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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너희는 훨씬 좋은 세상에서 훨훨 날아라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66]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화관무란 꽃으로 만든 화려한 관을 쓰고, 추는 춤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쪽으로 내려온 민천식 명인이 기존의 화관무에 탈춤과 교방무의 양식을 더해 완성도 높은 춤으로 재탄생시킨 춤, 당시 그는 나라의 태평성대와 민족의 영원을 염원하며 이 춤을 연희하였다고 한다. 이 춤은 정갈하고 기품이 있으며, 호방한 한삼의 뿌림이나 유연한 몸놀림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궁중무의 ‘규칙’과 민속춤의 ‘자유로움’도 갖추고 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또한 그 반주음악이 서도의 ‘삼현육각(三絃六角)’이란 점에서도 흥미롭다.

 

앞에서도 말 한 바와 같이, 1930년대의 민천식은 민형식이라는 이름으로도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서도의 명창이었다. 그런가 하면 춤에 대한 열정도 대단해서 황해도 해주ㆍ개성 등지의 권번에서는 민천식이란 이름으로 기녀들의 춤사범으로도 활약했던 인물이다. 당시 한국 무용계를 대표하던 최승희도 그에게 와서 춤을 배웠다는 점으로 그의 명성은 어느 정도 짐작이 될 것이다. 민천식의 제자 김정순이 전해주는 말이다.

 

“최승희가 와서 며칠을 자면서 춤을 배우고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라며 인사를 하고 갔는데, 그다음 오는데 보니까, 지게꾼을 대동해서,… 커다란 거울을 가져와 민천식 선생님께 선물했지. 그때부터 권번에 거울이 걸린 거야.”

 

민천식을 거쳐 간 제자들이 어디 하나둘이겠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배뱅이굿의 이은관 명창도 그에게 소리를 다듬었고, 재담의 김진환(예명 김뻑국)을 비롯하여 김실자, 김나연 등등은 민천식과 최승희의 사제관계를 증명하듯 이야기해 준 바 있다.

 

 

최승희의 기록 가운데는 당시 이시이바쿠의 제자였던 그녀가 선생의 권유로 우리 민족의 전통춤을 학습하기 위해 전국의 권번을 돌면서 다양한 전통춤을 섭렵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아마 이때쯤일 것이다. 최승희가 민천식이 거주하던 해주와 개성권번을 오가며 그에게 춤을 배웠는데, 민천식 명인은 그녀를 가리켜 ‘천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민속춤 몇 종을 가르쳐 주면, 단번에 그 춤들을 재현해 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최승희의 공연 종목 가운데는 우리의 전통춤이 다수 더해졌다는 점으로도 그녀가 민천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실례로 최승희가 중국에서 주로 활동했던 때, 그녀의 공연 공연 종목 가운데에서 <화관무>와 <봉산탈춤>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차지언 황해도 <화관무> 예능보유자의 말이다.

 

“선생님들께서 최승희가 와서 기거하면서 민천식 선생의 춤 가운데서 ‘어떤 종목을 배웠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다 배우고 갔다.’라고 전해 들었기 때문에 꼭 집어 어떤 춤을 배웠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변화된 최승희의 공연 종목을 보면 그 연계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예가 당시 민천식은 마당에서 추던 봉산탈춤을 방안으로 끌어들여 권번 기녀의 공연 종목으로 만들어 낸 인물이었으며 그가 지도한 <화관무> 또한 기녀들의 주요 공연작이었기 때문이다.”

 

민천식의 제자들이 안타까움에 감정이 복받쳐 이야기하는 ‘그날’은 바로 민천식이 타계한 날이다.

 

선생은 우리에게 봉산탈춤을 제대로 계승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인물이었다. 밤잠을 설치고 대사를 쓰고 정리해서 채록본(採錄本)을 만들고, 먼지 나는 종이 가루를 뒤집어쓰고 종이죽을 만들어 붙이며 탈을 만들었다. 하루가 멀다고 인천에서 서울로 올라다니며 <봉산탈춤> 소리를 녹음했고, 학원으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전승 교육을 하는 등, 그야말로 온 열정을 쏟은 결과, 봉산탈춤은 195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내각수반상(지금의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후, 그는 봉산탈춤 정립과 계승에 더욱 열중했고, 그 업적을 인정받아 1967년 봉산탈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명인은 봉산탈춤 놀량의 창과 사자마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민천식 명인의 노력이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쩔 것인가!

그 기쁨도 잠시, 그는 보유자 인정서가 도착 되던 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선생님 장례(葬禮)를 치르고 있는 중, 우체부가 민천식 선생님의 예능보유자 인정서를 들고 오는 거야. 옛날에는 우편물이 오려면 한참 걸렸으니까. ”

그렇게 그는 안타깝게도 비운의 예인이 된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민천식은 제자들에게도 꽤 존경받는 스승이었다. 늘 따뜻한 마음으로 제자를 품고, 제자들이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었던 명인이었다.

 

김실자는 생전에 “우리 선생님이 탈춤으로 안 빠지고 전통춤 췄으면 더 빨리 이름을 날렸을 텐데...”라고 아쉬워했고, 재담꾼 김뻑국(진환)은 “서울 가서 성공하고 싶다고 했더니, 직접 김천흥 선생한테 나를 데리고 가셨지. 그리고는 잘 부탁한다고 몇 번을 얘기해 주셨어요.”라며 그의 예술적 천재성과 더불어 무한한 사랑을 베풀던 따뜻한 마음을 더욱 그리워하였다.

 

지금은 화관무 명예보유자가 된 사람, 당시 여중생이었던 김나연이 종종 들어왔던 민천식의 이야기 가운데서 지금도 잊지 못하고 되뇌는 말이 있다. 그의 말로 이야기를 맺도록 하겠다.

 

“우리 선생님은 우리에게 늘 애국심을 얘기해 주셨지요. 특히 화관무는 태평성대를 소원하는 춤이라고 강조해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나라가 편안해야 우리가 춤도 제대로 출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신 거예요. 대일 항쟁(抗爭)기에 겪은 나라 잃은 설움, 그리고 동족 사이 전쟁으로 얼룩진 민족의 아픔을 겪으며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살아 온 세상보다 훨씬 좋은 세상에서 훨훨 날 수 있기를 소원하셨던 것이어서 더더욱 선생님이 그립기만 합니다.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열심히 전통춤을 지켜나가겠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면서 이 땅에 살고 저희를 지켜봐 주십시오.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제자 김나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