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0. 1,300여 년 전 일본 관동지방은 고구려인의 독무대였다 “도쿄 100킬로미터 권역 교통지도”를 펼쳐놓고 왼쪽 끝 지점으로 눈을 돌리면 고마가와(高麗川)역과 고마(高麗)역 이름이 그리고 고마고개(高麗峠), 고마천(高麗川), 고마본향(高麗本鄕), 고마동(高麗の里) 동사무소, 고마신사(高麗神社), 고마가와신사(高麗川神社), 고마향(高麗鄕)민족자료관 등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이 말들에는 모두 “고마”란 말이 똑같이 들어가 있는데 일본인들은 삼국시대의 고구려를 “高麗”라 쓰고 “고마”라 부르며 고려국은 대신 “고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이 일대가 고구려인들의 집단 주거지였음을 짐작게 합니다. 《속일본기》에는 “고구려인 1,799명을 무사시국(오늘의 관동지방)에 이주시키고 이곳에 고구려군을 설치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속일본기》 703년 4월 조에 “종 5위 이하 고구려 약광에게 왕의 성을 내린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각 가문을 규정하여 야마토 조정이 수여하는 칭호로 왕이라는 것은 외국의 왕족 출신자에게 주는 성입니다. 약광은 고구려인의 빼어난 지도력으로 황량한 황무지를 개척하고 이주민의 정착에 헌신을 다했지요. 약광이 죽자
1759.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을 아시나요? “일본과 코리아(한국+조선) 서로의 역사,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며~, 히데요시의 두 번에 걸친 침략과 근대 식민지 지배의 과오를 반성하며~, 재일 코리안의 생활과 권리 확립에 노력하며, 재일 코리안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전하며~“ 일본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 코리아타운에는 이 있습니다. 일본에서의 고려는 고구려 또는 한국을 뜻하는데 이 박물관에 들어서면 위와 같은 의 목적이 쓰여 있는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언뜻 보기엔 한국인이나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듯 보이지만 이사장을 비롯해 회원 80%가 일본입니다. 20여 년을 준비해서 올해로 문을 연 지 9년째인데 모두 자원봉사로 운영을 합니다. 전시관 안에는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이 있는데 현재 기획전시관은 도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자기와 관련한 자료는 도쿄에서 먼 규슈지방까지 가서 확인하고 조사한 것들입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눈 부이사장 다사키(田崎敏孝)씨는 정년퇴직하고 난 뒤 보람있는 일을 찾은 것이라고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자신의 나라가 과거에 한국에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고 그 결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알리는 일에 온몸을 바치는 그들이 존경스러웠
1758. 죽어서도 천 년을 떠도는 소리꾼, 구음 시나위 “사람 하나 찾아 평생을 떠돌다가 / 죽어서도 천년을 떠도는 소리꾼 / 그 혼이 뜯어내는 구음 시나위에 / 별들도 눈물을 글썽인다.” 이 시는 김영호 시인의 일부입니다. 우리 음악엔 ”구음 시나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음”은 원래 거문고·가야금·피리·대금·해금 등 악기에서 울려나오는 특징적인 음을 악기 소리에 가깝도록 흉내 낸 소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구음 시나위가 발달한 전남 진도지역에서는 악기 소리를 그대로 흉내 내기보다는 ‘아-어-흐-우’ 등의 구음을 사용함으로써 악기와의 다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진도지역의 구음은 구음 시나위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정서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음악성이 매우 뛰어나 오히려 악기를 이끈다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특히 진도씻김굿과 살풀이춤의 반주 음악으로서 구음 시나위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요. 낮은 듯 깊으면서도 구슬프고 구슬프면서도 은근한 신명이 나며 무거운 듯하면서도 가볍고 가벼운듯하면서도 빠릅니다. 또 소리 내어 흐느끼는 듯하면서도 호소하는 듯하며 위로하는 듯하면서도 원망하는 듯한 가락이 거문고와 때론 교교한 달빛 속을 흐르는
1757. 조선시대 임금 비서실의 속기록이었던 승정원일기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으로 불리는 것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입니다. 승정원일기는 인조 1년(1623) 3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임금 비서실 격이었던 승정원에서 처리한 여러 가지 사건들과 취급하였던 행정 사무, 의례적인 것들을 날마다 기록한 것으로 하나의 속기록입니다. 이 책은 국가의 중대사에서부터 의례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국정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정원의 전모가 기록되어 있을 만큼 방대하여, ≪조선왕조실록≫을 펴내기 위한 첫 번째 사료로서 그 가치가 대단히 높게 평가되는 기록물이지요. 승정원일기는 무려 3,243권으로 현재 서울대학교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보 제303호이고,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올랐습니다. 승정원일기를 쓴 사람들은 승정원에 소속된 주서(注書)로 예문관 소속의 사관(史官)과 함께 임금과 신하들이 만날 때 반드시 배석하여, 그들의 대화내용을 기록했는데 일종의 속기사였던 것이지요. 주서는 과거합격자 중에서도 특별히 웅문속필(雄文速筆), 곧 사람이 하는 말을 재빨리 한문으로 번역해서 쓰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았고 승진에 특혜를 주기도 했습니다. 또
1756. “부부금슬”은 작은 거문고와 25현 큰 거문고에서 온 말 혼례 때 보면 주례가 꼭 “금슬” 얘기를 합니다. 그 금슬은 어디서 온 말일까요? 원래 금슬은 《시경(詩經)》소아(小雅) 〈상체편(常棣篇)〉에 있는 "妻子好合 如鼓琴瑟 兄弟歸翕 和樂且湛(처자가 마음이 맞는 것이 거문고를 켜는 것과 같고, 형제가 화합하여 화락하고 또 즐겁다)"에서 왔습니다. 여기서 처자는 가족이나 아내의 뜻이 됩니다. 또 《시경》〈관저편(關雎篇)〉에는 "窈窕淑女 琴瑟友之(요조숙녀는 금슬로써 벗한다.)"라고 하여 얌전한 처녀를 아내로 맞아 거문고를 켜며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금슬(琴瑟)은 국악기 중 현악기인 작은 거문고 곧 “휘금”이라고도 부르는 금(琴)과 25현의 큰거문고 슬(瑟)을 이릅니다. 이 둘은 늘 같이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슬인 거지요. 그런데 국어사전에 보면 “거문고와 비파를 이르는 말”로 풀이합니다. 원래는 거문고만 이르던 말이 언제부터 거문고와 비파가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부부가 금슬좋게 백년해로하라는 덕담을 들으면서 결혼하건만 얼마 안가서 금이 가는 부부들도 요즈음은 흔합니다. 혹시 두대의 거문고 켜던 것을 가리
1755. 허리가 쑤셔서 기와를 구워 허리에 대다 고려말 학자 목은 이색이 쓴 ≪목은고(牧隱藁)≫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습니다.“한밤중에 깬 뒤로는 다시 잠들기 어려워서 / 눈을 감고 몽롱하게 오똑 앉아 있노라니 / 허리가 예전처럼 쑤셔오니 어떡하나 / 어린 여종 급히 불러 기와를 굽게 하고 / 무명에 싸서 아픈 곳에 대니 팔다리가 가벼워지고 지내기가 편해졌네.” 허리가 쑤셔와서 기와를 구워 허리에 댔더니 말끔해졌다는 얘기입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의술이 발달하지도 않았기에 이런 민간요법도 요긴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겨레가 오랜 옛적부터 온돌을 발명해 썼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어른들에게서 “몸이 찌뿌드드해서 아랫목에 허리를 대고 지졌더니 개운하다.”라는 얘기를 듣곤 했습니다. 몸살 기운이 있거나 허리 또는 팔다리가 가볍게 쑤셔올 때는 이런 방법도 좋을 수 있겠지요. 이와 더불어 따뜻한 물을 마신다든지 하여 배를 따뜻하게 하면 여러모로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br>참고 : ≪문헌으로 보는 고려시대 민속≫, 국립문화재연구소
1754. 혼례 때 신부가 바르는 연지곤지 이야기 “연지”는 잇꽃의 잎으로 만든 붉은 물감입니다. 잇꽃은 두해살이풀로 홍람(紅藍)·홍화(紅花)·이꽃·잇나물이라고도 하지요. 연지는 뺨에 찍는 것을 말하고, 곤지는 이마에 둥글게 찍는 것을 말합니다. 고구려시대의 고분인 수산리 벽화 무덤 행렬도와 쌍기둥 무덤 행렬도에 나타난 귀족 여성들의 모습에 연지곤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익이 쓴 백과사전 ≪성호사설≫에는 연지풍속이 흉노에서 들어왔다고 합니다. 연지풍속이 고려 때 원나라로부터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로 이미 고구려 시대에 연지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기에 원나라 유입설은 잘못된 것이겠지요. 또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악공들은 이마에 붉은 칠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연지는 대단한 사치품이어서 상류층 부인들만 사용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9년 2월조)에 잇꽃이 희귀하므로 연지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사간원에서 올리고 있습니다. 사실 연지 찍기는 우리만이 아니라 흉노족 그리고 몽골족들과 함께 티베트계 유목민족인 탕구트족도 좋아했다고 하지요. 그럼, 연지와 곤지는 왜 찍었을까요? 그것은 붉은색이 잡귀를 물리친
1753. 줄광대, 삼현육각재비, 어릿광대, 구경꾼 모두의 줄타기 “공중에 맨 줄 위에서 줄광대가 재담·소리·발림을 섞어가며 갖가지 재주를 부리는 놀음” 곧 줄타기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줄타기는 고려시대부터 많은 관련 기록에 드러나는데 답삭희(踏索戱), 주삭(走索), 희승(戱繩)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런데 줄타기는 ‘광대 줄타기’와 ‘뜬광대 줄타기’로 나뉩니다. ‘광대 줄타기’는 관아에 예속되어 정착한 대령광대待令廣大)가 타는 것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고 현재 예능보유자는 김대균입니다. 또 ‘뜬광대 줄타기’는 ‘어름 줄타기’라고도 불리는데, 유랑광대(流浪廣大)가 타며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남사당놀이의 한 종목으로 이어집니다. ‘광대 줄타기’의 특징은 '도막줄'이 아니라, ‘판줄’이라는 데 있습니다. ‘도막줄’이란 줄광대 혼자서 간단한 재담과 잔노릇 몇 가지만 짧은 시간에 보여주는 줄타기를 말하며‘판줄’은 줄광대가 다양한 잔노릇은 물론이고, 줄타기 기예 가운데 가장 어렵다는 살판, 갖가지 소리·재담·춤·흉내내기 등이 어우러지는 중놀이와 왈자놀이 등을 보여주지요. 이때 줄광대 혼자가 아니라 어릿광대와 악사인 삼현재비들과 함
1752. 오늘은 대한, 세끼 중 꼭 한 끼는 죽을 먹는다 오늘은 24절기의 맨 마지막날 “대한(大寒)”입니다. 이름으로는 가장 추운 날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작은 추위라는 소한에 가장 추운 날의 지위를 빼앗겼습니다. 이날은 세끼 중 꼭 한 끼는 꼭 죽을 먹었지요. 그것은 나무나 한두 짐씩 하는 것 말고는 대부분 일하지 않고 쉬는 때이므로 삼시 세끼 밥 먹기가 죄스러워 그랬다고 합니다. 또 겨울에 양식이 있다 하여 아끼지 않으면 보릿고개 때 굶을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는 뜻도 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이사나 집수리 등 집안 손질은 언제나 ‘신구간(新舊間)’에 하는 것이 풍습입니다. 이때 신구간이란 대한(大寒) 후 5일에서 입춘(立春) 전 3일 사이(2010년은 1월 25일∼2월 1일)로 보통 1주일 정도를 말하지요. 이 기간에는 인간들의 일상에 관여하는 신들이 모두 옥황상제 한테 가있는 날이라 무엇을 해도 탈이 없다는 재미난 속설이 있습니다. 또 대한의 마지막날 곧 입춘 하루 전날은 “절분(節分)”이라 하여 한해의 마지막 날로 여기는데. 이때 이날을 해넘이라 하여, 콩을 방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새해를 맞는 풍습이 있었지요. 이 절분날을 일본에서도 지
1751. 악기가 된 평화로운 다듬잇방망이 칼이 살인마에게 쥐어지면 살인도구가 되지만 의사에게 쥐어지면 사람을 살리는 수술도구가 됩니다. 방망이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방망이를 폭력배가 가지면 흉기가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조선의 아낙에게 들려지면 그 두드림으로 옷감은 윤기가 나고 매끄러워지며, 다듬잇방망이는 악기가 되어 다듬이질 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이 됩니다. 옛 조상들은 주로 흰색 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빨래를 자주 해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을 나려면 옷감은 바람을 막고 보온이 잘돼야 하고 더운 여름을 나려면 시원하도록 옷감은 주로 모시나 삼베 같은 성글고 거친 천연섬유로 옷을 해입었지요.이러한 옷감에 풀을 먹여 다듬이돌 위에 옷감을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통풍이 잘되도록 하면 섬유가 넓게 퍼지고 빳빳한 풀기운으로 옷감이 들러붙지 않게 해주어 시원한 느낌을 주지요. 또 풀 묻은 표면은 매끈매끈해져 때가 덜 타고 빨래할 때 풀과 함께 때가 떨어져 나가 옷감도 덜 상하면서 깨끗이 빨 수 있지요. 다듬이질을 둘이서 할 때는 주로 모녀나 시어머니와 며느리 또는 동서끼리 하였습니다. 추석이나 설 등 명절 그리고 혼례가 가까워지거나, 겨울옷을 마련할 때가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