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문창범 [1870~(1938)]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하여 재력가로 자수성가한 인물로 연해주 지역 교육 및 언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조직되자 우수리스크지회 대표로 활약하였으며, 당시 해외 독립운동을 이끌던 독립운동가 39인과 함께 만주 길림에서 배포된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7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어 러시아 지역 귀화인과 비 귀화인 등 한인사회 결집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기관지인 한국어 신문, 청구신보를 간행하였다. 1919년 1월 선생은 러시아 니코리스크에서 한족회대회를 개최하고 한인 2백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하였으나 주둔 일본군에 의해 해산 당하였다. 문창범 선생의 유일한 사진 1919년 2월 니코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및 국내 대표들이 참석한 전로국내조선인회의를 개최하여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한 대한국민의회를 창설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인 대한국민의회 의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2만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계백(宋繼白, 1896~1920)선생은 189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선생이 성장하던 시기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제가 각축을 벌이던 때였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일련의 침략 조약을 강요하면서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국망의 상황을 목격하면서 성장한 선생은 강렬한 애국심과 민족애도 함께 키워갔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상경하여1911년 보성중학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에 이후 독립운동을 함께 전개할 선배와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도교에 입교한 뒤 보성중학의 교장으로 있던(그때까지는 변절하지 않았던) 최린이었고, 또 1기 선배인 현상윤과 1기 후배인 최승만 등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들은 모두 선생과 함께 2.8독립운동, 그리고 3.1운동의 계획과 추진 과정에서 서로 연락을 취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 기반은 이 때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보성중학 졸업 후 선생은 곧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학관 영어과에 편입하여 수학하였다. 그리고 1916년 3월 이 학관을 수료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유인석 선생은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천 남면 가정(柯亭)에서 태어났는데 가정리는 고흥 유씨 일족의 집성촌(集姓村)이었다. 14세 때 양평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에게 글을 배웠는데 1868년 화서가 별세한 뒤 중암 김평묵(金平)과 종숙인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를 스승으로 모시며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화서의 문하에서 의병장이 가장 많아 나왔는데,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유중교김평묵의암 유인석 등이 그 정신을 이어받은 당대의 석학들이었으며,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에 옮긴이가 의암으로서 병자조약에 반대 상소를 올린 바도 있었다. ▲ 유인석 의병장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거사할 마음을 굳히고 11월 28일 문인인 이필희(李弼熙)서상렬(徐相烈)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의 의병진에 격려의 글을 보냈다. 당시 의암은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가정리에서 여막(蘆幕)을 지키고 있었다. 이른바 제천(堤川) 의진의 예하 부대들이 제천으로 진군, 양근(陽根)지평(砥平)원주(原州)제천(堤川)에 이르는 일대의 의병이 모두 제천에 집결하게 되어 대부대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대규모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이설 [1850~1906] 선생은 충남 홍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남당 한원진의 학통을 잇는 이돈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과 교리를 비롯하여 동부승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그때마다 상소를 올려 정국의 문제점과 방향을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홍주지역 유생들의 사상은 위정척사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위정척사론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따라 척사의 대상을 달리하였다. 초기에는 소중화를 지키고 사학을 물리쳐야 한다는 위소중화衛小中華 척사학斥邪學의 이론을 형성하였으나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항복조약이라고 통박하면서 척왜론을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변란에 즈음하여 척왜론은 일본과의 결전을 감행하자는 대일항전론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위정척사론은 의병투쟁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선생은 1894년 갑오변란에 사직하고 낙향한 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홍주의병에 참여하였으나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매국적을 처단하고 일본과의 전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신언준 선생(申彦俊, 1904. 11. 8~1938. 1. 20)은 1904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부친 신정균과 모친 송씨(宋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은암(隱岩)이다. 선생은 어려서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1918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오산학교는 한말 상공업에 종사하여 크게 성공한 이승훈이 설립한 신민회 계열의 민족학교로 평양의 대성학교와 더불어 서북지역의 민족운동자들의 근거지였다. 때문에 1911년 초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인사들을 탄압할 때 오산학교와 대성학교는 그 주된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때 대성학교는 폐교되었고, 오산중학교는 교주인 이승훈이 피검되어 폐교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던 서북지역 민족교육의 본산이자 민족운동의 요람이었다. 더구나 이승훈은 출옥 후 기독교측 대표로 일제하 최대의 민족 독립운동인 3.1운동의 불꽃을 지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으로 활약하였다. ▲ 신언준 선생 이에 영향을 받은 오산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 또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타오르던 시기인 1919년 3월 31일 태극기를 앞세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곽재기[18931952] 선생은 충북 청주사람으로 일찍이 서울에 올라와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청주 청남학교(靑南學校) 교사를 지내며 1909년 청소년으로 조직한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의 당원이 되어 80여 당원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 7월 황상규(黃尙奎)윤소룡(尹小龍)김기득(金奇得) 등과 함께 만주 길림성 동녕현(東寧縣) 소수분(小綏芬)으로 건너가 이성우(李成宇)외 여러 동지와 알게 되면서 동년 11월 9일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成宇)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 등과 일제의 관리밀정관공서 등을 주살파괴함으로써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무력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는 강력한 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 곽재기 선생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 등을 파괴하여 전국의 인심을 자극하기로 결정하고 황상규(黃尙奎)는 먼저 길림(吉林)에서 폭탄의 제조방법을 배우고 그는 김기득(金奇得)과 함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동우 이탁(東愚 李鐸, 1889-1930)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이탁 선생은 평남 평원 출신으로 1908년 평양 대성학교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1913년 만주 일신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신흥무관학교 경영에도 참여하였다. ▲ 이탁 선생 1919년 매국 7적을 응징할 목적으로 27결사대를 결성하여 서울로 잠입하였다. 1920년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표로 임시정부에 파견되었으며, 서간도지역 임시정부 군사기구인 광복군총사령부 참모장과 임시정부 동삼성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7월 미국 의원단 내한 때 3개 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토록 하였다. 1921년 상해에서 한중국민호조사를 조직해 문서과 부주임으로 활동하였다.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무간사로 선임되었고, 시사책진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2년 상해 대한적십자사 감사로 선임된 후 국민대표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가 조직되자 서기로 임명되어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19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김경천 [18881942] 선생은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자 민족적 책무를 자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여 마침내 1919년 6월 6일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신의주 대안 안동현(安東縣)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총재인 안병찬(安秉瓚)의 체포로 인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서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대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구입을 위해 북간도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으나 그곳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로 인하여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청지역도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곤궁에 처해있는 재러동포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선생은 일제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은 1920-30년대에 중등학교나 신문사에 적을 두고, 주로 신문과 잡지에 계몽성 짙은 역사 관련 글을 많이 발표하였다. 선생은 1995년 독립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이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호암 선생은 1910년대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징역 8개월의 실형을 받았고, 또 1920년대 후반에는 신간회(新幹會)와 조선물산장려회에도 참여한 바 있다. 1920~30년대 선생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깊고 다양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우리말과 역사를 억압하던 식민지 현실에서 우리 역사의 대중화를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선생의 생애와 학문 또는 저술에 관해서는 그간 자주 논의되어 왔으나,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부분을 강조하며 선생의 생애를 소개하고, 학문도 언급하고자 한다. ▲ 역사학자요 독립운동가인 문일평 선생 1888년(고종 25) 5월 15일, 압록강 가까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호(金乎, 1884.5.25~1968.1.5) 선생은 1884년 5월 25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선생은 1912년 11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1914년 7월 25일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뉴욕이민국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의 보증으로 미국에 첫 발을 디뎠다. 1910년대 초반 당시 대한인국민회는 북미와 하와이는 물론 시베리아, 만주, 수청(현재의 파르티잔스크) 등지에 국민회 지방총회를 설립하였으며, 멕시코지역에도 지방회를 설립하는 등 해외한인의 최고통일기관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3년 6월 미국국무장관으로부터 재미한인의 대표기관으로 인정받는 한편, 1914년 4월에는 캘리포니아주정부의 인허를 얻어 완전한 한인자치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 입국하는 유학생과 한인들은 여권이 없을지라도 대한인국민회의 증서와 보증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 역시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으로 미국에 입국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도미 후 노동에 종사하면서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대한인국민회 재정에 필요