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5경(3시와 5시 사이)에 개기월식을 하였다. 대궐 뜰에서 월식을 구제하는 의식을 했다. 승지 1명과 사관(史官) 2명이 관상감의 관원 5명을 거느리고 오방(동서남북과 중앙)에 장막을 쳐놓고 오색 깃발 각 1개와 창ㆍ긴창ㆍ검(劍)ㆍ극(戟,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긴 창)ㆍ창(槍, 긴 나무 자루 끝에 날이 선 뾰족한 쇠촉을 박아서 던지고 찌르는 창) 각 5개와 징 5개를 설치하고 악공으로 하여금 징을 치게 하다가 달빛이 다시 둥그렇게 된 뒤에 끝냈다.“ 이는 《선조실록》 184권, 선조 38년(1605년) 2월 16일 기록입니다. 일식(日蝕) 곧 해가림과 월식(月蝕) 곧 달가림은 요즘뿐이 아니고 고려, 조선시대에도 있었는데 이 해가림과 달가림이 있으면 구식례를 했습니다. 구식례는 당시 사람들이 이를 괴이한 변고라고 생각하여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월대(月臺, 섬돌)에서 해나 달을 향해 기도하며 혹시나 자신이 잘못한 일은 없는지 되돌아보는 의식을 한 것이지요. 천문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는 물동이에 물을 담아놓고 거기에 비치는 해를 관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해가림을 음기(陰氣)가 성하여 일어나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여러 도(道)의 감사와 주ㆍ군ㆍ부ㆍ현과 서울 안의 2품 이상의 관원에게 나눠주고, 임금이 말하기를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왕정(王政)의 근본이므로, 내가 언제든지 농사에 정성을 쏟는 것이다.' 하였다." 이는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1430년) 2월 14일 기록입니다. 세종 때 정초(鄭招)ㆍ변효문(卞孝文)이 펴낸 《농사직설(農事直說)》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찾아서 쓴 것으로 그동안 중국에만 의존했던 농사에서 벗어난 획기적인 농업서입니다. 나라의 뿌리인 농사가 생산력이 현저히 낮아지자, 백성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는데 이를 안타까이 여긴 세종임금은 고민 끝에 이런 현상이 조선 풍토에 맞는 농사법이 없어서임을 깨닫고 마침내 각 지방에 농사 경험이 풍부한 농민들에게 그들의 농법을 물어 정리한 것이 《농사직설》입니다. 책 내용을 보면 씨앗의 고르기와 갈무리법, 논밭갈이법이 있는가 하면 삼ㆍ벼ㆍ기장ㆍ조ㆍ수수ㆍ피ㆍ콩ㆍ팥ㆍ녹두ㆍ보리ㆍ밀ㆍ참깨ㆍ메밀 등의 재배법이 나옵니다. 이 가운데 볍씨 뿌리는 법을 보면 당시 4가지 농법 곧 논에 볍씨를 뿌려 그대로 키우는 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 2월 12일은 정월대보름입니다. 예로부터 정월대보름에는 한해의 액운과 부스럼을 막고 가족의 행복과 풍년을 비손하기 위해 오곡밥을 지어 먹고 부럼깨기를 했습니다. 오곡밥은 흔히 찹쌀, 차조, 찰수수, 찰기장, 붉은팥, 검은콩 등으로 짓지요. 다양한 색깔이 어우러진 오곡밥은 보기에도 아름답고 색깔별로 건강기능성도 다양합니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하얀색 찹쌀은 성질이 따뜻해 소화가 잘되며, 노란색 조와 기장은 베타카로틴이 풍부하고 식이섬유와 무기질, 비타민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붉은색 팥과 검정색 콩 껍질에는 눈을 건강하게 하고 콜레스테롤을 억제하는 안토시아닌 성분이 풍부합니다. 갈색 수수는 폴리페놀 성분이 높아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며 혈당을 조절해 고혈압, 당뇨, 비만 등 식습관, 운동습관, 흡연, 음주 등 생활습관의 영향을 받는 질환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하지요. 정월대보름 세시풍속 가운데는 ‘용알뜨기’가 있는데 용알뜨기란 부인들이 닭이 우는 것을 기다렸다가 남들보다 먼저 우물에 가서 물을 긷는데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이 물을 떠오는 것은 집안에 복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대보름날엔 세 집 이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종실록》 200권, 성종 18년(1487년) 2월 10일 기록에는 “새로 편찬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인쇄하도록 명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성종은 1462년 명(明)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참고하고, 세종 때의 《신찬팔도지리지》를 바탕으로 하여 노사신ㆍ양성지ㆍ강희맹 등에게 펴내게 한 지리서입니다. 이들은 성종 12년(1481년)에 우선 50권을 완성하였고 성종 17년(1486년)에 보태고 다듬어 고쳐서 35권을 다시 완성해 펴냈지요. 그 뒤 중종(中宗) 25년(1530년)에 이행(李荇) 등이 증보판을 펴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고 했습니다. 권1에 경도(京都, 조선의 정부가 있는 곳) 상, 권2 경도 하, 권3 한성부, 권4ㆍ5 개성부, 권6∼13 경기도, 권14∼20 충청도, 권21∼32 경상도, 권33∼40 전라도, 권41∼43 황해도, 권44∼47 강원도, 권48∼50 함경도, 권51∼55 평안도 등이 수록되었지요. 각 권에 여러 개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지만, 경기도의 광주목과 여주목, 경상도의 경주부, 평안도의 평양부 등 큰 읍은 1개 행정구역만 수록되었습니다. 경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106년 전 적국의 심장부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우리 이천만 겨레를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와 승리를 얻은 세계 여러 나라 앞에 우리가 독립할 것임을 선언하노라.”라는 2.8독립선언을 외쳤던 날입니다.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 청년들은 조국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1919년 1월 도쿄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한 뒤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고는 2월 6일 <독립선언서>를 만천하에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2월 8일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과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했지요. 그러나 이들은 가차 없이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나라 밖으로 파견된 사람을 뺀 27명 실행위원 모두가 검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체포되지 않은 참가자들이 조선에 잠입하였고 이후 3.1독립선언 준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3.1만세운동의 불씨를 당겼지요. 이 2.8독립선언은 3·1독립선언서보다 훨씬 강경하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방의 풍속이 예로부터 세시를 중히 여겨 / 흰머리 할아범, 할멈들이 신이 났네 / 둥글고 모난 윷판에 동그란 이십팔 개의 점 / 정(正)과 기(奇)의 전략전술에 / 변화가 무궁무진하이 / 졸(拙)이 이기고 교(巧)가 지는 게 더더욱 놀라우니 / 강(强)이 삼키고 약(弱)이 토함도 미리 알기 어렵도다. / 늙은이가 머리를 써서 부려 볼 꾀를 다 부리고 / 가끔 다시 흘려 보다 턱이 빠지게 웃노매라.” 위는 고려말~조선초의 학자 목은 이색이 쓴 《목은고(牧隱藁)》에 나오는 시로 이웃 사람들의 윷놀이를 구경하면서 쓴 것입니다. 이 윷놀이를 할 때 던져서 나온 윷가락의 이름, 도ㆍ개ㆍ걸ㆍ윷ㆍ모는 원래가 가축의 이름을 딴 것으로 봅니다. 곧 도는 돼지를, 개는 개를, 걸은 양을, 윷은 소를, 모는 말을 가리킵니다. 특히 도는 원말이 ‘돝’이 변한 것으로 어간(語幹) 일부의 탈락형인데 돝은 돼지의 옛말로 아직도 종돈(種豚)을 ‘씨돝’이라 부르고, 돼지고기를 ‘돝고기’라고도 부릅니다. 또 윷은 소를 뜻하는데 소를 사투리로는 “슈ㆍ슛ㆍ슝ㆍ중ㆍ쇼”라고도 하는데 여기의 “슛”이 윳으로 변하였다가 윷으로 된 걸로 보입니다. 마지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복식(服飾)에서 금(金)과 옥(玉)을 없앤 것은 바로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아름다운 일이다. (가운데 줄임) 훌륭하신 검소한 덕(德)은 따라서 본받을 만하다. 연여(輦輿)에 금으로 그리는 것은 삽시간에 지워져 버리니, 다만 겉치레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비용이 또한 심하다. 태복시(太僕寺, 궁중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는 관아)에 분부하여 이 뒤로부터는 금으로 그리지 말도록 하라." 위는 《영조실록》 73권, 영조 27년(1751년) 2월 3일 기록으로 영조 임금이 연여에 금으로 그리는 것을 못 하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원래 연여는 연과 여(輿)로 나뉘는데 연(輦)은 임금이 거동할 때 타는 것으로 밑에 수레를 달아 말이 끌게 되어 있고, 여(輿)는 지붕이 없는 것으로 사람이 어깨에 메고 다는데 소여(小輿) 또는 평교자(平轎子)라고도 부릅니다. 조선시대의 연은 옥개(屋蓋, 위에 씌우는 덮개)에 붉은 칠을 하고 주홍과 황금으로 장식하였습니다. 또 둥근 기둥 네 개로 작은 집을 지어 위에 올려놓고, 사방에 붉은 난간을 달아 겉에는 운룡(雲龍, 구름과 용 무늬)을 그렸고, 안에는 운봉(雲鳳, 구름과 봉황)을 그렸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릇 글을 풀어내는 것을 어떤 이들은 소소한 일이어서 꼭 관심을 둘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지만 성현들의 하신 말씀이 ‘글 뜻을 알지 못하고서 정밀하고 자세한 내용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였다. 지금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 한문의 한 구절 끝에 다는 토)과 뒤침(번역)은 경이 정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경의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함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사서와 오경(五經)의 구결과 뒤침을 경이 모두 자상하게 정해 놓았으니, 하나의 국(局)을 설치할 만하다.“ 위는 《선조실록》 8권, 선조 7년(1574년) 10월 10일에 있는 기록입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의 임금으로서 너무 많은 오명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더듬어보면 다시 평가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선조가 한문의 권위가 절대적이던 시절, 지식은 모든 사람이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 위처럼 경서를 우리말로 뒤치는 일을 추진한 것입니다. 특히 선조가 경서를 우리말로 뒤치는 일을 한 것은 무엇보다도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의 격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요. 이한우가 펴낸 《조선사 진검승부》에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술을 즐기므로 원례(院隷, 조선시대, 승정원에 딸려 있던 하인)도 취하여 액속(掖屬, 궁중의 궂은일을 맡아하던 사람)에게 모욕을 주기까지 하는데, 나라의 기강과 관계가 되므로 엄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더욱 행실이 나빠 뉘우침이 없는 사람은 볼기를 치고고 유배(流配)하였다. (가운데 줄임) 이후 형조(刑曹)로 하여금 술을 많이 빚은 자에게 볼기를 치고, 또 주등(酒燈, 술집임을 알리려고 문간에 다는 등) 키는 것을 금하였으나, 끝내 금할 수가 없었다.“ 위는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1770년) 1월 26일 자 기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금주령을 내리고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왕명을 내리곤 하였지만 희생당하는 건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이었습니다.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는 백성은 술을 빚어 팔았다고 잡혀가고, 몰래 술 마셨다고 잡혀가지만 금주령이 내려진 대낮에도 양반들은 거리낌 없이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특히 이름을 날렸던 조선의 많은 유명 화가가 술에 취해야만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외눈의 자화상을 그린 호생관 최북은 눈밭에서 술에 취해 얼어 죽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