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시대의 나라 살림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왕권제도 시대에 세종은 재해가 일어나거나 농사가 어려워지거나 먹고 사는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인 ‘민생가려’의 경우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평시에는 논과 밭을 새로 일구고 저수지 등을 확충하여 밭에서 태종 4년(1404) 경기도를 빼고서도 25년 뒤 세종 초기 때 642,352결이 늘어나 그 증폭이 배에 이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장마나 가뭄 그리고 돌림병 등의 재해가 오면 처음으로 하는 일은 피해지역 조사에 들어갔다. 그다음 조치로는 해당지역의 ‘조세감면’이 이어졌다. 그리고 문소전(태조의 비인 신의왕후의 사당)과 그 밖의 지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때로 구국기도를 하지만 이는 민심을 달래는 행위였을 것이기도 하다. 이어 각 부처의 경비를 절감하는 실질적인 조치 말고도 이에 더해 죄수도 방면한다. 다음으로 시행되는 것은 실지적 현장 대처로 구휼(救恤, 이재민 구제)이었다. ∙ 구휼로 직접 돕다. ⋅세종 9년 7월 22일 : 외직으로 부임하는 첨절제사 정중수 등에게 백성들을 구호(民生可慮) 하는 데 힘쓰라고 당부하다. ⋅세종 3년 6월 19일 :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제4회 노은주의 <흥보가 완창발표회> 관련 이야기를 하였다. 이날 무대는 전문가, 애호가, 친지 등 관객들로 만원이었으며, 객석은 그가 안내하는 소리판으로 빠져들먼서 큰 손뼉과 추임새, 환호 속에 대성공이었다는 이야기, ‘놀보의 심술대목’, ‘흥보의 돈타령’, ‘중이 집터 잡아주는 대목’, ‘박씨를 물고 날아오는 제비노정기’, ‘흥보 아내의 가난타령’, ‘박타령’, ‘비단타령’, ‘화초장타령’ 등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판소리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이러한 대목들을 별도의 주제로 삼아 토막 소리극으로 꾸며서 교육자료나 감상자료로 활용한다면, 판소리에 대한 이해나 교육, 애호가 확보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야기를 바꾸어 이번 주에는 노은주의 소리를 좋아해서 그에게 소리를 배우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발표무대를 만들었다는, 곧 제1회 노은주 제자발표회 이야기를 소개한다. 글쓴이는 평소, 국악이 나라의 음악으로 자리를 잡고, 국민으로부터 폭넓은 관심과 애호를 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활동들이 전제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기회가 있는 대로 주장해 왔다. 관련하여 국악전문가나 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방의 풍속이 예로부터 세시를 중히 여겨 / 흰머리 할아범, 할멈들이 신이 났네 / 둥글고 모난 윷판에 동그란 이십팔 개의 점 / 정(正)과 기(奇)의 전략전술에 / 변화가 무궁무진하이 / 졸(拙)이 이기고 교(巧)가 지는 게 더더욱 놀라우니 / 강(强)이 삼키고 약(弱)이 토함도 미리 알기 어렵도다. / 늙은이가 머리를 써서 부려 볼 꾀를 다 부리고 / 가끔 다시 흘려 보다 턱이 빠지게 웃노매라.” 위는 고려말~조선초의 학자 목은 이색이 쓴 《목은고(牧隱藁)》에 나오는 시로 이웃 사람들의 윷놀이를 구경하면서 쓴 것입니다. 이 윷놀이를 할 때 던져서 나온 윷가락의 이름, 도ㆍ개ㆍ걸ㆍ윷ㆍ모는 원래가 가축의 이름을 딴 것으로 봅니다. 곧 도는 돼지를, 개는 개를, 걸은 양을, 윷은 소를, 모는 말을 가리킵니다. 특히 도는 원말이 ‘돝’이 변한 것으로 어간(語幹) 일부의 탈락형인데 돝은 돼지의 옛말로 아직도 종돈(種豚)을 ‘씨돝’이라 부르고, 돼지고기를 ‘돝고기’라고도 부릅니다. 또 윷은 소를 뜻하는데 소를 사투리로는 “슈ㆍ슛ㆍ슝ㆍ중ㆍ쇼”라고도 하는데 여기의 “슛”이 윳으로 변하였다가 윷으로 된 걸로 보입니다. 마지막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겨울보다 추운 '입춘 추위' 이윤옥 이제 곧 입춘이니 겨울이 다 갔다고 하던 사람들 입이 얼어붙었다 슬슬 두꺼운 옷을 집어 넣고 조금 가벼운 옷을 입으리라던 기대 마저 쑥 들어가 버렸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는 것은 좋다 그렇다고 섣불리 방정을 떨면서 봄을 찬양하지는 말라는 듯 내일은 영하 10도란다 내일은 1월 그 어느날 추위보다 더 춥단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공력 있는 소리의 주인공, 노은주 명창이, 고 한농선 선생을 떠 올리며 올곧게 가르쳐 주신 <흥보가>를 끝까지 제대로 이어나가고 싶다는 결기를 보인 이야기, 비록 그 길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날마다 연습하며 착실하게 보존해 나가겠다는 결심, 이를 위해 해마다 완창회 무대를 준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는 의지, 그러면서 이 귀한 소리를 가르쳐주신 스승께 감사드린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스승과의 약속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노은주는 해마다 흥보가 완창발표회를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승 한농선 명창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예능보유자가 되어, 후계자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스승께, 소리로써 보답해 드리겠다는 제자의 따뜻한 마음이 온전하게 담겨 있는 결심이다. 선생의 소리를 지켜 그 소리가 노은주를 통해 이렇게 남아 있다는 점을 확인해 드리고 싶다는 마음은 참으로 갸륵하기만 하다. 스승을 사모하는 노은주의 마음과 그 결의에 뜨겁게 손뼉을 쳐주고 싶다. 제4회 <흥보가 완창발표회>가 예고되어 있던 그날의 무대는 많은 판소리 전문가, 애호가, 친지 등 관객들로 만원이
[우리문화신문=이무성 작가] 우리문화신문은 한국화가 이무성 작가의 그림에 이윤옥 시인의 시를 붙여 <이무성 작가의 그림 나들이> 방을 만들었습니다. 이무성 작가는 지난 2007년부터 우리문화신문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어언 18여 년 동안 수백 편의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특히 한국문화 관련 그림을 맛깔스럽게 그려 우리문화신문의 격을 한껏 높여주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또한 이윤옥 시인의 여성독립운동가 관련 글에도 이무성 작가 특유의 그림으로 여성독립운동가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얼마 전 이무성 작가는 자신이 소중하게 보관하던 '원화'들을 우리문화신문사에 보내주었기에 우리문화신문은 <이무성 작가의 그림 나들이>에서 이를 시와 함께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그림 이무성 작가) 눈을 뚫고 봄을 알리는 '설중매' 이윤옥 네가 만일 눈 속에서 피어나지 않고 오월에 피는 뭇꽃들 속에 피어났다면 네가 만일 눈보라 속 추위를 뚫고 향기로운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수 많은 시인묵객들이 너를 어루만지며 사랑 고백은 하지 않았으리 너를 고요한 묵향 속에도 부르지 않았으리.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 완창회를 처음 시작한 박동진이 매일 새벽, 국악원 문을 두드려서 출근한 다음, 곧바로 북을 들고 창고 옆방으로 들어가 소리공부 했다는 이야기, 그가 68년 처음으로 완창회를 성공적으로 발표한 이후, 완창회에 관심을 두고 도전하는 명창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고 이야기했다. 또 오늘의 젊은 노은주도 부담스럽고 힘든 작업을 통해 노력하는 젊은 소리꾼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이야기, 그는 1회 완창회를 위해 2018년 양평에 있는 서종사에 들어가 스님들의 수행 시간처럼 계획을 짜고 연습하였다는 이야기, 특히 공기 좋은 산길을 걸으면서 판소리 연습을 했다는 그의 말은 건강과 소리, 양쪽을 동시에 챙기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작전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노은주 명창의 네 번째 완창 발표회 관련 이야기로 이어간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판소리 완창(完唱)발표회 무대가 누구나 마음을 먹고 계획을 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소리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이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임은 뻔한 사실이다. 그래서 첫째도 소리 실력이고, 둘째도 소리의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시대의 나라 살림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계적으로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나 축산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이후 서양은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따른 통상이 활발해지게 되었고 동양은 세계사적으로 뒤처지는 역사를 맞게 되었다. 왕권제도 시대에 세종은 재해가 일어나거나 농사가 어려워지거나 먹고 사는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인 ‘민생가려’의 경우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자. 평시에는 논과 밭을 새로 일구고 저수지 등을 확충하여 경기도를 빼고서도 태종 4년(1404)에서 25년 뒤인 세종 초기 때 642,352결이 늘어나 그 증폭이 배에 이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호수와 사람도 각기 27,607호, 319,339구가 늘어났다. 이와 같은 밭과 호수와 사람의 증가는 토지의 개간, 인구 자연증가의 영향도 있겠지만, 불과 25년 만에 거의 배에 달하는 토지의 개간과 호구에서 자연증가가 가능했다고 믿기지 않는다. 이것은 곧 나라가 직접 지배하는 토지의 증가 ‧ 호구의 증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곧 이러한 증가는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 추진되었던 집권적 통제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라의 수세지(收稅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완창회의 시작은 1960년대 말, 박동진이 <국립국악원> 강당에서 약 5시간 남짓의 <흥보가>를 한 자리에서 부른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에 따라 박동진의 완창 발표회는 처음과 끝을 갖춘 판소리의 완전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는 점, 특히 완창 판소리가 관객들에게 재미있는 장르라는 것을 인식시켰다는 이야기, 이러한 맥락에서 젊은 소리꾼, 노은주가 완창회를 준비해 왔다는 점도 분명 의미가 깊은 그 만의 판소리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당시 성경린 원장이 전해 준 말, “국립국악원은 공부하면서 월급도 받는 곳”'이라는 말에 매일 같이 새벽 출근을 하였다는 박동진의 이야기는 진정 명창의 길이 험난하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그가 열심히 연습하는 과정을 당시 젊은 연구원으로 있던 글쓴이도 여러 차례 볼 수가 있었다. 그는 매일 새벽, 그 앞 동네인 원서동에서 내려와 국악원 문을 두드리고는 곧바로 북을 들고 국악원 콘센트로 지은 창고 옆방으로 들어가 소리공부를 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흥보가> 완창 발표를 시작으로 해서 <춘향가>, <심청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수행기》는 1833년(순조33) 공청우도(公淸右道, 오늘날 충청남도) 암행어사로 활동한 황협(黃 , 1778~1856)이 남긴 보고서를 필사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19세기 초반 공청우도 관리들의 업적과 잘못을 비롯하여 백성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책 제목에서 ‘수(繡)’는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또 다른 이름인 ‘수의(繡衣)’를 뜻합니다. 제목 옆 ‘경랍(庚臘)’이라는 글씨와 책 안의 “경자년 납월 초칠일(庚子臘月初七日)”이라는 기록으로 1840년(헌종6) 무렵 편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협, 55살에 암행어사가 되다 《수행기》를 남긴 황협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황협은 1825년(순조25) 47살에 이르러서야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이후 공충도사(公忠都事), 홍원현감(洪原縣監),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등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1832년(순조32) 11월에는 비변사(備邊司)로부터 암행어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추천을 받습니다. 황협은 55살인 1833년 1월 7일 임금으로부터 공청우도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봉서(封書) 1통, 어사의 임무를 적은 사목책(事目冊) 1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