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약연(金躍淵, 1868.9.12~1942.10.29) 선생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호는 규암(圭巖)으로 8세 때인 1875년부터 10여년 간 함북 종성 출신의 유학자들인 남종구, 오삼열, 주봉의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아마도 선생이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인해 날로 참담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고, 그 난국의 해법을 맹자의 경세론(經世論)에서 찾아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즈음의 정세는 급박하였다. ▲ 규암 김약연 선생 1908년에는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여 숙감(塾監)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에는 명동중학교로 발전시켜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청년들의 애국정신을 함양하였다. 1912년에 이동휘(李東輝)가 명동으로 망명해오자 연변교민회를 발전적으로 해체,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를 창설,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1918년에는 여 준(呂準)정안립(鄭安立)박성태(朴性泰)박찬익(朴贊翊)정 신(鄭信) 등 38인과 함께 31독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백용성(白龍城, 1864. 5. 8~1940. 2. 24)선생은 1864년 5월 8일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백남현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수원(水原), 속명(俗名)은 상규(相奎), 법명(法名)은 진종(震鍾), 법호(法號)는 용성(龍城)이다. 선생은 불제자로서의 천품을 타고난 듯 어릴 때부터 자비스런 성품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7세 때인 1870년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9세에 이르러서는 한시를 지을 정도였다고 하니 선생의 영특한 문재(文才)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선생은 14세 때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느낀 바 있어 남원 교룡산성에 있던 덕밀암(德密庵)으로 찾아가 출가하려 하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16세 때인 1879년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으로 출가하여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로, 혜조율사(慧造律師)를 계사로 불법 수도의 길에 들어섰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해인사는 고려시대 불력(佛力)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아보려 조판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수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정신여고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 교장 선생님을 찾아뵙겠다는 편지를 보낸 것은 지난 11월 중순이었다. 편지를 보내자마자 언제라도 좋다는 연락이 와서 기자가 이희천 교장 선생님을 찾아간 날은 11월 30일 월요일 오전 10시였다. 교정에는 늦 단풍나무 한그루가 붉은 옷을 입은 채 서 있었고 바로 옆에는 정신백년(貞信百年, 1887-1987)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돌비석이 있어 정신여고가 오랜 전통을 지닌 학교임을 묵묵히 말해주고 있었다. 정신여자고등학교(교장 이희천)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로는 김마리아 선생을 비롯한 김순애,김영순, 신의경, 백신영, 유인경, 이정숙, 장선희 애국지사 등으로 이들은 한국여성독립운동사의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여성독립운동가의 산실답게 교장실에는 학사모를 쓴 김마리아 선생의 액자가 걸려있었는데 액자 밑에는 순국열사 김마리아(1892-1944), 정신여학교 4회 졸업. 모교의 교사로 재직. 2.8독립선언의 주동인물로 활약.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3.1 운동 당시 옥고를 치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추서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 정동여학당(정신여고 전신)학생들과 2대 교장 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외증손녀인 오영숙 인사 올립니다. 오늘 저는 100년 편지 청탁을 받고,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대전 국립현충원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린 늦가을에 할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괜히 마음이 설레더군요. 현충원에는 일제의 압제에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애국지사 묘역부터 625전쟁 영웅들과 분단국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천안함 폭침 희생자 묘역까지 우리나라의 안타까운 근현대사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묘역에 묻히신 분들은 모두 애국애족의 나라 사랑 정신으로 불같이 뜨겁게 살다 가신 호국 영령들이었습니다. 백합꽃 한 아름과 태극기를 할아버지 묘역에 꽂고 절을 올리고 나자 할아버지께서 저를 반겨주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먹먹하여 한참을 할아버지 비문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문에는 이조판서 예안 김백암 선생의 11대손으로 망국 조약 륵결에 비분강개하여 통정대부승정원비서승 벼슬도 버렸고 국치를 당하자 항일독립 전선에 신명 바쳐 싸우셨네. 노백린 장군이 보낸 모금 위임장에 따라 군자금 조달하다 옥고 2년 또 5년 치르며 모진 고문 다 견디고 순국하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문창범 [1870~(1938)]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하여 재력가로 자수성가한 인물로 연해주 지역 교육 및 언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조직되자 우수리스크지회 대표로 활약하였으며, 당시 해외 독립운동을 이끌던 독립운동가 39인과 함께 만주 길림에서 배포된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7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어 러시아 지역 귀화인과 비 귀화인 등 한인사회 결집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기관지인 한국어 신문, 청구신보를 간행하였다. 1919년 1월 선생은 러시아 니코리스크에서 한족회대회를 개최하고 한인 2백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하였으나 주둔 일본군에 의해 해산 당하였다. 문창범 선생의 유일한 사진 1919년 2월 니코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및 국내 대표들이 참석한 전로국내조선인회의를 개최하여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한 대한국민의회를 창설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인 대한국민의회 의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2만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계백(宋繼白, 1896~1920)선생은 189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선생이 성장하던 시기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제가 각축을 벌이던 때였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일련의 침략 조약을 강요하면서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국망의 상황을 목격하면서 성장한 선생은 강렬한 애국심과 민족애도 함께 키워갔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상경하여1911년 보성중학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에 이후 독립운동을 함께 전개할 선배와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도교에 입교한 뒤 보성중학의 교장으로 있던(그때까지는 변절하지 않았던) 최린이었고, 또 1기 선배인 현상윤과 1기 후배인 최승만 등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들은 모두 선생과 함께 2.8독립운동, 그리고 3.1운동의 계획과 추진 과정에서 서로 연락을 취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 기반은 이 때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보성중학 졸업 후 선생은 곧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학관 영어과에 편입하여 수학하였다. 그리고 1916년 3월 이 학관을 수료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유인석 선생은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천 남면 가정(柯亭)에서 태어났는데 가정리는 고흥 유씨 일족의 집성촌(集姓村)이었다. 14세 때 양평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에게 글을 배웠는데 1868년 화서가 별세한 뒤 중암 김평묵(金平)과 종숙인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를 스승으로 모시며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화서의 문하에서 의병장이 가장 많아 나왔는데,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유중교김평묵의암 유인석 등이 그 정신을 이어받은 당대의 석학들이었으며,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에 옮긴이가 의암으로서 병자조약에 반대 상소를 올린 바도 있었다. ▲ 유인석 의병장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거사할 마음을 굳히고 11월 28일 문인인 이필희(李弼熙)서상렬(徐相烈)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의 의병진에 격려의 글을 보냈다. 당시 의암은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가정리에서 여막(蘆幕)을 지키고 있었다. 이른바 제천(堤川) 의진의 예하 부대들이 제천으로 진군, 양근(陽根)지평(砥平)원주(原州)제천(堤川)에 이르는 일대의 의병이 모두 제천에 집결하게 되어 대부대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대규모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이설 [1850~1906] 선생은 충남 홍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남당 한원진의 학통을 잇는 이돈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과 교리를 비롯하여 동부승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그때마다 상소를 올려 정국의 문제점과 방향을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홍주지역 유생들의 사상은 위정척사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위정척사론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따라 척사의 대상을 달리하였다. 초기에는 소중화를 지키고 사학을 물리쳐야 한다는 위소중화衛小中華 척사학斥邪學의 이론을 형성하였으나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항복조약이라고 통박하면서 척왜론을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변란에 즈음하여 척왜론은 일본과의 결전을 감행하자는 대일항전론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위정척사론은 의병투쟁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선생은 1894년 갑오변란에 사직하고 낙향한 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홍주의병에 참여하였으나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매국적을 처단하고 일본과의 전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신언준 선생(申彦俊, 1904. 11. 8~1938. 1. 20)은 1904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부친 신정균과 모친 송씨(宋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은암(隱岩)이다. 선생은 어려서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1918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오산학교는 한말 상공업에 종사하여 크게 성공한 이승훈이 설립한 신민회 계열의 민족학교로 평양의 대성학교와 더불어 서북지역의 민족운동자들의 근거지였다. 때문에 1911년 초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인사들을 탄압할 때 오산학교와 대성학교는 그 주된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때 대성학교는 폐교되었고, 오산중학교는 교주인 이승훈이 피검되어 폐교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던 서북지역 민족교육의 본산이자 민족운동의 요람이었다. 더구나 이승훈은 출옥 후 기독교측 대표로 일제하 최대의 민족 독립운동인 3.1운동의 불꽃을 지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으로 활약하였다. ▲ 신언준 선생 이에 영향을 받은 오산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 또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타오르던 시기인 1919년 3월 31일 태극기를 앞세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곽재기[18931952] 선생은 충북 청주사람으로 일찍이 서울에 올라와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청주 청남학교(靑南學校) 교사를 지내며 1909년 청소년으로 조직한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의 당원이 되어 80여 당원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 7월 황상규(黃尙奎)윤소룡(尹小龍)김기득(金奇得) 등과 함께 만주 길림성 동녕현(東寧縣) 소수분(小綏芬)으로 건너가 이성우(李成宇)외 여러 동지와 알게 되면서 동년 11월 9일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成宇)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 등과 일제의 관리밀정관공서 등을 주살파괴함으로써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무력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는 강력한 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 곽재기 선생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 등을 파괴하여 전국의 인심을 자극하기로 결정하고 황상규(黃尙奎)는 먼저 길림(吉林)에서 폭탄의 제조방법을 배우고 그는 김기득(金奇得)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