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저의 유년 시절은 농사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찬 이슬 내리는 새벽부터 밤이 이슥할 때까지 참으로 고생이 많았던 시절이었지요. 그 힘든 농사일을 마을 사람들은 힘을 보태서 하는 슬기로움을 가졌습니다. 농사뿐만 아니라 김장하기, 초가지붕 새로 얹기, 겨울 땔나무 하기 등등 큰일이 있을 때마다 품앗이했지요. 함께하는 것은 시너지 효과가 있게 마련이어서 어려운 일도 척척 해 나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1은 결코 2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니까요. 초원의 무법자인 표범은 사슴을 잡아먹고 살아갑니다. 초원에 표범이 없으면 사슴들이 행복하게 살 것 같아서 사람들은 표범을 잡아 없앱니다. 초원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사슴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몇 년 세월이 흐른 뒤에 찾아오지요. 사슴 떼가 너무 불어나 풀을 먹어 치워 사막화로 인한 먹이 부족으로 사슴의 대멸종이 다가온 것이지요. 어쩌면 표범은 사슴을 잡아먹는 폭력자가 아니라 초원의 관리자로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므로 표범과 사슴은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공생의 관계로 살아왔던 것이지요. 공생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 되어야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나라 밖 여행에서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도시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입니다. 도시가 참으로 아름다웠거든요. 특히 네카강 북쪽 언덕에 나 있는 철학자의 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카를테오도어 다리를 건너서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이 길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헤겔, 야스퍼스,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와 독일의 대문호 괴테, 쉴러, 노발리스 등이 이 길을 걸으며 사색에 잠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 위대한 인물의 발자취도 멋스럽지만 철학자의 길 끝, 네카강 북쪽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하이델베르크의 풍경은 환상적입니다. 초록 숲과 나지막한 건물들, 웅장한 하이델베르크 고성, 멋진 다리와 그 끝을 장식한 쌍둥이 탑문. 네카강의 잔잔한 물결…. 이 길을 걷다 보면, 철학자가 아닌 사람도 철학자 못지않게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습니다. 약간의 오르막이어서 사색하면서 걷기에는 참 좋은 곳이지요. 요즘 사회를 철학의 실종 시대라 규정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도 철학이라는 과목을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진학이나 취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일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들이 철학을 접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만이불일(滿而不溢)’ "가득 차면서도 넘치지 않는다."라는 말씀입니다. 승진하여 윗자리에 오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넘치지 않는 지혜가 있다면 위태롭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래도록 존귀함을 지켜주지요. 공자는 인(仁)을 강조했습니다. 이 글자를 파자하면 人이 두 개가 나옵니다. 곧 두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지요. 이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높은 지붕 위에 올라간 새끼 염소는 늑대가 올라올 수 없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늑대를 놀려댑니다. 늑대는 새끼 염소를 올려다보며 말하지요.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네가 지금 우쭐거릴 수 있는 건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네가 서 있는 그 자리 때문이란다." 윗자리에서도 겸손하게 아래를 올려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중국 전국시대 오기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아내를 죽인 무자비함 때문에 역사적으로 폄훼된 인물입니다. 지금도 오기 부리지 말라는 말씀이 있고 보면 오기라는 인물이 그다지 좋은 평을 받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그의 장수로서의 행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맹자의 진심장에 ‘농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익이나 권력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농단(壟斷)이라고 합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곡식을 가지고 와서 모피와 바꾸거나 또는 생선을 소금과 바꾸는 물물교환의 시장이 있었습니다. 이때 어떤 남자가 돈을 벌려고 진기한 물품을 가지고 와서 약간 높은 언덕의 깎아지른 곳[농단(壟斷)]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그곳은 사방이 다 잘 보이는 자리여서 어떤 물건이 비싸게 거래되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지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농단을 차지하여 물건을 팔아 큰 이득을 얻었습니다. 농단은 언덕 농(壟)자에 끝단(斷)을 써서 언덕의 끝이라는 평범한 용어여서 그 말 자체에는 좋고 싫음의 감정이 들어있지 않지만 농단을 차지한 상인의 교활함을 이유로 불편한 말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와 소, 말 등은 원래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던 것들이지만 인간에게 길들기 시작하면 자연으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새장에서 일생을 보낸 새가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지요. 집에 포메라니안 종의 강아지를 기르고 있습니다. 이놈은 같은 견종의 강아지보다 주인인 사람을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했던 쿠바의 한 노인 산티아고가 거대한 청새치와 사흘 밤낮을 싸우고 마침내 고기를 잡아서 뭍으로 가져오지만, 떼로 몰려온 상어에게 고기를 빼앗기고 뼈만 가지고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고기를 잡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청새치와 사흘 밤낮을 싸우면서도 고통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뼈만 남은 청새치 앞에서 그는 절대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기를 잡았다는 것에 만족하며, 다시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노인과 바다>는 단순한 어부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용기, 그리고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희망을 주고 누구나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린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인공 산티아고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다를 존중하며 자신이 자연 일부분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노인이 청새치를 잡는 초인적 행동은 어부의 존엄을 갖춘 데서 나옵니다. 소설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난 될 수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집 대부분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담은 밖으로부터 안을 보호하고 침입을 막으며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하고 공간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담을 언제부터 쌓았는지는 모르지만 대체로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간에 주거의 차이가 생기면서, 신분에 따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담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담 높이가 6두품은 8척을, 5두품은 7척을, 4두품 이하는 6척을 넘지 못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는 담의 높이가 권력의 높이와 비례한다는 것이지요.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울타리에 싹이 돋아 나무로 성장하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담은 건축주의 신분에 따라 재료와 축조 방법이 다릅니다. 서민층에서는 울타리, 돌담과 같은 자연적인 모습의 담을 중상류나 궁궐은 벽돌담, 화초담과 같은 인공이 많이 드는 담을 쌓았지요. 서민의 담은 집의 경계로서의 성격이 강하지만 상류층이나 궁궐의 담은 외부에 대한 방어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미국 뉴욕시 맨해튼 남부에 금융가인 월가가 있습니다. 미국식으로 월 스트리트라고 부르지요. 오늘날 전 세계를 좌우하는 금융의 중심지입니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승자의 저주는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려 결과적으로 큰 손해가 난 것을 뜻합니다. 고대 로마 시대 에피루수 왕국의 피로스 왕은 로마를 침공하여 대승을 거두지만 군사의 70%를 잃고 상처뿐인 영광을 안고 돌아옵니다. 싸움엔 이겼지만 지나친 출혈로 인해 왕국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초한지에 보면 항우가 유방과 싸워 연전연승을 거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가 기울어져 해하의 전투에서 사면초가와 패왕별희라는 유명한 고사를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승자의 저주는 지도자가 성공을 거둔 뒤, 그 성공에 취해 더 나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승자의 저주에 빠지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이게 됩니다. 승리에 도취하여 자만심이 생기고 자기 능력을 과신합니다.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집이 세집니다. 주변의 의견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승자의 저주는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승자의 저주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항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한반도에도 공룡이 살았습니다. 1억 년 전에 100여 종의 공룡이 살았다고 하지요. 약 6,600만 년 전 지구 대멸종 시기에 모두 사라졌는데 그 사체가 오랜 세월 열과 압력을 받으면서 만들어진 것이 원유라는 설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산유국이 아닙니다. 한반도에 공룡은 살았으나 그들이 원유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한반도 거주 공룡에 대해 심한 유감이 드는 까닭입니다. 기술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지금도 원유의 생성 이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40년 전에도 30년 뒤에 원유가 고갈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지금도 4~50년 정도 뒤에 원유의 고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대륙이나 바다에서 계속 유전이 발견되기 때문이고 경제성이 없는 유전도 기술 발달로 채굴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원유의 생성 원인에는 유기성인설과 무기성인설이 있습니다. 설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단정할 수 없는 추측성 이론에 불과한 것이지요. 유기성인설은 유기물의 주검이 오랜 세월에 걸쳐 열과 압력의 영향을 받으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원유의 생성에는 일반적으로 수백만 년이 걸리는데 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는 건안12년(207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하여 그의 초막을 무려 세 번이나 찾아가지요. 그때 제갈량은 유비보다 21살이나 어렸으니 아들뻘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관우와 20년, 장비와는 15년의 격차를 보입니다. 어려도 한참 어린 나이지요. 그런 제갈량의 집에 유비는 묵묵히 세 차례나 찾아갑니다. 능력이 출중하지 않은 유비가 삼국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된 것도 제갈량이라는 지혜로운 자에게 전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제갈량의 의견과 판단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는 유비의 삼고초려의 영향이 큽니다. 유비ㆍ관우ㆍ장비는 도원결의로 의형제가 된 사이입니다. 두 아우 관우와 장비는 자신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제갈량의 지시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겠지만 형이 삼고초려로 해서 어렵게 얻은 인재니 그 말을 따라주는 데 주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만약 유비의 삼고초려가 없었다면 관우ㆍ장비와의 불화로 인하여 제갈량은 자기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겸손하게 인재를 알아보고 등용하고 믿어준 자의 편입니다. 지도력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서울 성곽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많은 사람이 찾는 서울의 명소입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성북동에 만해 한용운의 유택인 심우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단아한 한옥 건물인데 특이하게도 남향이 아닌 북향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그 까닭은 한용운 선생님이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인다고 해서 숭인면의 산비탈 북향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고 하지요. 그는 평생 일제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변절자인 육당 최남선이 찾아왔을 때도 그는 호되게 혼을 내며 말하지요.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렀소" 한용운 선생님은 결국 북향집인 심우당에서 삶을 마감했는데요. 그때가 광복을 맞이하기 1년 전이니 안타깝기도 합니다. 대웅전 벽면에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는 절이 있습니다. 주로 선종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견주어 그린 것인데요. 소를 찾아 나서다 소의 발자국을 보고 소를 발견하여 소를 데려다 기르다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없고 자기만 남아 있게 됩니다. 결국에는 소와 함께 자기 자신마저도 잊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