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3. 일제는 조선의 풍습도 왜곡하려 친일인사들을 동원했다 최근 어문학사에서 펴낸 ≪모던일본과 조선 1940≫은 일본잡지 모던일본사가 조선을 화두로 1940년 발행한 잡지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잡지에는 이효석, 유진오 등이 쓴 “조선인이 내지인에게 오해받기 쉬운 점”이란 꼭지가 보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에는 학교를 세운 송금선 씨의 “조선부인은 일체 무표정이며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조선부인의 부덕(婦德)입니다.”라든가 “손님이 올 때마다 차를 내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부터이며, 조선에서는 특별한 손님이 아니면 차를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갓집 부인이 남편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것은 타인의 눈에 띄는 곳에서는 일절 하지 않습니다. (첩은 제외)” 등도 보입니다. 이를 보면 일제가 당시 조선의 풍습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잡지에 싣는 등 친일인사들을 앞세워 조선의 일상생활까지도 왜곡했던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산마늘 만나러 백아산 산나물축제 가보자 ▶ 기사보기
1562. 고조선 웅녀가 먹었던 산마늘을 아시나요?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다. 이중 곰은 이것을 받아먹고 근신하기를 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당시 웅녀가 먹었다는 마늘과 지금 우리가 먹는 마늘이 다르다고 합니다. 명나라 이시진이 엮은 《본초강목》에 “산에서 나는 마늘을 산산(山蒜), 들에서 나는 것을 야산(野蒜), 재배한 것을 산(蒜)”이라 하였습니다. 후에 서역에서 톨이 굵은 대산(大蒜)이 들어오게 되어 전부터 있었던 산을 소산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요. 또 허준의 《동의보감》에서는 “대산을 마늘, 소산을 족지, 야산을 달랑괴”로 구분하였습니다. 곧 웅녀가 먹은 것은 보통 마늘이 아니라 “산마늘”인 것이지요. 산마늘 만나러 백아산 산나물축제 가보자 ▶ 기사보기
1560. 산으로 올라가고, 일본에 뺏기고 ≪조선왕조실록≫의 수난 ≪조선왕조실록≫은 원래 한성의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 4곳으로 나뉘어 보관했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춘추관, 충주, 성주 사고는 모두 없어져 버렸습니다. 다행히 전주사고본의 책들은 사고 참봉(參奉)인 오희길과 전주 유생인 손홍록, 안의 등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내장산의 깊은 동굴까지 옮겨지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보존될 수 있었지요. 그 뒤 춘추관을 뺀 다른 사고는 높고 가파른 산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강화도 마니산사고, 영변 묘향산사고, 봉화 태백산사고, 평창 오대산사고가 그것입니다. 그중 병자호란 등의 탓에 묘향산사고는 전라도 무주 적상산사고로, 마니산사고는 가까운 정족산사고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일제강점기 때 동경제대로 빼내간 오대산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없어졌고 겨우 74책 중 27책이 2006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돌아왔습니다.
1549. 옻나무의 진은 항암치료제로도 쓴다 옻나무 껍질에 상처를 냈을 때 나오는 진을 옻이라고 하며 우리 겨레는 예부터 옻을 공업용과 약용으로 써왔습니다. 특히 닭에 옻을 넣은 ‘옻닭’을 즐겨 먹었지요. 이는 양기를 돋우는 보양(補陽) 식품으로 몸이 찬 체질에 잘 맞는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옻을 목기(木器) 곧 나무그릇에 칠하면 위생적이면서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근엔 옻나무에서 추출한 성분이 항암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보도되기도 했구요. 자연산 옻칠은 침투력이 강해 잘 벗겨지지 않으며, 처음에는 새까맣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은은하게 변해 가고 윤기가 납니다. 그리고 살균·살충 효과와 아울러 좀이 먹지 않으며, 옛날부터 구충제로도 썼습니다. 또 옻칠한 목기에 밥을 담아 놓으면 밥이 쉽게 상하지 않으며 방수(防水)가 됩니다.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표면에 옻칠을 한 나무로 만든 송나라 때의 보물선이 700년 동안이나 바다 밑의 갯벌 속에서 견뎠다고 합니다.
1548. 백두산 칡뿌리, 우리 쪽에선 칡, 중국 쪽에선 등나무 우리가 쓰는 한자말에 “갈등(葛藤)”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상태.”라고 풀이합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명으로 1437년(세종 19) 에 펴낸 한자 자전 ≪운부군옥(韻府群玉)≫에 “말에 갈등이 있다. [話葛藤]”라고 하여 세상에서는 “아주 크게 어긋나는 일을 이른다.”라고 말합니다. 또 조선 후기 학자 조재삼의 책 ≪송남잡지(松南雜識)≫에는 “전설에서 ‘백두산 위에 칡 한 뿌리가 자라는데, 중국 쪽으로 퍼져 나가는 것은 등(藤)이 되고, 우리나라 쪽으로 향하는 것은 칡이 되니, 본래 같은 뿌리지만 각각 다른 식물이 된다.’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여러 가지 내용을 같이 생각하면 “갈등”이라는 낱말의 의미가 한결 가깝게 다가옵니다.
1547. 윤달, 혼인하기 좋고 이장과 수의 하는 달 조선 후기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윤달은 혼인하기에 좋고 수의(壽衣) 만들기에 좋다. 모든 일을 꺼리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윤달은 예부터 '썩은 달'이라고 하여, "하늘과 땅의 신(神)이 사람들에 대한 감시를 쉬는 때로 그때는 불경스러운 짓을 해도 신의 벌을 피할 수 있다."라고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윤달에는 이장(移葬)을 하거나 수의(壽衣)를 하지요. 윤달을 여벌달, 공달 또는 덤달이라고도 합니다. ‘증보문헌비고’ 악고(樂考)에 “금(琴, 현악기)은 줄이 다섯이니 오행을 상징한 것이고… 휘(暉)가 열셋이니 12율(律)을 상징하고 나머지 하나는 윤달을 형상화한 것이다”라는 말처럼 악기 만들 때도 윤달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동짓달에는 윤달이 들지 않는 것을 악용해 “윤(閏)동짓달 초하룻날 꾼 돈을 갚겠다.”라고 말하면 꾼 돈을 떼어먹겠다는 얘기라고 합니다.
삼척 하장면의 천연기념물 272호 느릅나무 느릅나무 잎
1546. 우리 겨레는 집짓기에 어떤 나무를 썼을까?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주몽은 부여를 떠나면서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기둥 아래(七稜石上松下)에 부러진 칼 한쪽을 묻어두었습니다. 이는 소나무가 건축물의 기둥으로 쓰였다는 최초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신라에서는 집 짓는 나무로 4두품 이하는 느릅나무를 써서는 안 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면 당시 귀족들이 집을 지을 때 느릅나무를 좋아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 뒤 원효대사, 평강공주·온달장군 등의 많은 기록에 느릅나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우리 땅에는 느릅나무가 흔했고 기둥 등 건축재로 널리 썼다는 짐작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고려의 건축물로 현재 남아있는 영주 부석사나 해인사 장경판전의 기둥은 느티나무였고, 조선왕조에 들어오면 소나무로 궁궐을 짓고 배를 만들면서 소나무를 귀중한 나무로 관리했지요. 이처럼 건축재에도 시대별로 다른 나무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 : (월간)문화재사랑 2009년 4월호 나무 문화재에 숨겨진 역사의 흔적(박상진)
1545. 임금님 수라상에서 기미 보기 임금과 왕비의 아침저녁 수라를 짓는 곳은 소주방입니다. 이 소주방에서 들어오는 수라상에는 임금 수저 이외에 상아로 된 젓가락 곧 공저 한 벌과 조그만 그릇이 놓여나옵니다. 그러면 임금이 수라를 들기 직전 중간 지위쯤 되는 상궁이 이 상아젓가락으로 접시에 모든 음식을 고루 담습니다. 그런 다음 큰방상궁이 먼저 손으로 접시에 담긴 음식 맛을 보는데 이것을 '기미(氣味)를 본다.'라고 합니다. 기미를 보는데 수라와 탕 만은 기미를 보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여기서 기미를 보는 것은 맛을 보는 것이라기보다 독(毒)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나중엔 의례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 기미를 보는 것은 녹용이나 인삼과 같은 귀한 탕제를 올릴 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상궁들에게는 인기있는 직책이었다고 합니다.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생각시들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지요.
1544. 백일떡에 담긴 의미들 우리 겨레는 아기가 태어난 지 백일째 되는 날 아침 아기를 점지하고 산모와 아기를 돌본다는 세 신령 곧 삼신할머니에게 그동안 무탈하게 돌봐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삼신상을 차려드립니다. 또 아기에게도 무병장수하라고 목에 명주실 타래를 걸어주기도 하지요. 또 이날은 백일떡을 친척과 이웃에 돌렸는데 100명과 나눠 먹어야 아기가 명(命) 곧 목숨을 사서 백수(百壽) 곧 오래 산다고 믿었습니다. 백일떡은 백설기, 수수팥떡, 인절미, 송편 등 다양합니다. 이때 백설기는 장수를 뜻하고 정결·신선함을 나타낸 것이며, 수수팥떡은 부정을 막는 뜻이 있었지요. 또 인절미는 찹쌀로 만들어 차지고 단단하기에 끈덕지고 여물기를 비손하고, 송편은 속이 꼭 차라는 뜻을 담아 속을 넣은 것과 속이 넓으라는 의미를 준 속을 넣지 않은 것 두 가지로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