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겨울보다 추운 '입춘 추위' 이윤옥 이제 곧 입춘이니 겨울이 다 갔다고 하던 사람들 입이 얼어붙었다 슬슬 두꺼운 옷을 집어 넣고 조금 가벼운 옷을 입으리라던 기대 마저 쑥 들어가 버렸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는 것은 좋다 그렇다고 섣불리 방정을 떨면서 봄을 찬양하지는 말라는 듯 내일은 영하 10도란다 내일은 1월 그 어느날 추위보다 더 춥단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공력 있는 소리의 주인공, 노은주 명창이, 고 한농선 선생을 떠 올리며 올곧게 가르쳐 주신 <흥보가>를 끝까지 제대로 이어나가고 싶다는 결기를 보인 이야기, 비록 그 길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날마다 연습하며 착실하게 보존해 나가겠다는 결심, 이를 위해 해마다 완창회 무대를 준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는 의지, 그러면서 이 귀한 소리를 가르쳐주신 스승께 감사드린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스승과의 약속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노은주는 해마다 흥보가 완창발표회를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승 한농선 명창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예능보유자가 되어, 후계자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스승께, 소리로써 보답해 드리겠다는 제자의 따뜻한 마음이 온전하게 담겨 있는 결심이다. 선생의 소리를 지켜 그 소리가 노은주를 통해 이렇게 남아 있다는 점을 확인해 드리고 싶다는 마음은 참으로 갸륵하기만 하다. 스승을 사모하는 노은주의 마음과 그 결의에 뜨겁게 손뼉을 쳐주고 싶다. 제4회 <흥보가 완창발표회>가 예고되어 있던 그날의 무대는 많은 판소리 전문가, 애호가, 친지 등 관객들로 만원이
[우리문화신문=이무성 작가] 우리문화신문은 한국화가 이무성 작가의 그림에 이윤옥 시인의 시를 붙여 <이무성 작가의 그림 나들이> 방을 만들었습니다. 이무성 작가는 지난 2007년부터 우리문화신문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어언 18여 년 동안 수백 편의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특히 한국문화 관련 그림을 맛깔스럽게 그려 우리문화신문의 격을 한껏 높여주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또한 이윤옥 시인의 여성독립운동가 관련 글에도 이무성 작가 특유의 그림으로 여성독립운동가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얼마 전 이무성 작가는 자신이 소중하게 보관하던 '원화'들을 우리문화신문사에 보내주었기에 우리문화신문은 <이무성 작가의 그림 나들이>에서 이를 시와 함께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그림 이무성 작가) 눈을 뚫고 봄을 알리는 '설중매' 이윤옥 네가 만일 눈 속에서 피어나지 않고 오월에 피는 뭇꽃들 속에 피어났다면 네가 만일 눈보라 속 추위를 뚫고 향기로운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수 많은 시인묵객들이 너를 어루만지며 사랑 고백은 하지 않았으리 너를 고요한 묵향 속에도 부르지 않았으리.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우리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회보에 실리는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신정숙 선생님이 쓴 <적색과 아이보리>도 아주 재미있게 읽고 여러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빛깔을 뜻하는 우리말이 한자말과 서양말에 밀려서 아주 자리를 내놓고 말았으니 어쩌면 좋겠느냐 하는 걱정이었지요. 우리 겨레가 스스로 만들어 쓰는 토박이말이 중국말에 일천오백 년, 일본말에 일백 년, 서양말에 팔십 년을 짓 밟혀 많이도 죽었지요. 그렇게 죽어 버린 우리말을 갈래에 따라 살펴보면 좋은 공부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의 주검(시체)들을 어루만지며 서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 겨레의 삶을 뉘우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신 선생님이 '반물'이라는 낱말의 참뜻을 몰라서 애태운 것 때문입니다. 국어사전들이 '반물'을 올림말로 싣지도 않았으니 어디서 참뜻을 알아보겠습니까? 애를 태운 끝에 찾아낸 것이 반물은 '암키와색'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암키와든 수키와든 빛깔이야 다를 게 없으니, “반물색이라 하기보다 '기와색'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그랬지요? 그런데 그건 우리네 국어사전들이 모두 엉터리라서 그렇게 되었어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 완창회를 처음 시작한 박동진이 매일 새벽, 국악원 문을 두드려서 출근한 다음, 곧바로 북을 들고 창고 옆방으로 들어가 소리공부 했다는 이야기, 그가 68년 처음으로 완창회를 성공적으로 발표한 이후, 완창회에 관심을 두고 도전하는 명창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고 이야기했다. 또 오늘의 젊은 노은주도 부담스럽고 힘든 작업을 통해 노력하는 젊은 소리꾼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이야기, 그는 1회 완창회를 위해 2018년 양평에 있는 서종사에 들어가 스님들의 수행 시간처럼 계획을 짜고 연습하였다는 이야기, 특히 공기 좋은 산길을 걸으면서 판소리 연습을 했다는 그의 말은 건강과 소리, 양쪽을 동시에 챙기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작전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노은주 명창의 네 번째 완창 발표회 관련 이야기로 이어간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판소리 완창(完唱)발표회 무대가 누구나 마음을 먹고 계획을 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소리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이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임은 뻔한 사실이다. 그래서 첫째도 소리 실력이고, 둘째도 소리의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한여름 땡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삼복더위를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여러 해 전부터 줄곧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하는 '소리'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떠들어 댔다. 이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소리'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마땅하다. 이럴 때에는 '한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하거나 더욱 뜨거우면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해야 올바른 우리말이 된다. 때가 마침 초복ㆍ중복ㆍ말복 사이라면 '복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또는 '삼복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바짝 마른 땡볕더위를 '무더위'라고 떠드는 것은 틀림없이 '무더위'라는 낱말의 뜻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싶어서 가까이 만나는 몇몇 사람들에게 '무덥다'라는 낱말의 뜻을 물어보았다. 거의가 '매우 덥다', '몹시 덥다', '아주 덥다' 같은 껍데기 뜻풀이 대답뿐이었는데, '무'라는 앞가지에 무게를 두어서 '무섭게 덥다' 하는 놀라운 대답도 나왔다. 그러니까 '무더위'는 '무서운 더위'라는 것이다. 놀랍기는 놀라운 대답인데, 우리말의 신세가 이처럼 버림 받았는가 싶어서 놀라웠다. 국어사전들이 뜻풀이를 잘못해서 그런가 싶어 뒤적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시대의 나라 살림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계적으로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나 축산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이후 서양은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따른 통상이 활발해지게 되었고 동양은 세계사적으로 뒤처지는 역사를 맞게 되었다. 왕권제도 시대에 세종은 재해가 일어나거나 농사가 어려워지거나 먹고 사는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인 ‘민생가려’의 경우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자. 평시에는 논과 밭을 새로 일구고 저수지 등을 확충하여 경기도를 빼고서도 태종 4년(1404)에서 25년 뒤인 세종 초기 때 642,352결이 늘어나 그 증폭이 배에 이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호수와 사람도 각기 27,607호, 319,339구가 늘어났다. 이와 같은 밭과 호수와 사람의 증가는 토지의 개간, 인구 자연증가의 영향도 있겠지만, 불과 25년 만에 거의 배에 달하는 토지의 개간과 호구에서 자연증가가 가능했다고 믿기지 않는다. 이것은 곧 나라가 직접 지배하는 토지의 증가 ‧ 호구의 증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곧 이러한 증가는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 추진되었던 집권적 통제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라의 수세지(收稅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완창회의 시작은 1960년대 말, 박동진이 <국립국악원> 강당에서 약 5시간 남짓의 <흥보가>를 한 자리에서 부른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에 따라 박동진의 완창 발표회는 처음과 끝을 갖춘 판소리의 완전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는 점, 특히 완창 판소리가 관객들에게 재미있는 장르라는 것을 인식시켰다는 이야기, 이러한 맥락에서 젊은 소리꾼, 노은주가 완창회를 준비해 왔다는 점도 분명 의미가 깊은 그 만의 판소리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당시 성경린 원장이 전해 준 말, “국립국악원은 공부하면서 월급도 받는 곳”'이라는 말에 매일 같이 새벽 출근을 하였다는 박동진의 이야기는 진정 명창의 길이 험난하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그가 열심히 연습하는 과정을 당시 젊은 연구원으로 있던 글쓴이도 여러 차례 볼 수가 있었다. 그는 매일 새벽, 그 앞 동네인 원서동에서 내려와 국악원 문을 두드리고는 곧바로 북을 들고 국악원 콘센트로 지은 창고 옆방으로 들어가 소리공부를 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흥보가> 완창 발표를 시작으로 해서 <춘향가>, <심청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수행기》는 1833년(순조33) 공청우도(公淸右道, 오늘날 충청남도) 암행어사로 활동한 황협(黃 , 1778~1856)이 남긴 보고서를 필사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19세기 초반 공청우도 관리들의 업적과 잘못을 비롯하여 백성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책 제목에서 ‘수(繡)’는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또 다른 이름인 ‘수의(繡衣)’를 뜻합니다. 제목 옆 ‘경랍(庚臘)’이라는 글씨와 책 안의 “경자년 납월 초칠일(庚子臘月初七日)”이라는 기록으로 1840년(헌종6) 무렵 편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협, 55살에 암행어사가 되다 《수행기》를 남긴 황협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황협은 1825년(순조25) 47살에 이르러서야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이후 공충도사(公忠都事), 홍원현감(洪原縣監),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등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1832년(순조32) 11월에는 비변사(備邊司)로부터 암행어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추천을 받습니다. 황협은 55살인 1833년 1월 7일 임금으로부터 공청우도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봉서(封書) 1통, 어사의 임무를 적은 사목책(事目冊) 1통,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난 1월 13일(월)은 만 18살을 맞이한 청년들을 기리는 일본의 '성인의 날(成人の日)' 이었다. 메이지시대 (1868~1912)부터 약 140년 동안 일본에서 성인의 연령은 20살로 민법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민법이 개정되면서 2022년 4월 1일부터 성인 연령이 20살에서 18살로 바뀌었다. 따라서 20살 때 치르는 ‘성인식’의 나이도 18살로 낮아졌다. 일본의 ‘성인의 날’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새롭게 성인이 되는 미성년자들이 부모님과 주위의 어른들에게 의지하고 보호받던 시절을 마감하고 이제부터 자신이 어른이 되어 자립심을 갖도록 예복을 갖춰 입고 성인식을 치르는 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일본의 성인의 날은 1946년 11월 22일 사이타마현 와라비시(埼玉県 蕨市)에서 연 ‘청년제’가 그 뿌리다. 당시 일본은 패전의 허탈감에 빠져 있었는데 그 무렵 청년들에게 밝은 희망을 주기 위한 행사가 바로 ‘성인의 날’ 시작인 셈이다. 이때 행한 성년식이 성인식의 형태로 발전하여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지금도 와라비시에서는 성년식이라는 이름으로 기념식을 열고 있으며 1979년에는 성년식 선포 20돌을 맞아 와라비성지공원 안에 ‘성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