송까지 덮친다.”란 제목의 기사가 올랐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불이 나면 속수무책입니다만 예전에는 건물이 거의 나무로 된 주택이어서 더 그랬습니다. 그래서 화재를 막기 위한 벽사(辟邪)시설을 곳곳에 설치해 두었습니다. 특히 경복궁 근정전 월대 모서리와 창덕궁 대조전, 창경궁 명전전, 덕수궁 중화전, 경희궁 숭정전 등 각 궁궐의 정전(正殿) 앞에 가면 조금씩 모양은 다르지만 대체로 청동 빛깔을 띤 넓적한 독이 놓여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무엇일까요? 이름하여 ‘‘드므입니다. 이를 어떤 이들은 향로나 쓰레기통으로 잘못 알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화재를 막기 위한 벽사(辟邪)시설이지요. 옛날엔 ‘불’을 관장하고 불을 일으키는 재앙 화마(火魔)가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화마는 아주 험상궂게 생겼지만, 정작 자기 얼굴을 본 적이 없었지요. 이 화마가 어느 날 한 집에 불을 내려고 내려왔다가 드므의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너무나 험상궂게 생긴 것에 기겁하여 도망쳤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그래서 나무로 된 중요한 건축물들에는 이 드므를 설치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22년 10월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정조대왕(1752~1800) 탄신 270돌을 기려 ‘독서대왕 정조의 글과 글씨’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세종대왕, 영조 임금과 더불어 조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정조대왕은 수원화성을 쌓고 신도시 수원을 건설해 우리에게 물려준 위대한 군주였는데 이 전시회로 우리는 정조대왕의 삶과 철학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전시회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정조의 대표 유물인 《홍재전서(弘齋全書)》 100책이었지요. 독서로 글짓기의 기초를 다진 정조는 나라 경영에 대한 자기 생각과 마음을 담은 글을 많이 남겼습니다. 가족과 신하를 위해 지은 글도 많은데 이를 모두 모아 만든 문집이 《홍재전서》입니다. 유난히 책을 사랑하며 학문정치를 추구했던 정조의 삶과 철학이 이 책에 담겨있습니다. 모두 184권 100책으로 이루어진 《홍재전서》는 조선 역대 임금이 쓴 책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이며, 펴낼 때 쓴 금속활자는 정조 때에 만든 정리자(整理字)입니다. 내용은 시문뿐만 아니라 신하들과의 응답, 해당관서의 기록에 대한 최종 판결, 재위 기간에 펴낸 서적의 해제 등 다양한 내용의 글이 다수 포함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원까지 1개월이자 원금의 백분의 7 10원까지 1개월이자 원금의 백분의 5 50원까지 1개월이자 원금의 백분의 4 100원까지 1개월이자 원금의 백분의 2.5(아래 줄임) 1원 이내의 것이면 한 달 이자가 원금의 백분의 7이라고 하엿스니까 7전(錢)임니다그려. 한달에 7전이니까 기한까지 넉달이면 28전이요 연리로 계산한다 하면 1년에 84전. 즉 연리 8할4푼의 이자임니다. 연리 8할4품의 이자! 아! 얼마나 무서운 폭리냐!“ 이는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33호(1930년10월01일)에 나온 “지상공개(誌上公開) 폭리대취체(暴利大取締-단속, 제2회), 젼당포ㆍ셋집ㆍ양복점(洋服店)”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지금이야 거의 사라진 풍속이지만 예전엔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맡긴 물건 따위를 마음대로 처분하여도 좋다는 조건에 돈을 빌려주는 일종의 사금융업 ‘전당포(典當舖)’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급하게 돈이 쓸 데가 생기면 집안에 있던 온갖 물건을 전당포에 가서 전당을 잡히면서 한 푼이라고 더 받으려고 전당포 주인에게 사정을 하는 풍속이 있었지요. 《별건곤》은 연리 84%나 되는 이자에 폭리라며 고발합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준천(濬川)의 대책은 역시 모색하기 어려운 일이더니, 이제는 그 실마리를 알 수 있겠다. 이미 조그마한 책자를 하나 만들도록 명하여 《준천사실(濬川事實)》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책이 완성된 뒤에는 서문을 지어 내리겠다. (가운데 줄임)’ 살펴보건대, 준천의 역사에 역민(役民)이 여러 십만 명이나 동원되고 경비(經費)도 십만여 전(錢)이나 소모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안위(安危)가 걸린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인가? 위는 《영조실록》 95권, 영조 36년(1760)년 3월 16일 기록으로 청계천 준천에 관한 내용입니다. 조선후기가 되면서 한양은 상업도시로 발전하고 전국 각지에서 이주민이 몰리면서 거주지 부족 현상이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개천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였고, 이에 따라 개천 주변에는 생활쓰레기의 증가, 주변 산에서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한 토사물의 유입 등으로 인해 개천 바닥의 높이가 점점 높아졌지요. 이 탓에 개천은 비만 오면 넘쳐흘러 한양의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줬습니다. 이에 영조는 개천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고, 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항(崔恒), 우승지(右承旨) 한계희(韓繼禧) 등 문신(文臣) 30여 인에게 명하여, 언자(諺字) 곧 한글을 써서 잠서(蠶書)를 뒤치게 하였다.” 이는 《세조실록》 23권, 세조 7년(1461년) 3월 14일 기록으로 세조 임금이 한문으로 된 잠서(蠶書)를 한글로 뒤치게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잠서(蠶書)>는 중국 청나라 때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당견(唐甄, 1630∼1704)이 정치ㆍ경제 따위에 관하여 적은 책입니다. 이 책에서 당견은 ‘진(秦)나라 때 이래 역대 제왕은 모두 도둑’이라고 했을 정도로 봉건 제도를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경제에 대해서는 은의 사용을 금지할 것과 빈부 격차를 비판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당견은 명나라 이래 은을 사용했으나 은이 날로 줄어들어 가난이 여기서 비롯된다고 보았지요. 조선왕조 제7대 임금 세조는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단종을 몰아낸 뒤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인물로 비판을 받습니다. 또 대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모반의 죄명을 씌워 강화로 축출한 뒤 죽이기까지 했지요. 하지만, 그런 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장악원(掌樂院)에 있는 《악학궤범(樂學軌範)》 세 권은 성종(成宗) 때 성현(成俔)이 지은 것입니다. 조정의 음악은 다 이 제도를 쓰는데, 이것은 여염집에 있는 책이 아니므로 임진란 뒤에 장악원이 고쳐서 펴냈고 판본(板本)이 본원에 있으니, 교서관(校書館)을 시켜 여러 건(件)을 박아 내게 하여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는 《효종실록》 14권, 효종 6년(1655년) 3월 8일 기록으로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추가로 찍어내도록 했다는 내용입니다. 《악학궤범》은 먼저 성종 때인 1493년 예조판서 성현, 장악원제조 유자광, 장악원주부 신말평 등이 왕명으로 펴낸 악서(樂書)지요. 그 내용은 12율의 결정(決定)과 여러 제향에 쓰이는 악조(樂調)에서부터 악기의 차림, 정재춤(궁중춤)의 나아감과 물러남, 악기ㆍ의물(儀物, 의식에 쓰이는 여러 가지 도구)ㆍ관복(冠服)에 이르기까지, 제향(나라에서 지내는 제사)ㆍ조정의 조회ㆍ궁중 잔치에서 쓰일 음악 연주에 필요한 사항들을 빠짐없이 망라하였습니다. 성종 당시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기술한 이 《악학궤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