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 푸른 동해바다에 흰 포말을 그리며 어선 한 척이 지나고 있다 ▲ 의상대에서 홍련암에 이르는 오솔길에서 바라다 본 푸른 동해바다 ▲ 낙랑장송 사이로 본 홍련암이 비탈에 위태하게 자리하고 있다 겨울 동해는 푸르다. 시리도록 푸르다. 낙산사 홍련암으로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시원하게 뚫린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떤 이는 홍련암으로 이르는 이 길이 좋아 홍련암에 간다는 사람도 있지만 푸르른 동해에 면해 있는 홍련암은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어쩌면 바위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느낌도 받지만 또 그것은 우리의 위태위태한 우리의 인생사 만큼이나 닮아 있다. 그러면서도 여여하게 늘 그 자리에 서있는 낙산사 홍련암은 언제나 푸른 동해바다를 품고 고단한 중생의 안식처로 자리하고 있다. 그대들 마음이 심란하면 동해바다를 품은 낙산으로 떠나 봄은 어떨는지...
▲ 기림사 일주문 위에 아름다운 구름이 떠 있다 ▲ 일주문의 긴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가을이 깊어가는 11월 마지막 토요일. 경주 양북면에 위치한 함월산 기림사에 갔다. 앙상한 겨울 나무들이 다소 쓸쓸해 보였지만 푸른 하늘에 뜬 구름은 무척이나 한가롭고 아름다웠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를 뜻하는데 643년 (선덕여왕 12) 인도에서 온 광유스님이 창건했으며 신라 통일 무렵 원효스님이 중창한 절로 수 많은 암자를 거느린 큰절이었다. 불국사도 당시에는 기림사 말사였을 정도로 번성했지만 지금 기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로 입장이 바뀌었다. 신라 신문왕은 대왕암(大王巖)에 다녀오던 길에 이 절의 서쪽 계곡에서 점심을 들었으며, 고려 말의 각유(覺猷)는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 그 뒤 1578년(선조 11)에 축선(竺禪)이 중건하였고, 정조 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사재를 희사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1862년(철종 13)에는 대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재가 되었으나, 이듬해 봄에 사찰의 승려들이 부윤 송우화(宋迂和) 등의 시주를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
▲ 미륵사지 안내도 ▲ 석탑앞에서 기도하는 스님.. 저 앞에는 투박하고 정감 넘치는 미륵불이 있다. ▲ 미륵불상과 5층석탑 ▲ 고려시대 석등의 모습이 무척이나 투박스럽고 정답다. ▲ 미륵불 주변에 석축과 감실로 가득하였던 미륵사 ▲ 주불이었던 미륵불상 ▲ 비석이 있었던 자리는 좌대만으로 남고, 대형 거북돌이 있는 미륵사지 ▲ 미륵사지의 석재들 ▲ 미륵사지의 빈 자리.. 저 곳에 많은 전각들이 빼곡하였을 것이다. ▲ 하늘재 오르는 길에 3층석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반도의 남북을 흘러내리는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에 이르면 월악산에 하늘재가 있다.하늘재는 충청북도 제천과 단양 충주와 경상북도 문경의 관음리를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이 고갯길은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하여 개척한 길로 알려져 있다. 이후 신라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지만, 신라말 나라를 고려 태조왕건에게 넘겨준 경순왕의 태자인마의 태자와 그의 동생이었던 덕주공주가 쓸쓸히 이길을 돌아서금강산까지 갔다고 전하기도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의태자는 미륵사의 미륵불이 되고 덕주공주는 이곳 근처에 덕주사의 불상이 되었다고도 전한다. 이후 경
▲ 가을빛에 물든 보각국사 승탑과 그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 전경 ▲ 보각국사의 석등 승탑 탑비 ▲ 나무등 사이로 본모각국사 승탑과 석등 ▲ 보각국사 승탑과 특이한 석등 ▲ 보각국사 승탑(탑명을 정혜원륭탑이라 부름) ▲ 보각국사탑비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충주시 소태면 오량에 가면 산비탈에 범상치 않은 스님의 탑과 부도와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 주인은 고려말 고승이었던 보각국사다. 보각국사는 1320년 원나라 시기에 충숙왕시절에 예천 용궁면에서태어났다. 어머니의 권유로 13세에 대선사 계송의 문하에 들어가 1341년 충목왕때 승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1348년 금강산에 들어가 수행과 공부를 계속하였고, 선원사 식영감 화상에게 능엄경을 계승하였다. 이후 명성을 날리던 스님은 공민왕에 의해 궁궐에서의 설법을요청받아설법하고 공부선장에 단독으로 선발되었으나 궁궐에 머무르는 것으로 알고 도망쳐나와 봉황산에 머물렀다. 1374년 궁궐의 내불당에서 설법하였고, 이후 송광사 서운사를 거쳐 다시 충주 연회암으로 돌아왔다. 1383년 우왕에 의해 국사로 책봉되어 개천사에 머물다 왜구들의 침략으로 충주가 기습당하자 광암사에 머물렸다. 1392년
▲ 충렬사 안내판 ▲ 충렬사 출입문 ▲ 충렬사 사당 정문 ▲ 비문 ▲ 충렬사 전시장 ▲ 전시장에 있는 임경업 장군의 칼 ▲ 추련도 명문 ▲ 장군의 행장 ▲ 장군의 비각 정조의 친필로 쓰여진 비(어제달천충렬사비) ▲ 충렬사 강당, 충렬사에서 행사할 때 사람들이 모이는 곳 ▲ 충민공 임경업장군사당 ▲ 임경업 장군의 초상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조선조 중기를 넘어 임진왜란이 끝난 뒤 얼마되지 않아 또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토가 피폐해지고 인구도 급감하였다. 하지만 성리학만을 유일한 학문으로 숭상하던 조선은 왕조를 바꾸는 일만은 하지 못하고 선조가 계속 집권한 조선이 계속되었다. 국토는 피폐하고 민심은 돌아섰으면 왕조를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이 세계사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조선은 감히그런일을 하지 못하였다. 반면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은 수많은 조선의 문화재와 기술자들을 잡아가서 이를 바탕으로 자기들만의 세계적인 도자기산업을 이룩하여 세계에 팔게 되었고, 전쟁에 패한 책임을 물어 풍신수길의 막부정권이 도쿠카와 이에아스의정권으로 바뀌었고, 명나라 임진왜란에 참가한 국력의 소모와 자
김옥균 사당 정면 솟을대문과 뒤로 사당이 보인다. 사당 측면 단풍에 물들어가는 사당 모습 사당 주차장에서 본 사당 협문 사당은 문이 잠겨있고, 현판조차 없이 쓸쓸하다. 묘소의 주변을 지키는 석인과 석수 김옥균 비석과 동자석 묘소에는 문인석이 관복을 입고 서있다.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는 구한말 바람결에 촛불같았던 나라의 운명 앞에서나라를 구하겠다고 뜻을 같이할 사람을 규합하고 목숨을 걸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선각자김옥균의 사당과 묘가 있다. 김옥균은 1851년 태어나 1894년 43년의 짧은 삶을 살고 세상을 떴다. 그는 1894년 이국 땅 상하이에서 같은 조선인으로 그를 죽이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던 동포의 총알에비명횡사 한뒤, 그의 유해는 1924년 이곳에 묻혔다. 김옥균은 안동김씨의 후손으로 태어나 명석한 두뇌와 판단력은 있었다. 그의 집안은구시대의 기득권에 안주하던 안동김씨와 노론의 세력이었으나 자기 집안의 번영에안주하지 않고 세계의 조류속에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뜻을 세우고, 이에 뜻을 같이하던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시대를바꾸고자 하였다. 그는 당시 개화사상에 깊은 공감
▲ 경복궁 고궁박물관 옆 잔디밭에 자리하고 있는 지광국사현묘탑 ▲ 전경-1 ▲ 상륜과 탑의 옥개석 ▲ 탑신석의 옥개석을 아래서 본 모습. 건축물의 부재를 그대로 새긴든 섬세하고 호화롭다. ▲ 탑 몸채 받침석의 장식 ▲ 탑 몸채의 하부. 구석에는 난간이 있었던 자리 ▲ 탑신석의 모습. 4면에 가득하게 하늘세계의 모습을 새긴 조각이 가득하다. ▲ 2층 기단석의 대각선 모습. 각면을 2로 나누어 그림을 그렸다. ▲ 2층 기단석 면에 그려진 그림. 지상세계의 모습으로, 각종 나무와 풀들이 새겨진 산수화 같은 모습들 ▲ 1층 기단석 면에 조각된 무늬 ▲ 1층 기단석의 하부에 조각된 꽃무늬 ▲ 지면과 닿는 지대석의 귀부분을 장식한 돌에는 구름무늭가 선명하다. ▲ 전경-2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원주 법천사터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101호)은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조성한 승탑이다. 본래는 원주 법천사터에 탑비와 함께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국권이 침탈되는 수모를 겪으면서 그 아름다움 에 반한 일본의 권력자들 때문에 일본까지 반출되었다가 돌려받은 명품으로, 현존하는 한국 스님의 사리탑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통일신라 이후 불교의 선종이 들어와 번창하자
▲ 신복사지 석탑과 공양물을 바치는 희견보살 ▲ 석탑의 측면모습 ▲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곧 부처님을 상징한다. 그 부처님을 향하여 향로를 들어 공양을 올리고 있는 희견보살상. 그러나 향로는 없어지고 다만 손에는철로된 자루가 박혀있다. ▲ 약왕보살 모습. 머리에는 8각형의 천개를 쓰고 있어 비바람을 막아준다. ▲ 석탑의 모습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릉시 내곡동에 있는 신복사지에 남은 3층석탑과 석탑을 향해 정성으로 공양물을 올리고 있는 희견보살상이다. 비록 건물들은 다 사라졌지만 석탑과 보살상은 거의 훼손이 안된 상태로 잘 남아있어 천만 다행이다. 석탑은 곧 부처님을 상징하고 있기에 그 부처님을 향해서 약왕보살(희견보살)이자신의 손을 태워 일월정명덕 부처님께 공양하고 있는 모습을 새겼다.그런 희견보살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걱정하자 희견보살은 자신의 두 팔이 다시 원래대로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신복사지 약왕보살의 모습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복스러운 모습으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다. 얼굴은 코부분만이 손상이 되었을 뿐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이런 보살상으로는 월정사 8각9층 석탑을 향해 공양물을 바치고 있는 약왕보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회루의 가을 이고야 경회루의 가을은 푸른 하늘로 온다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은다시 못 속에 숨어더 푸르게 떠오른다 경회루의 가을은못 가의 버드나무 가지 끝으로 온다쓰러질 듯 휘어진 잎새 사이로천년도 더 불어 왔을 바람 경회루의 가을은 사직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먼 발치서 지켜보았을향원정 뜨락 꽃단풍에도곱게 내린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유산사진작가
▲ 아침 구름속에 햇살이 공중사리탑에 비추는 모습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동해 양양 낙산사에는 특이한 사리탑이 있다.(보물1722호) 보통 사리탑이라 하면 고승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을 사리탑이라고 하지만, 낙산사의 해수관세음보살 아래 언덕배기에는 관세음보살의 사리탑이라 이름붙인 사리탑이 있으니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탑인 것이다.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화엄종을 전수하여 온 이래 전국의 명소를 찾아나섰고 그관세음보살을 낙산사의 바닷가 홍련암에서 친견한 이래 관세음보살의 성지로 전해오고 있다. 이런 연유로 홍련암에도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고, 원통보전에도 관세음보살이요, 그 아래 보타전에도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낙산사에는 일반 절에 모셔진부처님은 모시지 않고 있다. 그런데 조선 숙종9년(1683년)석겸스님이 홍련암에 모셔져 있던 관세음보살이 많이퇴색되어 좋은 날을 택하여다시 금칠을하는 도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사리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스님은 이를 관세음보살의 사리로 여기고, 정성으로 수습한 뒤 이를봉안하기 위하여숙종18년(1692년) 현재와 같은 사리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스님의 사리탑처럼 보이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