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한 주일쯤 지난 뒤 미스 최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느 때처럼 금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김 교수는 은근히 금요일이 기다려지면서 한편으로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언제까지 미스 최를 만나야 하나? 이번에 만나면 무슨 결단을 내려야 할까 보다. 금요일은 마침 대학 입시의 면접일이었다. 김 교수가 속한 면접 팀은 음악 대학 지원자를 면접하게 되었다. 면접은 간단한 질문을 두세 가지 던지고 응시자의 답변 태도와 행동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점수 차가 크게 나지 않게 채점하지만 1, 2점의 점수는 가감할 수 있다. 질문은 아무 것이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김 교수는 그날 음악대학 입시생이라는 점을 살펴 평소에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다. “국악과 서양음악과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응시자는 여학생이 대부분이었는데, 학생들의 답변은 대개 비슷하였다. 이들의 답변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얻어진다. 서양음악은 7음계인데, 국악은 5음계이다. 서양음악은 화성을 중요시하여 벽돌 같은 몇 개의 음이 합쳐져야 아름다운데, 국악은 음 하나하나가 수석(壽石)처럼 중요하게 여겨진다. 서양음악은 쉼표의 길이가 정해져 있는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조금 더 오르자, 삼거리가 나오는데 평창바위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왼편 길로 가면 임진노성전적비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나는 혼자서 왼편으로 10여 미터 내려가 보았다. 커다란 임진노성전적비와 노성산성지 비석이 보인다. 노성산성지의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조선조(朝鮮朝) 중기 흉폭한 왜적(倭賊)의 침입이 있었을 때 이 고장을 지키려는 조상들이 피 흘려 싸운 곳이다. 이곳에 처음 성을 쌓은 것은 조선 중기라 하나 성을 쌓은 모양으로 보아 그보다 더 오래인 고려시대 이전에 이 고장을 지키려는 선민들이 쌓은 산성이라고 보는 편이 옳은 것 같다. 특히 이곳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 공이 이 산성을 수축하고 전란에 대비한 바 있으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많은 관민이 함께 피란했던 응암굴이 있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 400여 미터의 작은 산성이나 천험(天險)을 이용하여 수축한 산성이다. 이 고장을 지켜온 호국의 유적지를 길이 보존하고자 표석을 세워 옛일을 후세에 전한다. - 1984. 10. 7 평창군수 노성산성지 비석은 이곳이 “왜적의 침입이 있었을 때 이 고장을 지키려는
[우리문화신문=안승열 명리학도] ■ 火 2음 7양 : 쓴맛과 매운맛이 2:7이 되면 화가 된다 2음의 쓴맛이 7양을 다독여야 진정한 화기가 만들어진다. 화기가 약한 사람은 매운맛인 생강, 무, 대파, 양파, 초석잠(식물의 뿌리로 누에고치처럼 생겼음), 고추장, 후추, 겨자를 먹어야 한다. 그 성분 가운데 매운맛이 주종인 파, 마늘, 삼채, 쑥, 냉이, 달래, 당근 등도 화기가 충만한 식품이다. 매운맛은 장에서 수분을 그대로 배출되게 한다. 매운맛은 어떤 성분도 몸 안으로 들이기보다 내보내려 한다. 매운맛은 목기와 화기에 모두 있으니, 양기의 본질이다. 매운 고추를 먹으면 설사가 나고, 땀이 나고 심장 박동이 높아지며 날숨이 드세어진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이를 확 날려버리고 싶을 땐 매운 떡볶이 먹는다. 양기로 음기의 잡생각을 발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과열이 되어서 진정이 필요하면 씁쓸한 씀바귀를 먹는다. 쓴맛은 생각만 해도 양기를 내린다, 입안에 돌던 양기로 가득한 침이 꿀꺽 넘어가 버리고 만다. 쓴맛이 화기를 풀썩 꺼지게 하는 것이다. 봄철에 이런저런 일로 신경을 많이 쓰다 보면 화기가 쌓여서 몸이 덩달아 과열되며 소화액이 마르고 단내가 나며 식욕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집 삼 년을 살고 나니……” 이렇게 비롯하는 <진주 난봉가>는 지난 시절 우리 아낙네들의 서럽고도 애달픈 삶을 그림처럼 이야기하는 노래다. ‘울’이나 ‘담’이나 모두 삶의 터전을 지켜 주고 막아 주는 노릇을 한다. 이것들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은 그 안에서 마음 놓고 쉬고 놀고 일하며 살아갈 수가 있다. 울도 담도 없다는 것은 그만큼 믿고 기대고 숨을 데가 없이 내동댕이쳐진 신세라는 뜻이다. ‘울’은 집이나 논밭을 지키느라고 둘러막아 놓은 가리개의 하나로, ‘바자’로 만드는 것과 ‘타리’로 만드는 것의 두 가지가 있었다. ‘바자’는 대, 갈대, 수수깡, 싸리 따위를 길이가 가지런하도록 가다듬어 새끼줄로 엮거나 결어서 만든다. 드문드문 박아 둔 ‘울대’라고 부르는 말뚝에다 바자를 붙들어 매어 놓으면 ‘울바자’가 된다. ‘타리’는 나무를 심어 기르거나 다 자란 나무를 베어다 세워서 만든다. 탱자나무, 잔솔나무, 동백나무 같은 나무를 심어서 기르면 저절로 자라서 ‘생울타리’가 되고, 알맞게 자란 나무를 베거나 가지를 쳐서 세우고 울대 사이를 새끼줄로 엮어서 묶으면 그냥 ‘울타리’가 된다.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한해가 바뀌고 나서 며칠 후 김 교수는 미스 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더니, ‘기다리세요. 녹음을 남기려면 1번, 무얼 하려면 2번 어쩌고...’ 젊은 여자 목소리의 안내음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온다. 편리하다기보다는 번거로운 생각이 들어서 수화기를 내려놓아 버렸다. 며칠 후, 미스 최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라고 인사를 나누고, 그러더니 “오빠, 나 《아리랑》 제6권도 다 읽었어요. 한 번 만나 주셔야지요”라고 애교를 부리며 협박한다. 처음에 3권짜리 장편소설을 시작했더라면 벌써 끝났을 텐데, 12권짜리 《아리랑》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내가 만든 인과응보이니 어쩔 수가 없지. 토요일에 한번 만나자고 하니, 주말에는 용평스키장에 갈 계획이라고 한다. 이것 참... 술집 아가씨가 대학교수 기죽이네. 나는 스키의 ‘스’ 자도 모르는데. 그러면 잘 갔다 오고 다음 주에 다시 연락하자고 말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김 교수와 격이 안 맞는 것 같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는 속담이 있는데... 겨울 방학이지만 김 교수는 날마다 학교에 나갔다. 방학이 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이효석문학관에서 해설사로 근무하는 황병무 선생에게 다리외 사진과 관련하여 질문을 해보니 <향수>라는 글에 단서가 있다고 한다. <향수>는 효석이 1939년 9월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소설의 내용은 평양의 도시 생활에 지친 아내가 모처럼 경성의 시골집으로 쉬러 떠나는 이야기이다. 효석과 아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소설에서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혼자 내빼구 집안은 어떻게 하려구.” 그러나 마침 일가 아이가 와 있던 중이었고 아내의 시골행 결심도 사실은 거기에서 생겼던 까닭에 이것은 하기는 헛걱정이기는 했다. “나 혼자 남겨 두구 맘이 달지 않을까.” “에이구 어서 없는 새 실컷 군것질 해두 좋아요. 얼마든지 하라지. 지금에 시작된 일인가 머. 이제 다 꿈만 하니.” “큰소리 한다. 언제 맘이 저렇게 열렸던고. 진작.....” 소설에서 아내는 남자의 바람기를 흥미롭게도 ‘군것질’이라고 비유하였다. 아내인 이경원은 미술학도로서 여고 졸업 작품 전시회에서 효석을 처음 만났다. 집안이 부자였던 그녀는 미술 공부하러 동경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효석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혼인하고 애를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우리’라는 낱말은 ‘나’를 싸잡아 여러 사람을 뜻하는 대이름씨다. ‘여러 사람’에는 듣는 사람이 싸잡힐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다. 이런 대이름씨는 다른 겨레들이 두루 쓰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우리’라는 대이름씨 낱말은 다른 대이름씨와 마찬가지로 매김씨로도 쓰인다. ‘우리 집, 우리 마을, 우리나라, 우리 회사, 우리 학교, 우리 아기, 우리 어머니……’ 이런 매김씨 또한 남다를 것이 별로 없는 쓰임새다. 그러나 외동도 서슴없이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 하고, 마침내 ‘우리 아내’, ‘우리 남편’에 이르면 이런 매김씨야말로 참으로 남다르다. 그래서 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건 잘못 쓴 것이고 틀린 말이라는 사람까지 나왔다. 하지만 여기 쓰인 매김씨 ‘우리’는 나를 싸잡아 여러 사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듣는 사람을 싸잡아 쓰는 것도 아니며, 다만 나와 대상을 싸잡아 쓰는 것이다. 나와 대상을 싸잡으면 둘이니까 ‘우리’가 되는 것이지만, 드러내는 뜻은 ‘둘’이 아니라 ‘서로 떨어질 수 없이 하나를 이루는 깊은 사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 뿌리 깊게 얽혀 살아온 우리 겨레의 자랑
[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 3일 차, 2024년 5월 10일, 금요일 숙박 : 돈황 敦煌太阳大酒店 0937-8829998 어젯밤 비바람이 불어 아침에도 무척 쌀쌀하여 옷을 여러 겹 입고 출발했다. 가욕관 성을 찾았다. 멀리 주차하고 전기 셔틀버스로 한참 달려 입장한다. 성문이 열리기 전 고대 군인 옷을 입은 군인의 창 군무와 궁녀 무희 춤, 관리들 행차 등 여러 공연을 하여 즐거웠다. 남문인 광화문(光化門) 성문을 들어서면서 옛 실크로드 대상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이곳을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성취를 상상하니 그들의 위대한 여정에 경의를 표한다. 성루에 올라서니 기련산 만년설과 흑산의 힘찬 위용이 가욕관성 장성을 막고 있는 천혜의 요새다. 성루를 한 바퀴 돌면서 현장법사와 혜초스님의 힘든 여정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가욕관 성을 체험하였다. 가욕관 장성(嘉峪关长城 자위관) : 시 남서쪽으로 6km에 있으며, 명나라 만리장성의 서쪽 끝자락이다. 기련산과 흑산 좁은 산골짜기 산세에 따라 성루를 세웠다. 성루는 홍무 5년(1372년)에 건립되었다. 내성은 둘레가 640m, 성의 높이 10.7m이며 다진 황토로 축조되었으며, 서쪽은 벽돌담으로 웅장하고 견고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아서 새해가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아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새해에는 항상 올해의 계획을 세웠다. 책을 1주일에 1권 이상 읽겠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 공부를 하겠다. 자격증을 하나 따겠다. 일본어를 배우겠다. 아들과 하루에 한 번 이상 사랑의 대화를 나누겠다. 교과서로 쓸 책을 한 권 쓰겠다 등등. 그러나 그러한 새해 결심은 항상 지켜지지 않는 법이다. 작심삼일에 그만 무너지는 결심도 있고 두세 달 가는 결심도 있다. 그러다가 연말에 돌이켜 보면 새해 결심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그때는 방학 숙제가 많았다. 매일 일기를 쓰고, 곤충 채집을 하고, 명승고적 방문기를 기록하고 등등...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면 ‘방학숙제를 해야 하는데...’라며 걱정만 했다. 그러다가 개학 날짜가 내일모레로 다가오면 그때야 방학숙제를 한다고 온 야단법석을 치르고도 언제나 한두 가지 숙제는 하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 새롭다. “다음 방학 때에는 꼭 방학숙제를 먼저 하고 놀아야지”라고 결심하지만, 그러한 결심은 초등학교 6년 동안 한 번도 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짜: 2024년 6월 24일(월) 답사 참가자: 김수용 김혜정 송향섭 윤석윤 윤희태 이상훈 전선숙 황병무 (8명) 답사기 쓴 날자: 2024년 6월 29일 효석문학100리길의 제5구간은 평창 용항리 경로당 ~ 평창바위공원 ~ 평창 전통장(평창초교)까지 걷는 길로서 소책자에서는 ‘마을길 따라 노산가는 길’이라고 이름붙이고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강, 들, 숲과 역사 그리고 옛 정취가 남아있는 평창 전통장 등 다양한 테마를 가진 그림처럼 아름다운 평창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간이다. 5-1구간은 용항리 경로당에서 평창바위공원까지의 거리 7.5km 구간이다. 5-1구간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숲길을 따라 작은 고개를 넘고 마을길을 걸으며 시골의 정취를 느끼고 평창강과 기암절벽,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던 노산성을 둘러보고 평창강변에 위치한 평창바위공원에 이르는 길이다. 용항리 경로당에서 아침 9시 30분에 8명이 출발하였다. 이날 날씨는 여름이지만 구름이 끼고 흐려서 덥지 않았다. 기온은 25도 정도로서 답사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용항리 안쪽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길은 원래는 4구간에 포함되어 있으나 지난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